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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관리하는 존재의 추악함과는 별개로,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5월의 정원은 그 외관만은 낭만으로 가득한 장소가 분명했다.
그러나 루카스 무어의 모습을 갖춘 남자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느낀 감정은 가벼운 짜증뿐이었다.
‘너무 멀어.’
이 거대한 장미정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덫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떤 도망친 희생양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하고 탐욕스러운 의지로 짜 올린 거미줄 같은 주문이다. 지금은 흔적기관처럼 거치적거리는 수준이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되살아날 듯이 입을 다신다. 그 태동하는 고대의 악의가 정원 모퉁이 사이사이마다 피부를 찌를 듯이 느껴졌다.
그 오랜 세월동안 상처는 썩고 몰락은 처절했을지언정, 끓어오르는 증오만은 너절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남자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소싯적에 이 저택을 직접 지어 향락을 즐기던 무어 가문의 고대 가주가 치명적인 몰락 이후로도 여전히 이곳에서 몸을 바꿔 기생하며 회생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도, 그 몰락을 불러온 인간의 후손이 이 저택에 제 발로 들어와 예정된 파멸을 앞당겼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남자의 유년에 엄청난 격변을 남겼을지언정, 앞으로 그가 수행할 명료한 계획을 한 점 어그러트릴 수 없었다.
계획을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는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저택 현관을 향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그는 생전 발 디뎌본 적 없던 저택에서 약혼자 행세를 한다는 사실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갓 태어나 첫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걸린 서약의 주문은 그의 심장을 그 어떤 심리적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도록 마취시켰다.
그 서약이 제물의 서약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솔직히 매우 유용한 주문이 아닐 수 없었다. 남자는 손등 밑에 감춰진 제물 낙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계획을 검토했다.
‘수정할 곳은 없군.’
남자가 현관에 도착한 것은 일이 잘 해결된 후에 다른 신화서를 찾아 비슷한 주문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그는 반쯤 타고 찢어진 채로도 형용할 수 없는 힘을 우겨넣어준 자신의 신화서를 떠올리며, 기록된 주문 중 하나를 사용했다.
깊은 암시.
남자의 입매에 미소가 번졌다.
“제 약혼자를 찾아왔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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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처박혀있던 멍청한 코흘리개 여자애 하나 홀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로제 오베르에게 지속적으로 암시만 주면 됐다. 고대 가주가 저 여자애를 만족할 만큼 처절한 방식으로 공양해버리는 것에 온 신경을 쏟는 사이, 남자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한 순간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좀 겁이나 줘볼까.
그때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툭 이상한 발상이 튀어나왔다. 암시를 걸기도 전, 첫 만남의 순간에 이 루카스 무어의 겉 거죽이 마음에 든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낼 만큼 괴상한 취향을 가진 여자에게 짜증을 느꼈던 것일까?
어쨌든 이 저택에서 희대의 얼간이가 아닌 이상 이미 느끼고 있었을 공포를 조금 더 부추기는 것만으로도 여자는 유일한 외부인인 자신에게 더 의존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 만일의 경우 자신이 공양하게 될 시 효율도 더 좋을 테지.
공양을 받는 옛 영주들은 그게 어떤 요인이든, 공양하는 자가 통상적으로 ‘가깝다’고 여겨지는 관계를 가진 무언가를 바칠 때 더 기꺼워했다.
그 노골적인 악성이 얼마나 숭배자들에게 저열한 효율성을 추구하게 만들었는가.
산증인이 바로 남자 자신이었다.
치명적인 몰락의 순간, 무어 가문의 찌꺼기들은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했기에 그들은 또 다시 공양물을 바칠 다른 옛 영주를 섬기며 부와 힘을 긁어모았고, 그 효율을 위해 제물용 사생아를 생산관리 했었다.
물론 이제 과거형일 뿐이다. 이제 세상에 ‘무어’의 성을 쓰는 사람은 남자 혼자뿐이었다.
짧은 회상에서 빠져나온 남자는 바로 자신의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일단 가주의 기생체부터 마주치게 해볼까? 그는 되도 않는 ‘정원의 아름다움’따위를 입에 주워섬기며 로제 오베르를 충동질했다. 이 나약한 코흘리개는 지금은 소년에게 기생해 정원사 행세를 하고 있는 그 고대의 망령을 만나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직후 로제 오베르가 기억상실증을 고백했다.
그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 이상한 영감이 번뜩였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로 기억상실증상이 나타나거나 실성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재밌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우선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드는 약을 쓸 것이다. 복용한 자가 상황을 오인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약.
그리고 몇 가지 소품과 현상이 더해지면 저택 모두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계획을 세운 남자는 편지지를 들고 한 자 한 자 단어를 골라 글에 잡아넣기 시작했다.
희미한 악의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남자의 인생에 처음 겪은 감정적 충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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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날 밤에야 남자는 로제 오베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변수를 줄이기 위해 마담 자우어라는 여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몰락의 시기에 광산으로 숨어든 무어 가의 잔존 세력이 기록한 가문의 사료을 읽고 완전히 홀려서, 고대 가주의 회생을 위해 봉사하는 추종자가 된 것 같았다.
아마 가주에게 오베르를 바치는 것으로 그 지독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 헛된 공상이 좀 우습긴 했지만, 어쨌든 존재 자체가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죽일까?
남자는 짧은 고민 후에 결론을 내렸다.
조금만 기다리자. 어차피 그 여자도 공양해버릴 거니까.
지금은 로제 오베르의 반응에 더 관심이 갔다. 남자는 일부러 공포에 반응하는 모습을 확인하려 일몰의 정원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로제 오베르는... 놀랍도록 멀쩡했다.
심지어 2층에서 맨몸으로 정원으로 뛰어내리며 뿌듯해 했다.
“......”
이럴 리가 없는데. 남자는 온갖 떠보는 말과 암시를 퍼부었지만 로제 오베르는 얼빠진 소리나 해댔다.
아무래도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드는 약이 기억상실 증상을 더 악화시킨 것 같았다. 학습능력과 공포도 없는 얼간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남자는 하필 자신이 찾은 신화서에서 타인의 정신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장이 소실된 것이 몹시 불만스러워졌다. 대체 이 여자애 머리의 어디가 망가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남자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고대 가주의 추종자는 당장 죽이지 않더라도 좀 치워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남자는 그 밤에 즉시 저택에서 가장 큰 서재에 있는 마담 자우어의 은신처를 파헤쳐 온갖 주문과 괴이한 유물의 흔적으로 범벅을 만들어놓았다. 새벽에 해주를 위해 여자가 허겁지겁 저택을 뛰쳐나가는 것을 확인하자 이상한 만족감이 찾아왔다.
이제 이 저택에서 그 멍청한 여자애를 자극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 만족감은 로제 오베르가 변색된 티스푼을 가지고 그를 찾아왔을 때 최고조가 되었다. 일이 예상대로 진행되는 만족감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었으나, 남자는 이번에도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서 로제 오베르에게 독살시도를 핑계로 식사조달을 약속했을 때도 남자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제물로써의 가치보존을 위한 조치라 생각했다. 이 저택에서 한 때 입이 있었던 것을 지속적으로 섭취할 시, 옛 영주의 권속으로 점차 변이되며 공양물로써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 여자애가 저택의 사람들과 잘 지내보려는 기색을 내비치는 것이 불쾌한 것 역시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것에서 오는 분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순간의 감정들은 마치 둔탁한 울림처럼 살짝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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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로제 오베르. 남자는 담을 넘으며 중얼거렸다. 손에는 번화가에서 가져온 고기 요리가 들려있었다. 아직도 식지 않아 충분히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남자는 무심코 그 봉투를 노려보았다. 설마 이것도 부족하다고 하지는 않겠지.
체구도 형편없으면서 왜 식사량이 이 따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끔찍할 만큼 연비가 나쁜 몸이 분명했다. 분명 그 여자애가 무어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면 걸음마 떼는 시기를 못 넘기고 도살당해 가축먹이가 됐을 것이다.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저게 왜 저기 있는 거지.
“오늘 밤은...... 노숙인가.”
또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 로제 오베르가 멀뚱히 정원 외곽에 서있었다.
이 저택에서 검은 것과 붉은 것은 무의식을 파고들 만큼 집요한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 언질이 없어도 정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해가 지고난 후 혼자 정원을 가로지르는 짓은 무척 꺼려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저 여자애는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남자는 바로 며칠 전에 자신이 일몰의 정원으로 로제 오베르를 불렀다는 사실은 인지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불렀다.
로제 오베르는 난감한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이 왔다는 절박한 안도감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이 그저 반갑게 남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부엌에 음식을 찾으러가려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남자가 내미는 음식을 받았다.
더 어처구니가 없던 것은, 그 말에 남자가 꺼림칙한 기분이 됐다는 것이다.
그것은 희미한 죄책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 검은 밤에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에 걸어가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당혹스러웠다. 자신은 이렇게 애매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혹시?
남자는 자신의 장갑 낀 손등 위를 쓸어보았다. 여전히 느껴졌다. 묘하게 우둘투둘한 돋은 문양이 선명했다.
역시 그대로다. 남자는 단지 정원에 깔린 주문에 기감이 반응한 탓일 것이라 추론했다. 그리고 작은 의심을 마지못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