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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남자는 짐덩어리와 함께 야밤의 정원 속을 가로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의 너그러움으로 눈앞의 여자애에게 저택을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선택지를 제안해줬다.
“괜찮으시다면 밖에 제 차가 있으니, 그걸 타고 시내로 나가서 괜찮은 숙박시설을 잡아드릴까 합니다만 어떠십니까? 저택에는 새벽에 연락을 넣지요.”
그러나 여자애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미련도 없이 부드러운 거부였다.
바보 같은 로제 오베르.
기껏 외부로 나갈 수 있도록, 숨통이 트이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거절하다니. 정말로 모든 기억이 표백되었더라도 이 음산한 저택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너무 오래 외출하지 못했던 탓에 밖에 나가는 것이 꺼려졌던 것일까.
아니면...... 아니면 그냥 자신과 외출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한 울렁거림이 울컥 올라왔다.
다시는 이런 제안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계획대로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고려 없이 저 얼간이도 공양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뒤에서 따라오는 그 얼간이를 의식해서 발에 걸린 돌멩이를 세차게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이상적인 약혼자 상에 어긋나는 행동인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후로 남자가 한 모든 일들은 전부 제물 관리의 일환일 뿐이었다.
저택을 같이 살펴보자는 제안을 승낙한 것도 그랬다. 저택을 돌아보며 이 저택의 음습함을 직시하게 만들어 로제 오베르를 충분히 의존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위기의식 없이 지하실에 들어간 여자애를 끌고 나온 것도, 제물로써의 가치를 상실할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목적이었다. 지하실에 보관된 변이된 체액들에 접촉하면 변이 속도가 빨라지니까.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거치는 중에도 로제 오베르의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계속 대책 없이 밝고 긍정적이며, 기준을 충족할 만큼 약혼자에게 의존적이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을 잃은 탓에 저택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더 수월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어코 로제 오베르는 변색된 티스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도 떠들고 싶어 하게 됐다.
남자는 점차 저택에 기생하는 것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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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저것부터 이 저택에서 추방해야겠다. 남자는 마담 자우어의 덜떨어진 자식을 보며 생각했다.
어쩐지 암시를 걸어 간편히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마지막 끝까지 공포를 줘서 버티지 못하게 만들어 쫒아 내버리고 싶다. 그리고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저 병신은 남자가 손가락만 까딱거려도 겁에 질려 자살할 것 같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건 남자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 곧 버티지 못하고 도망칠 것이다. 어쩌면 오늘 당장이라도.
예감만으로도 남자의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분명 남자는 다분히 감정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모든 격정적인 상황에서 그렇듯이, 그 자신은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고 판단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당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합리화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남자는 한결 평온해진 상태로 천천히 로제 오베르의 상태를 캐낼 수 있었다. 겉으로는 마치 약혼자와의 정다운 문답처럼 보였으리라.
“로제, 특별히 선호하는 맛이 있습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선호하는 색은?”
“예. 혹시 언제부터 붉은 색을 선호하셨습니까?”
그는 몇 가지 질의를 거쳐서, 그 여자애의 변이 정도가 제법 위험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물로써의 효용이라도 있으려면 좀 더 관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마 그래서 그 여자애가 소년 정원사에게 기생 중인 가주의 망령을 만났다는 소리에 다소 당황했던 게 분명했다. 비록 남자가 정원사에 대한 말을 했던 건 맞지만, 그건 변이 정도를 모를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더 이상 변이가 진행되면 분명 가주는 이 여자애를 산채로 가죽이라도 벗겨서 공양해버릴 것이다. 아예 인간이 아니게 되어 공양을 할 수 없는 것보다는, 덜 분풀이를 하더라도 상징적인 복수의 완성을 갈망할 테니까.
그러니까 더 변이의 위험은 없으면서 이 위기의식 없는 여자애도 기겁하고 무서워할만한 경험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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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엄선한 서적을 여자애가 드나든다는 서재 한 편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해두었다.
기록한 본인을 박피해 만든 그 서적은 남자가 엉망진창으로 어그러트린 마담 자우어의 비밀공간에서 발견한 것이었는데, 폐광에 남아있던 무어의 유품이 그 여자에게 도난당한 것이라 남자는 추측했다.
옛 영주들에 대한 끔찍한 기록이 담긴 그 글은 읽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 섬뜩한 공포를 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못해도 영향을 발휘할 것이다.
게다가 치명적인 부분은 잘 제거해뒀으니 큰 문제도 없으리라. 남자는 이 저택 밑에 잠든 옛 영주에 대한 항목을 꼼꼼히 제거했다. 몰락 전 무어 가문이 섬기던 그 얼굴 없는 옛 영주의 기록을 직접 읽는 것만으로도 변이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만일 위해 그 항목도 지웠다. 잔존했던 무어가문의 후손들이 섬겼던 다른 지역의 옛 영주에 대한 기록을.
왜냐하면...... 자신이 로제 오베르에게 준 약병에 그 옛 영주의 문양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그 약병을 건네줄 때는, 일부러 저택 내에 더 큰 의심과 고통을 야기하기 위해 약병에 문양을 지우지 않았었다.
그 채찍과 갈고리가 겹쳐진 문양.
피붙이 고문자. 저열하고 천박한 옛 영주다. 그 노골적인 잔인함은 오히려 조악해서 더 피부로 닿아오는 면이 있었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손등을 눌렀다. 여전히 우둘투둘한 화상 흉터로 이루어진 문양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괜찮다. 그 얼빠진 여자애가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알아차려도 상관없지 않은가? 기억은 지우고 새것을 우겨넣으면 그만이다. 약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그 여자애 머릿속을 주무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심호흡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몇 번의 심호흡 끝에 평정을 되찾았다.
“......”
그러고 보니 또 식사를 준비해야할 때였다.
지난번에도 어쩐지 더 들어갈 수 있는데 양이 부족했다는 기색이었다. 그 연비 나쁜 몸이 만족할만한 양을 사려면 역시 가금류를 통 채로 가져다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남자는 이상하게 짜증이 차오르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음식을 구매하고 난 뒤에는 제법 기분이 괜찮아졌다. 그 얼간이도 이 정도면 만족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분은 로제 오베르를 만나자 수직하강 했다.
그 안색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만큼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여자애에게 암시를 걸었다. 진정하고 이 빌어먹게 기분 나쁜 행색을 없앴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암시는 늘 그랬듯이 성공적이었는지 여자애의 안색은 금세 괜찮아졌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을 보며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자 도리어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어지간히도 이 겉가죽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로제 오베르가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안 그래도 가라앉았던 기분은 완전히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혹시 본인에게 예정된 생지옥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아무래도 그 글을 보고 대단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까지 기억이 돌아온 것을 보면.
어쩌면... 어쩌면 공포를 심어주는 것도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지나치게 겁을 먹어서 다루기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남자는 어떤 급진적인 착상을 떠올렸다.
그냥 데리고 나갈까?
그래. 어차피 계속 먹을 것을 여기까지 가지고 오는 것도 번거로웠다. 매번 옮길 때마다 변이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해 주술적 처리가 필요한 점도 그 번거로움을 배가 시켰다.
어차피 가주의 망령은 때가 되면 잡아가두든 제거하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었다. 이 여자애를 당장 빼돌린다면 분명 눈이 뒤집혀서 돌발 행동을 할 테니 미리 없애야겠다. 남자는 차분히 계획을 재정비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특별히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 밤에 암시를 걸어서 바로 데리고 나갈 수도 있다. 그리고 계획을 바로 실행하면......
“......”
왠지 내키지 않았다.
남자는 문득, 로제 오베르가 철저히 이 의견에 동의하고 완전히 기꺼운 마음으로 제안을 승낙하여 흔쾌히 이 저택에서 함께 떠나겠다고 대답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래. 그 편이 장기적으로도 훨씬 편할 것이다. 암시의 유효기간은 호감과 동의가 전제될수록 늘어나니까. 남자는 자신에 대하여 캐묻기 시작한 로제 오베르의 태도 변화를 만족스럽게 느끼며 대놓고 이주에 대한 제안을 해보았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여자애의 대답이 흔쾌했다. 만족감이 거세졌다. 뒤에 마담 자우어의 아들에 대한 덧붙임이 달리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건 얼마 안 가서 사라질 것이니까.
저 여자애를 포함해도 남자의 계획은 아주 순조로웠다. 그는 무척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날 자정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만족감은 다음날 로제 오베르에게 외출 제안이 오자 더 강렬한 충족감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감과 이상한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여자애가 처음으로 경험할 제대로 된 세속과 향락에 엄청난 유혹과 흥분을 느끼게 만들어서 이 저택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게 만들 것이다.
남자 자신도 버러지 같던 처지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자 처절하고 숨 막히게 살아온 만큼, 타인에게도 같은 욕망이 있다는 것 정도는 굳은 마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루카스 무어도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순간까지 그랬으니까, 아마 인간은 다들 비슷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