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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41화 (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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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초반에는 남자의 예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 같았다.

시가지에 진입하자마자 그 여자애는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오래된 저택에서 나와 현대문물을 접하는 것은 분명 다분히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그 시가지에서 가장 명성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때도 제법 즐거워 보였다. 후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빠르게도 먹어치우는 판에,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후식을 넘겨주게 됐다.

그러나 가장 신경 써서 계획했던 부분에서 상황이 어긋났다. 남자는 저 애가 즐겨본다는 카탈로그를 보낸 고급종합상점에 직접 방문해서 반나절 간 독점 주문을 넣는 것으로 사치와 떠받들어지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왜인지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 그래요. 좋네요.”

“그, 그렇군요.”

“아, 네.”

“음......”

로제 오베르는 직원들의 정성스럽고 간곡한 설명과 저자세에도 점차 말수와 반응이 없어지더니, 기어코 적당한 변명거리로 슬쩍 방을 나가버렸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귀금속을 테이블에 내던졌다. 뭐가 문제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여자애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나선 직원 중 한 사람의 정신 속에 들어갔다. 과로와 우울함으로 약해진 정신에 비집고 들어가는 건 거의 저항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공중전화기를 쓰려던 로제 오베르에게 잔돈을 뜯겼다.

“......”

남자는 좀 당황하긴 했지만, 금세 그보다 어디에 전화를 거는지 알아내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전화기에서는 아까 레스토랑에서 만난 머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 금발애송이가 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자칭 탐정이라고 한다.

어차피 옛 영주에 대한 지식이 있는 부류의 놈도 아닌 것 같았으니, 저게 로제 오베르에게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남자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간접적으로 저 얼빠진 여자애에게 위기의식이라도 심어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초조했다.

남자는 결국 돌아온 로제 오베르에게 사진기를 안겨주었다. 고장 내거나 빼돌릴 생각이었던 물건을 직접 건네주게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 했으나, 아무튼 눈앞의 여자애가 한껏 기분이 좋아보였기 때문에 괜찮았다.

사진기가 아니라 사진을 망치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 어떤 신호가 감지되었다. 통제와 금지 주문을 걸어둔 그의 비밀공간에서 온 것이었다.

침입자 경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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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제대로 뒤집어놓고 갔는지, 티끌도 없이 정돈되어있던 수납공간과 벽이 난장판이었다. 어설프지만 주문의 흔적 같은 것도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자신이 그 마담 자우어라는 여자의 공간에 벌인 것과 유사했다. 그 멍청이가 악에 받쳐 한 짓이 분명하다고 남자는 판단했다.

특별히 중요한 물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지 문제는 저 문구다. 벽을 뒤덮고 흘러내리는 시뻘건 악의.

‘사생아 새끼’

이건 일부러 자극하는 견제다. 아무래도 마담 자우어를 속박한 고대 가주는 남자가 로제 오베르를 빼돌리려는 기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역시 죽여야겠어.”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애 하나 잡아다 공양하려고 별 역겨운 짓을 다하는 것이 우스웠다. 정작 본인도 그 여자애를 저택에서 빼내려고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던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남자는 잘근잘근 음모를 꿰맸다.

우선 수족인 마담 자우어부터 순서대로 잘라내야겠다. 로제 오베르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우선 합법적인 방법으로 밑바닥을 보여주며 이 저택에서 끌어낸 후에 자살로 위장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독살 혐의를 뒤집어씌우자.’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재빨리 생각해낸 남자는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마담 자우어의 비밀공간에서 가져온 러셀 오베르의 일기장이었다. 로제 오베르의 아버지, 그의 일기 장은 이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남자는 개괄적인 타임라인을 세워보다가, 무심코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일기장을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로제 오베르의 입장에서.

-...그렇게 찾으면 안 되는 것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의 뿌리를 찾으려는 내 시도는 끔찍한 진실로 다가왔다.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옛 영주... 그 고대의 존재를, 나는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왜 가문의 선조가 저지른 오만한 과오를 나와 내 자손이 감당해야하는가!

피할 수 없는 멸망을 피하려 발버둥치는 내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인간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오염의 부산물일 뿐이기에.

그래서 나는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딸아이가 어떻게 되든 내 탓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모든 것은 저주받을 선조의 탓이다. 절대로 내 탓이 아닌 것이다.

무책임과 회피, 자기합리화의 향연.

“쓰레기들끼리 잘 어울렸겠군.”

남자는 러셀 오베르가 너무 쉽게 죽은 것이 잠시 유감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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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와 작은 증거 조작만으로도 마담 자우어는 체포되었다. 그렇게 남자의 음모는 수월히 성사되는 것 같았다. 상상 이상의 평온이 남자의 심장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단지 거슬리는 일을 굳이 꼽자면, 아직도 로제 오베르가 탐정과 계속 연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거슬리는지도 알 수 없다는 점이 답답했다. 그냥 몹시 그 금발머저리를 없애고 싶었다.

그러나 전에도 판단했던 것처럼, 차라리 그 탐정을 통해서 저택의 비밀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로제 오베르가 겁을 먹는 것이 오히려 남자에게 좋은 게 아닌가? 왜 생각과 느낌이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기에, 답답함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곧 이성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택의 거주 내역을 듣고 경각심이라도 느낀 것인지, 로제 오베르가 호신용품에 대하여 문의한 것이다. 그것도 남자에게.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혹시 제가 무기를 좀 구할 수 있을까요?”

호신용품에 대해 부탁할 정도라면 최소한 남자는 전혀 의심을 사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여자애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남자는 적당한 물건을 구해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신 주문을 걸어서 삿된 끔찍한 것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제가 최대한 괜찮은 호신용품을...”

“아, 그런 게 아니라 살상이 가능할 걸로.”

“......”

하지만 로제 오베르는 딱 잘라 품목을 지정했다.

“권총 구할 수 있을까요?”

남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로제 오베르는 감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슬슬 약효가 빠지기 시작할 기간이다. 정상적인 사고력이 돌아오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주관이 뚜렷한 것으로 볼 때, 원래는 상황에 휘말리지 않고 굉장히 판단력이 좋았을 수도 있다. 지금도 행동력은 있으니까.

갑자기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울렁거리고 따끔거리는 이상한 느낌. 참을 수 없어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옥죄임이었다.

그것은 한층 강렬해진 죄책감이었지만, 경험이 없던 탓에 그런 세밀한 구분을 하지 못하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갑작스럽게 기분이 굉장히 나빠진 것에 불과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당연히 루카스 무어의 모습이다. 그 역겨운 인간의 얼굴.

남자는 의복을 정리하겠다는 둥 대충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어쩐지 로제와 마주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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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리를 피한지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로제 오베르가 정원에서 고대 가주와 조우했다.

제발 한 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나? 남자는 초조함에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또 다시 이상한 답답함이 무겁게 가슴을 조인다.

‘처음에...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았어야 했나?’

두 상념이 남자가 정원으로 황급히 이동하는 내내 지긋지긋하게 머릿속에서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그리고 정원사와 함께 마주보고 서있는 로제 오베르를 확인하자마자 둘 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건 강렬한 위기감뿐이었다.

남자는 눈앞의 여자애를 돌려보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말을 하면서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로제, 마담 자우어의 딸이 당신을 찾더군요.”

“어? 진짜요?”

“이쪽은 제가 잘 이야기해두겠습니다. 걱정 말고 가보세요.”

“아... 고마워요!”

다행히 짧은 대화를 끝으로 로제가 저택으로 뛰어간다. 이상할 만큼 짙은 안도감이 남자를 사로잡았다.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이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소년의 모습을 한 망령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뒷목에 소름이 올라왔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감정적 공포가 목을 잡아챘다.

직후 문답으로, 남자는 이 빌어먹을 망령이 기어코 저 여자애를 찢어죽일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 말.

“아무 것도 아닌 쪽은 밑바닥을 기며 싹싹 긁어모아야하는 걸요. 그래야 진짜 루카스 무어가 될 거 아니에요.”

진짜 루카스 무어.

단언컨대 남자는 이 저택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자신이 루카스 무어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때였다면 그 역겨운 인간이 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떠들어대는 저 기생 망령의 헛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제 남자는 사실...... 사실, 자신이 루카스 무어가 아니라는 것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로제 오베르가 가지고 다니는 사진기를 볼 때마다 그 필름에 또렷이 새겨져있을 루카스 무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걸 도저히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애가 마음에 든 외양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남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걸 내버려둘 이유가 하등 보이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남자는 마치 정원사를 따라하듯이 활짝 웃었다.

산산이 찢어서 다시는 이 땅에 티끌만한 의지하나 행사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이미 진짜 루카스 무어야. 고작 기생망령 주제에 아직도 가주처럼 구는 꼴이 우스운데. 네 몰락한 버러지 가문 따위에 기고만장해서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는 구나.”

그리고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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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가 너무 그리워져서... 연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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