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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죽은 나무의 파편으로 가득했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통증이 선연했다. 심장을 노렸던 마지막 발악을 해주하는 과정에서 과부하가 걸리면서, 아무래도 왼쪽 갈비뼈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금이 간 것 같았다.
그러나 망령의 숙주였던 두 장미나무는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할 수준으로 찢어졌기 때문에, 그는 그저 만족스러웠다.
남자는 장미나무 옆에 떨어진 공구를 잡아들었다. 찌릿거리는 주문의 광폭한 힘이 느껴졌다.
이건 공양에 사용하는 제사단검이다. 공구 모양을 하고 있지만 몇 부분만 떼어내면 아마 이상야릇하게 구불구불한 모양의 원형이 드러날 것이다.
얼마나 많은 공양과 의식으로 이걸 만들어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저 유용한 전리품이다. 남자는 흙먼지 묻은 장갑으로 가볍게 그것을 챙겨들었다.
비록 정원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괜찮았다. 로제 오베르는 이해심이 좋은 편이니, 잘 둘러대고 보상하겠다고 말하면 분명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러면 이 빌어먹을 장미나무들은 다 뽑아버리고 새로운 나무를 심자고 말하고 싶다. 그 여자애가 좋아할 과일나무도 괜찮겠지. 그리고 이 저택을 떠날 때, 도착할 곳에 같은 나무를 심어놨다고 말하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남자는 가벼운 공상에 잠겼다. 그가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는 언제나 세 가지 경우의 수만을 가지고 판단해나갔었다. 일어날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 그리고 일어날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이런 실없는 관측은 처음이었다.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남자는 몹시 홀가분해졌다. 잠시 후 저택에서 만난 로제가 단번에 괜찮다고 말하자 이상한 뿌듯함까지 들 정도였다.
그가 얼마나 냉정한 판단력을 잃었던지, 심지어 로제와 사진까지 찍었다.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비록 외양은 루카스 무어의 것이라도 표정이나 눈빛, 동작 같은 것으로 자신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대책 없이 낙천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남자는 그것이 제법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상한 고양감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만큼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제 오베르가 다음날 점심에 선약이 있다며 그의 요청을 거절하는 순간, 무서울 만큼 빠르게 가라앉아버렸던 것이다.
그 탐정이라는 머저리를 만나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왜 자신에게까지 말하지 않는 것일까? 약혼자에게 또래 이성을 만난다고 말하는 게 껄끄러운 것일까?
같은 날 자신과 함께 외출하는 것 자체는 별 고민 없이 승낙한 것을 볼 때, 아마 그런 가벼운 고민이었을 것이다.
과민히 반응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몇 번이고 생각을 더 정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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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아침에 남자와 로제는 바로 외출했다. 총기를 고르고, 시범 사격을 해보고, 마지막으로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기까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자는 만일을 대비해 점심 약속 장소로 향하는 로제에게 간단한 추적 주문을 걸어놓았다.
그리고 잠시 우울감에 젖어있었다. 그 짙은 무기력함에 남자는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깜박거렸다. 기생 망령을 잡느라 쌓인 피로 때문이라고 짐작하면서.
어쨌든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사진관을 향했다. 어차피, 지금 저택 상태정도라면 사진에까지 이상 현상이 침투해있을 것이기에 검열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게 남자는 사진관 주인에게 약간 과한 암시를 걸고 암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장 먼저 그와 로제가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아니었다. 로제 오베르는 로제가 맞았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그 역겨운 루카스 무어의 모습이다.
심장이 차게 식는 기분이다. 혹은 불타는 느낌이다. 그 상반된 고통스러움에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반으로 찢었다. 그리고 루카스 무어가 찍힌 쪽을 으스러트리듯이 구겨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한 쪽을 들여다보았다. 다소 난감한 듯, 경직된 표정의 로제 오베르가 보였다. 이 정지된 찰나에도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남은 사진을 챙겼다.
남자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남은 사진을 살펴봐야겠다는 기묘한 의무감이 그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확인한 다른 사진들은 또 다시 남자의 심장을 옥죄었다. 이 망할 로제 오베르는 기어코 지하실에서 제단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선명한 초점과 밝기, 절묘한 수평까지 어찌나 잘 찍었던지, 사진너머로도 그 음습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아마 이 사진관 주인이 이 사진을 직접 봤다면 미치거나 홀렸을지도 모를 기괴한 몰골이었다.
남자는 더 빠른 손으로 사진을 넘겼다. 제단, 유물, 벽화...... 그리고, 그리고 그게 있었다.
그의 비밀공간에서 없어졌던 것. 저택의 지하실에서 제단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여는 의식을 기록한 함.
그 찢어죽일, 그래서 실제로도 찢어발긴 기생망령이 이걸 로제 오베르에게 넘겼었던 것이다.
남자는 사진을 내동댕이치려는 충동에 저항했다. 이상할 정도로 분노가 치미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로 이럴 수가 없도록 제물낙인이 찍혀있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더 철저히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했다......
그래서 남자는 사진들을 검열해 위험할 정도로 보이는 건 삭제하거나 흔들리게 만들면서도, 그 여자애에게 적당히 심적 충격을 줄만한 사진들을 거르지 않고 남겨두었다. 사용인들을 좀 더 경계하게 만들어야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확인하면, 더 빨리 이 저택을 떠나고 싶다고 결정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그렇게 말할지 몰랐다.
그리고 저택에 귀가해서 사진을 보여주자마자, 남자는 곧바로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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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필름이 유실됐다고 말할 걸 그랬다. 그냥 통째로 없앴어야했다.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로제는 곧바로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사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몇 입 먹는 시늉을 하더니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때, 옛 영주들에 관한 책을 봤을 때도 이런 수준은 아니었다.
남자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렇게 무서워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계속.
그리고 로제 오베르는 아침을 지나 한낮이 다 되어서야 침실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불안했지만, 말하는 것이나 표정은 그래도 지난 저녁보다는 나아보였다.
그렇게 남자가 간신히 안도감을 긁어모으며 로제 오베르에게 말을 붙이고 있을 때, 그 희미한 안정마저 박살내는 말이 여자애의 입에서 나왔다.
“그 장미나무 살아난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장미나무의 정체를 모르는 로제가 굳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잘못 봤을 것이다. 그렇게 되뇌면서도 남자는 결국 적당한 변명을 대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장미나무는 정말 회복 중이었다.
그는 장미나무를 걷어찼다. 뿌리 채 뽑혀서 힘없이 나뒹군다. 기생 망령이 이 안에 있다면 이렇게 쉽게 뽑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숙주가 아니라 단지 그 망령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상징물로써 회복되었다는 말인데.
대체 망령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토록 타격을 입었는데 상태가 성할 리가 없었다. 분명 이 정원 안에 있을 텐데.
그러자 어떤 섬뜩한 영감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사라지기 전에 오베르와 동귀어진이라도 시도하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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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자신이 추적 주문을 로제에게 걸어둔 것을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못한 채 그 주문에 매달려 뛰었다. 주문이 맺힌 그 장소에서, 피 묻은 인골송곳을 들고 있는 망령이 로제 오베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도저히 제때에 달려들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피가 솟구쳐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남자는 정신없이 약화주문을 걸었다. 제발, 제발 통해야했다. 저 여자애에게 닿기 전에 쓰러져야하는데...!
그리고 놀랍게도, 로제 오베르는 제때에 총을 쐈다. 총에 맞은 기생망령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다섯 걸음을 남겨두고 터져서 녹아내렸다.
남자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른 채, 로제를 끌어안았다.
죄책감과 안도감이 뒤섞여 진탕이 되며 고통인지 평온인지 알 수 없이 뒤죽박죽 흥건히 머릿속을 적셔왔다. 생에 처음 느끼는 이 넘치는 감정의 결들을 그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처음으로, 그가 가진 공포가 느낌이 아니라 생각으로 정립되었다.
로제 오베르가, 이렇게 적제적소에서 침착하게 총을 쏠 정도의 성정을 회복했다.
이 여자애가 제정신을 차려서 날 의심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누군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알면 어떻게 하지?
남자는 정신 회복을 방해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주문을 이미 네댓 가지나 알고 있었다. 아니면 그냥 약을 다시 쥐어줘도 이 여자애는 분명 의심 없이 복용해줄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 위기의식도 의심도 없는 천진한 상태의 로제 오베르로 돌아가겠지.
그러나 도무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런 짓까지는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쌓은 신뢰를 자신의 손으로 바닥에 짓이기는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추악한 사실들이 낱낱이 드러나, 이 여자애가 혐오나 경멸, 혹은 공포어린 시선으로 볼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너무 괴로웠다. 심장이 매이고 숨이 가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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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온갖 외부 인물들이 난입하며 점점 자신의 정체를 조여 오는 상황에서도, 남자는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만약에.
그 물약을 주지 않았다면. 티스푼을 조작하지 않았다면.
굳이 없던 약혼자인척 하지 말고 다른 자연스러운 접근방법을 생각해봤다면.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진짜 루카스 무어였다면.
“......”
하지만 그런 상념들도 더 큰 공포에 압도당했다. 이제 남자는 이 모든 것보다 로제 오베르가 죽을까봐 무서웠다.
전부 자신의 착오였던 것이다.
고대 가주는 장미나무에 기생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소년 정원사 몸에 기생하던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냥 상징적이고 편리한 도구들일뿐이다.
대신 그 망령은 저 지하실 밑에 있을 제단의 형용할 수 없이 강력하고 사악한 유물에 자기를 묶어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철저한 복수와 피의 공양으로 영생을 노리는 그 고대 가주가 이 현관 앞에 서있었다.
========== 작품 후기 ==========
(2/2)
남주는 이렇게 나홀로 후회물을 찍었습니다.
다음편부터는 다시 주인공의 개그로판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