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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43화 (43/57)

<-- 흑막 클리셰 -->

저거 선셋이잖아? 익숙한 정원사 복장에 밀짚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마치 아무 일도 없던 듯 평범하고 친숙한 모습이다.

물론 내 기억력이 금붕어 급도 아니고, 아까 정원에서 정원사가 습격하려다가 검은 물로 터졌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무어 경을 보니 이쪽도 얼굴이 창백한 게 그걸 떠올린 모양이다. 그때 현실도피 했었던 무어 경의 입장에서는 아마 더욱 충격적이겠지.

그리고 이미 그렇게 확실히 리타이어 했던 놈이 이 타이밍에 또 등장한다는 것은 전개상 못해도 중간보스나 흑막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는 척 하지 말고 여차하면 총이나 쏘자.

그러자 반대로 저쪽에서 아는 척을 해왔다.

“오베르 아가씨.”

소년 정원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원사 선셋의 그림자가 사라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일단 얼굴 자체는 장래가 기대되는 수준이라고 코멘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연갈색 머리카락에 동그랗고 부드러운 색의 눈동자와 모난 곳 없는 이목구비가 정말 곱상하고 선이 여린 것이 아역 배우로 대성할 인상이다.

근데 눈이 하나 더 있다.

겁나게 시뻘건 눈이 떡 이마에 박혀있다. 핏줄이 두둑두둑 튀어나온 사이로 동공이 쭉 찢어져서 살벌하기 그지없다. 히이이익...!

아, 아냐 자세히 보니까 파충류 눈 같어. 역시 드래곤 분신 드립이 맞는 건가? 드래곤이 설마 이 소설 최종흑막이야? 이제 이 인원으로 레이드라도 해야 돼?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단검, 저 정원사 공구 개조한 거잖아!

야 이 자칭 약혼자 놈아, 설마 이 상황을 예상하고 큰 그림 그려서 나한테 이거 준 거야? 나한테 어그로 다 끌리게 하려고!? 내 주인공 보정을 믿고?

야 아무리 그래도 로판 남주가 그러는 법이 어딨어...! 나 탱커 싫어!

그 와중에 현관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정원사가 찢어진 동공만큼이나 입이 찢어지도록 크게 웃는다. 양어머니의 웃음소리가 겹쳐서 마치 저 정원사가 웃는 것 같다. 으히익.

“망령...!”

뒤에서 해서 화이트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슬슬 헷갈린다. 정원사 실은 이미 죽은 드래곤이 자기가 잠들어있다고 착각하는 중인 망령인 거 아니냐? 혼란하다 혼란해...!

그 순간, 석양이 광선처럼 저택 안으로 들이닥쳤다. 눈이 멀 것 같은 뻘건 가닥들이 레이저 불빛마냥 현관을 가른다.

“로제...!”

“워억,”

무어 경이 다급히 뭔가를 시도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먼저 현관이 조각났다.

“미친......”

아니, 말 그대로 조각이 나버렸다니까. 부서진 게 아니라, 무슨 3차원으로 이뤄진 거울 깨진 것처럼 공간이 조각났다. 이런 건 SF 영화에서 CG로만 봤는데! 나는 미러 디멘션을 만드는 모 히어로 영화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일단...... 다른 사람들을 찾아봐야하나. 막 왜곡되고 쪼개져서 보이는 탓에 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약간 시야를 낮추고 사람 신체 부위처럼 보이는 걸 좀 찾아보면... 어, 저거?

“제릴!”

“......!”

다행히 가까운 곳에서 한 사람은 찾았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던 제릴은 날 보더니, 얼른 날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게 했다. 몸을 숨기자는 건가? 내 생각에는 지금 파티원 모으는 게 더 시급할 것 같은데......

아무튼 이렇게까지 철썩 달라붙으니, 이 의붓오빠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 확연히 느껴졌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찰나. 갑자기 한쪽에서 공간이 박살나면서 생긴 선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또 뭐야. 또.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뻔한 악당 클리셰처럼 정원사가 거기서 톡 튀어나온다. 아 시벌 사실 이 단검에 무슨 드래곤의 숨결이라도 불어넣어서 기운을 추적하고 있는 거 아닐까? 하필 찾아도 어떻게 딱 여길 먼저 찾았어.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대사만 들어서는 청혼승낙 받은 풋풋한 연하남 같지만 손에 든 걸 보아하니 그저 사이코패스일 뿐이다. 지난번처럼 송곳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다. 일단 원거리 무기, 원거리 무기를 다시 장착하자......! 나는 총을 품에서 꺼내들어 정원사를 겨냥했다.

소년 정원사가 미소 짓는다. 세 눈깔이 다 사이좋게 호선을 그리는 게 어흑 진짜 솔직히 좀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번에는 소용없어요.”

맞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 나는 일단 방아쇠를 당겨봤다. 그러나 총알은 마치 왜곡되기라도 하듯이 엉뚱한 곳에 가서 꽂힐 뿐이었다. 저 놈, 내 사격을 두려워해서 공간을 이 꼴로 만들어둔 게 틀림없었다.

어흐흑 이제 뭐 다른 방법 없나. 이 단검이라도 저 멀리 던지고 제릴 챙겨서 뛰는 것 밖에 없어? 아니 쟤는 왜 같은 방법이 두 번은 안 먹히는 악당 클리셰까지 가지고 있어서....

잠깐, 악당 클리셰?

갑자기 번개같이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니가 진정한 흑막이라면, 이 클리셰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악당의 설명충 속성을 자극하기로 결심했다. 자고로 장르소설 악역이라면 자기 행동의 목적을 물어보는 이 트랩을 비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성공했다.

“아하,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정원사가 히죽 웃었다. 저거 금방이라도 자신의 과거사와 실패, 원대한 야망과 계획을 줄줄 토로할 것 같은 서론이다.

“어느 날, 작은 버러지가 대단한 선조를 가진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났어요.”

“......”

“사생아는 모두 가축이기 때문에, 그 버러지도 이름 없이 사육됐구요.”

왜 갑자기 짠내 나는 피폐물 서사 TMI로 이야기가 가는지 알 수 없다. 그거 네 얘기는 맞냐? 사생아 이야기 하니까 같은 과거사를 가진 것 같은 어떤 인물이 떠오르는 데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추잡하고 수치스럽게 목숨을 연명하던 어느 날에, 갑자기 버러지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어요. 선조의 위대한 유물을 손에 넣게 되었거든요!”

그래 무슨 이야기인들 어때. 일단 시간이라도 끌 수 있으면 됐다. 어쨌든 정원사는 말하는 게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은 계속 떠들겠지 뭐.

“사생아는 필사적으로 그 유물의 힘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더니, 결국 그 힘으로 가문을 완전히 멸절해버렸어요. 하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 사생아는, 결국 가문의 후계자의 거죽을 뒤집어썼죠!”

“그리고 어느 장미가 만발한 대저택에 살고 있던 아가씨의 약혼자 행세를 시작했습니다.”

혹시 했는데 진짜 무어 경 저격한 이야기였냐...... 나는 그저 짜게 식고 말았다.

장미 망가뜨리고 공구 뺏은 게 어지간히 원한이 쌓였었나보다. 이렇게 남의 과거사를 막 캐내서 폭로하고 말이야.

별개로 저게 사실이면 진짜 짠내나는 로판 남주 과거사답긴 하다. 못된 사람들에게 고통 받으며 살다가 어마어마한 힘을 각성하는 이야기 많이 봤었지. 아까 막 마법 같은 힘을 썼던 것도 이해되네.

그리고 정원사는 아직도 계속 나불거리고 있다. 이쯤 되면 얘 투머치 토커 아닌가 싶다.

“근데 왜 그 사생아는, 아가씨의 약혼자가 되려고 했을까요?”

이번에는 날 디스하는 건가. 무심코 예상했지만 의외로 다음 말은 다른 맥락으로 흘러갔다.

“데릴사위로 결혼한 사이나 오라버니 행세를 하는 게 훨씬 가까운 관계잖아요. 그 편이 저택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편하지 않았을까요?”

“......”

“그건 본인이 오베르가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

설마 사생아라는 출신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졸부 석유왕 가문에 들어오기 싫었나.

“오베르는 전부 절명할 예정이거든요.”

“......불치병이라도 집안 내력으로 내려오는 겨, 웁.”

“하하,”

정원사의 날카로운 깔깔거림이 공간을 타고 울렸다. 나는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은 제릴에게 동공으로 이게 아니라는 사인을 열심히 보냈다.

어떻게든 입을 털어서 화제를 계속 이어야 돼! 저 놈이 지 계획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게 만들어야한다고!! 날 막지마라, 어차피 이래도 끕살 저래도 끕살이라면 어그로라도 끌어봐야지!

“아뇨. 감히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기 때문이에요. 오베르 가문의 선조는 위대한 옛 영주의 뜻을 거스르고, 그 추종자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줬거든요.”

...옛 영주요? 그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 그 계몽서적! 나는 로판의 꿈과 희망을 짜게 식게 만들었던 그 책을 떠올리며 경악했다. 이게 이렇게 연결되다니!

와, 빙의 초반에 읽은 그 계몽서적 떡밥이 갑자기 회수되고 있어! 무어 가문의 악랄함 어쩌구는 남주가 고통받았다는 걸 암시했던 거였구나!

...그리고 아마 이 몸의 가문이 옛 영주들을 깠던 그 불온서적을 적었나보다, 젠장!

혹시 옛 영주가 드래곤이 폴리모프했던 거였나? 지금 자기가 좀 욕 먹었다고 이렇게 화내는 거냐고요.

어느새 웃음을 그친 정원사가 조곤조곤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끝없는 공포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됐어요.”

“......”

“오베르 아가씨도 곧 그렇게 될 거에요.”

아니 시벌 얼굴도 모르는 이 몸 선조가 책 한 권 썼다고(추측) 후손이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게 제일 믿기지 않는 일이야...... 미친 거 아니냐.

하지만 끓어오르는 억울함보다도 할 말 다 했다는 태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정원사가 당연히 더 신경 쓰인다. 이거 진짜 엄청 큰 부상이나 혼수상태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슬쩍 제릴의 옆구리를 밀었다. 일단 저게 나한테만 말 걸고 있으니 너라도 슬그머니 빠져나가보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제릴은 오히려 이쪽에 더 가까이 붙어왔다. 마음 뭉클하고 고마운 일이었지만 환장할 노릇이었다.

휴. 지금이라도 단검을 던져서 이걸 쫒아가게 유인해볼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봐야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에 든 검을 뒤로 던졌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우리의 등 뒤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세로 검은 안개가 뻗어나와 정원사를 잡아챘다.

“......!”

“이..., 이 버러지가아악!!!”

정원사는 저항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 농도 짙은 검은 안개는 마치 삼킬 듯이 정원사를 머리부터 감싸더니,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이윽고 외마디 비명만 남긴 채 안개와 정원사는 왜곡된 공간 틈으로 사라졌다. 연기 한 점 남기지 않은 깔끔한 퇴장이었다.

“......와.”

살았다!

나는 안심한 동시에 반성했다. 무어 경의 큰 그림이 이거였나 보다. 다시는 로판 남주의 순정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근데 이거 괜찮을까? 사라진 자리에 지난번처럼 검은 물이 남은 것도 아니고, 마치 공간의 균열 틈 사이로 빨려들 듯이 사라진 게 마음에 좀 걸린다.

혹시 무어 경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자기 있는 쪽으로 끌고 간 건 아니겠지?

그때, 옆에서 제릴이 창백한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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