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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군.”
탐정노릇을 하던 금발의 호청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제때 이 섬뜩한 장미 저택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구출해주기는커녕 같이 갇히게 생겼다.
그와 그의 쌍둥이 누이도 괴이한 현상과 함께 실종된 사람들을 추적해오기는 했지만, 이런 수준의 기괴한 상황은 예상도 못 했었다. 기껏해야 정신 나간 사이비종교의 연쇄살인 정도일 줄 알았지.
그는 어지럽게 깨진 공간을 착잡한 시선을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윽.”
아까 촉수를 날름거리던 괴생명체가 사라지고 남긴 검붉은 체액에서는 거북한 음식물 쓰레기 같은 쉰내와 함께 묘한 비린내까지 났다.
피냄새는 오히려 확실히 아니었다. 이건 생물한테서 나는 비린내라기보다는... 그래, 공업용 기름의 찌든 내가 났다. 로만 타운에서 심상치 않게 맡을 수 있는 냄새다.
“석유?”
“...당연히... 당연히 석유지, 그렇지 그게...”
그 혼잣말은 의외의 인물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냈다. 공간이 깨진 직후 발견했던 로제의 양어머니였다.
‘방금까지는 웬 헛소리만 주절거리더니.’
이 저택에 잠입해 일한 적이 있는 그의 쌍둥이가 아무리 회유하고 협박해도 실실 웃고 울고 기괴한 단어만 줄줄 뱉던 인간이 갑자기 반응한 것이다.
이건 뭔가 중요한 단서다. 본능적인 감으로 느낌을 잡아챈 남자는 언변을 발휘하고자 마음먹었다.
“마담, 석유 냄새가 왜 당연합니까?”
“......”
“마담? 이봐요!”
그러나 시도하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금세 다시 반응이 없어진 것이다.
‘난감하군.’
남자는 누이와 힐끗 눈을 마주쳤다. 해서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치켜들더니, 곧 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괜찮겠어?”
“확신은 못해.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니까 어쩔 수 없지.”
해서의 얼굴에는 약간의 걱정이 서려있었다. 아마 변변찮은 무력이 없는데다가 그 괴물의 집요한 집착을 받는 것 같은 그 아가씨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로제 오베르. 쾌활하고 매력적인 아가씨.
남자는 이 급박한 와중에도 휘파람을 빼고 싶은 충동이 든다는 게 기가 막혔다. 하여간 어릴 때부터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다는 말이지. 이번에도야? 어지간해야지 원. 쌍둥이끼리의 묘한 공감과 경쟁심을 부추기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며 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일단 해보자고.”
해서는 고개를 까닥거리고 꺼낸 물건을 로제의 양어머니 손에 쥐어줬다. 그건 타오르는 불꽃 일곱 가닥을 투박하게 조각해놓은 묘한 나무토막이었다. 해서가 이상 현상을 추적하며 우연히 입수한 실종자의 유실물이었다.
‘저걸 살에 대고 있으면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이상하게도.’
아마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암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것 덕분인 것 같다고 해서는 추측하고 있었다. 그의 잔머리 좋은 남동생도 상황설명 이후에는 그 말에 동의했으니 아마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쌍둥이의 기대처럼, 마담 자우어는 순간 자신을 인지했다. 자칭 탐정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걸 알아차렸다. 그 여자의 눈에는 한 때 너무나 익숙했을 유려한 총기가 깜빡이고 있었다.
“이봐요.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이미 다 끝났는데... 어차피 다 끝난 일에는, 어떤 시도도 무의미할 뿐......”
“어차피 다 끝장이라면 시도해서 손해 볼 것도 없잖습니까? 뭐든 해볼 테니 아는 대로 뭐든 말해 봐요.”
“......”
“왜 이 촉수괴물의 흔적에서 석유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합니까? 석유가 주식이라도 됩니까? 혹시 눈 하나 더 달린 그 괴물도 그래요?”
“......”
마담 자우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축 늘어진 채 움직일 기미도 없어보였다. 완전한 체념의 표현.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무 것도 모르는 구나.”
“그럼 당신이 좀 알려줘 보십시오. 나도 좀 아는 상태가 되고 싶군요.”
남자는 틈도 주지 않고 대답을 이어 붙였다. 마담 자우어는 허공을 쳐다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 괴물도... 한 때는 인간이었지. 단지 같은 인간을 제물로 삼아 남은 부산물을 핥아먹으며 저렇게 강대해진 것에 불과해. 그 놈도 결국 주인을 섬기는 노예일 뿐이야.”
남자는 경악했다.
“저것보다 더한 괴물이 또 여기 있다는 말입니까?”
마담 자우어가 눈을 돌려 물끄러미 쌍둥이를 바라보았다.
“아니지. 괴물이 있는 게 아니지.”
“그럼?”
“우리가 미물이었던 거야.”
귀찮으면 손가락으로 눌러죽이고, 가끔 저열한 흥미로 과자부스러기를 던져줄 수도 있는 그런 미물. 뭣도 모르고 쥐약 섞은 부스러기를 허겁지겁 삼킨 채 경련하는 꼴을 보며 낄낄댈 수도 있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그리고 그 미물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마담 자우어는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석유 때문에 이 땅에 돌아온 사람들은 석유가 매장된 곳에 유적이 함께 묻혀있다는 것을 이미 사전조사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조치 없이 석유시추를 진행해버렸다.
그깟 유적, 박살나든 말든 석유에 비할 바가 못 되지 않은가 생각했겠지.
그날 그들은 그 거대한 진동이 무엇을 깨웠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하고 끔찍한 이 지역의 옛 영주. 그를 부르는 유물을 깨웠다는 것을.
“그러니까, 뭘 하든 소용이 없어. 이미 모든 게 늦었어.”
옛 영주는 결국 강림할 것이다. 그래서 이 저택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이 대륙에 곧 생지옥이 도래하겠지.
굳이 덧붙이지 않은 여자의 상념을 알 리가 없는 남자는 그저 좀 더 이야기를 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늦었다’는 표현은 어떤 계책이 시간이 지나며 쓸모없어졌다는 말로 들립니다. 막을 방법이 있었던 겁니까?”
“한 때는 있다고 생각했지. 이 저택 지하에 있는 어떤 유물을 도로 잠재우면 막을 수 있었으니까.”
마담 자우어는 지난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과 자신의 아이에게 자유를 주고자 저질렀던 모든 일들.
그의 아이, 제릴은 태에서부터 사악한 속삭임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아주 위험하도록 고대의 정신에게 ‘열린’ 상태였다. 그 정신구속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고자 지역을 옮기고 성을 바꾸고, 상징적으로 성별까지도 위장했다.
악운이었는지 오베르의 마지막 후손이 여자아이였기에 더 효과가 있었다. 그 후손을 향한 집념과 저주의 초점에 제릴의 존재감이 흐려져서, 아이는 완전히 속삭임에 지배당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한 정신으로 성인을 맞았다.
그 아이와 달리 자신은 이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완전히 홀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속죄를 생각했던 건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편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그는 이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나면 이 지하에 있는 유물을 다시 황금 함을 닫아 잠재울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이제는 인간 같은 미물의 힘으로는 절대 그걸 잠재울 수 없어.”
쌍둥이가 듣기에, 마담 자우어의 발언은 굉장히 추상적이며 미신적이었다. 그러나 별 이상한 용의자들과 증인들을 다 겪어온 둘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튼 지하에 뭐가 있군.
그리고 해서는 인류역사상 가장 효율적이었던 방법을 거론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파괴하는 건 어떻습니까?”
“파괴?”
마담 자우어는 힘없이 웃었다.
“그걸 파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주문과 유물이 또 필요할 텐데.”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 유물을 보는 순간 아무도 지원하지 못할 것이다. 보는 순간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수려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자신 몸과 마음에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을.
“파괴하려는 시도만으로도 스스로가 파괴될 걸?”
본인뿐만 아니라, 그 모든 후손이 영원토록 받을 흉악하고 파멸적인 저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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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하트가 단검과 부딪히며 빛이 번뜩였다. 눈으로 보이는 흠집은 없었지만, 어쩐지 안에 가득 찼던 붉은 섬광들이 좀 비틀어진 것 같다.
좋았어, 이건 공격이 먹히는 신호다!
다른 결정적인 신호가 더 있기도 했다. 옆에서 선셋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고함을 쳤기 때문이다. 뭐가 지한테 불리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야, 근데 그만해! 제릴 목 다 상하겠다!
“안 돼애애!!”
“돼!!”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다시 단검을 내리쳤다. 이번에도 빛이 터져 나왔다. 붉은 섬광들이 더 우그러졌다.
이대로 한 서너 번만 더 찍으면 될 것 같다! 무어 경만 저걸 잘 붙잡고 있어주면 될 듯!
하지만 문제는 그 무어 경 본인도 약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
“로제?! 당장 그만두십시오, 얼른!! 그건 당신이 할 게......”
퍽. 나는 단검으로 다시 한 번 수정을 때렸다. 미안한데 우리 누가 이걸 할지 토의할 시간이 없다. 안 그래도 선셋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 같은데 얼른 이걸 끝장내야 돼!
솔직히 이쯤 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무어 경의 목소리는 더 격하고 애원조가 되어갔다.
“로, 로제! 하지 마십시오, 하지마세요...!!”
텅, 한 번 더 맞자 드디어 수정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선셋의 발광이 더 심해졌다. 제릴 뼈라도 부러지는 거 아닐지 걱정된다.
그리고 무어 경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 테니까 그만 두세요, 그만 두라고...!”
아니 지금 댁이 선셋을 잡고 있는데 무슨 수로 이걸 부숴요. 우리 역할 분담 확실하게 되어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것까지 예상하고 큰 그림 그려서 이 단검 준 거 아닌가? 솔직히 약간 감탄하고 있었는데!
슬슬 손이 너무 아파서 힘을 주기 힘들다. 약간 손목을 푸는 동안 무어 경을 진정시켜봐야겠다. 지금 피 토하고 난리라 아까 그린 빅픽쳐가 생각이 안 나나봐!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꾸했다.
“이걸 예상하고 이 검 준 거 아니에요?”
순간 바닥을 긁던 무어 경의 손이 멈췄다.
“아,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아니야...... 나, 나는 그냥,”
그냥 호신용이었다면 그것도 또 나름 매력이 있군. 역시 꼭 이걸 부수고 사태를 진정시켜서 저 미인을 끼고 석유왕으로 살 테다...! 나는 또 각오를 다지며 다시 단검을 들어서 수정을 찍었다.
제발 이게 막타여라, 진짜 손이 너무 아파!
하지만 거짓말처럼 드래곤 하트 대신 단검이 부러졌다. 깔끔한 두 동강이었다.
“......”
그러고 보니 처음 받았을 때도 금이 가있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타이밍에 부서지는 거 실화냐구요. 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기가 박살이라니!!
뒤에서 선셋이 웃는 소리가 요란하다. 엄청 기분 좋은가보다.
“꼴, 좋구나!!”
아니다 이 악마야.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뭐 더 생각할 것도 없어. 나는 이미 반 이상 부러진 단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뒤에서 선셋이 조롱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건, 이제 제사단검이 아니야!! 그냥 폐기처분할 칼자루라고! 어디 찔러봐요, 찔러봐!! 얼른!! 하, 하하!!”
오냐, 찍어주마!!
나는 기말 마지막 과목 시험을 보던 순간의 힘까지 짜내어 수정에 내리쳤다.
픽,
그리고 작은 소음과 함께,
파아아아아.....
수정이 박살난다.
주변이 온통 붉은 섬광으로 가득 찼다.
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제릴에게 붙어있던 세 번째 눈이 녹아내린다. 제릴의 몸은 멀쩡해 보인다. 다행이야.
어쩐지 세상이 좀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다. 무어 경이 뭐라고 외치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얼굴이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그래도 참 예쁜 얼굴이네. 안타까우면서도 감탄하게 된다.
시야가 더더욱 붉게 물들었다. 이제는 아무 것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냥 눈을 감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그리고 눈을 정말로 감기도 전에, 마치 그런 것처럼 온통 주변이 캄캄해졌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이었다.
뭐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흐으음.”
저음의 목소리가 들린다싶더니, 갑자기 정면에 키 큰 남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새카만 공간에서 불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