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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떻게 할까.”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다지 심각한 말투는 아니었다.
농구선수라고 해도 믿을 법한 큰 키와 마른 체구를 가진 그 남자는 흰 가운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반짝거리는 금발이 가운 밖으로 빠져나와있었다. 저 위에 달린 머리를 살짝 숙여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
잠깐, 상황을 못 따라가겠다.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드래곤 하트를 파괴하니 무슨 핵폭발이라도 난 것처럼 주변이 새빨간 빛으로 가득 차고 다시 시꺼매 지고 불쑥 웬 남자가 나타났다?
솔직히 예상되는 정체는 하나뿐이다. 저 고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시절에나 입었을 법한 옷하며 범상치 않은 등장하며, 흐름상 내가 박살낸 드래곤 하트 주인 아냐 이거?
“어... 혹시 이 저택 밑에 있는 그 거대한 존재... 어, 옛 영주세요?”
드래곤이라는 단어, 실제로 남한테 육성으로 말하려니까 좀 부끄럽구나. 최대한 돌려 지칭해서 말하자 남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네 두뇌의 기능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이겠지만, 맞아.”
와 말투 봐라. 진짜 드래곤 같아. 나는 본인의 긍정보다도 저 묘하게 지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사람 무시하는 말투에서 드래곤임을 확신했다.
크으, 근데 그럼 내 초기 예상은 틀렸구만. 은발이 아니네. 이러면 탐정이랑 속성이 겹쳐서 아무래도 서브남은 아닐 것 같지? 드래곤... 골드 드래곤인가?
그리고 드래곤 하트 박살내고 긴장이 풀렸는지 실수로 말이 필터를 안 거치고 나왔다. 아앗, 아아....
“금발이네요. 아쉽다.”
“내가?”
“......예? 아뇨. 그게, 혼자 맘대로 은발일 거라고 생각했어서요.”
망했다. 첫 만남부터 육성으로 외모 품평한 것처럼 됐어. 으아아악 현대인의 예의범절이 내 양심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나는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그, 그냥 추측이 틀렸다는 뜻이죠! 머리색이 뭐 그렇게 중요...!”
“흐으음,”
예고도 없이 남자의 모습이 불쑥 바뀌었다. 무슨 변신과정도 없이 그냥 훅.
순간 스멀거리는 안개로 변하더니, 깨닫자마자 검은 사자로 변했다. 눈을 깜박거리자 거대한 뿔이 머리에 삐죽 달린 청렴해 보이는 우아한 청년의 외관을 지나 슬슬 익숙해지는 말미잘의 모습도 휙 보였다가 갑자기 박쥐날개 달린 붉은 눈의 이족보행 염소가 됐다.
그리고 어느새 남자는 완벽한 쓰리피스 검은 정장차림이었다. 구김하나 없는 정장이 매끄럽게 마른 몸을 감싸고 있다.
푸르스름하도록 창백한 검은 피부와 대조되는 짧은 은발이 방금 다듬고 약을 발라넘긴 것처럼 완벽하게 손질되어있었다. 그 아래로 회색 눈이 아주 요사스럽게 한번 번들거린다. 선셋의 세 번째 눈처럼 동공이 쭉 짖어진 파충류의 눈이다.
마지막으로 손에 들린 신사모를 장난처럼 머리에 툭 눌러쓴 남자가 피식 웃는다.
“그래. 요새 사람들이 이러고 다니지.”
미친 갑자기 지금까지 등장한 남주 후보들과 외모속성이 하나도 안 겹치는 미남으로 변했다. 이게 바로 드래곤 폴리모프인가...! 대체 순식간에 몇 가지 모습이 지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미친 전개와 방금 말미잘 모습까지 지나간 걸로 봐서는 이 드래곤이 최종보스 같기도 한데 설마 이걸 또 잡으라는 건 아니지요...? ‘큭큭큭... 선셋? 그 놈은 내 따가리일 뿐이다! 우리 중에 최약체였지!’ 같은 에스컬레이터식 흑막 클리셰 제발 아니어야 하는데!
나는 부조리의 끝을 달리는 파워밸런스에 침음성을 뱉을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행복회로, 집 나간 행복회로를 잡아오자. 좋은 점...... 그래, 미남은 진짜 엄청 미남이다. 완전히 퇴폐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오지게도 잘생겼군.
하지만 역시 무어 경이 최고야. 언제나 짜릿해. 개인취향의 손이 무어 경을 번쩍 들어 둥기둥기 한다.
그리고 의지가 차올랐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돼...! ......잠깐, 썸 타는 상대 생각하면서 전투 직전에 다짐하는 건 데드플래그였나?
“좋아. 이렇게 할까.”
뇌 내 의식의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든 눈앞의 드래곤은 자기 맘대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입 꼬리를 쭉 찢어 올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주지. 어때?”
“예?”
이 드래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짓 하려고 한다!! 설마 정말 모든 갈등을 이걸로 풀려고 했던 거냐 작가!
“갑자기 낯설고 불친절한 상황 속에서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이제 마음 편히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예?”
로판 간접 경험으로 하나도 안 낯설었는데요. 그리고 눈 뜨자마자 극도로 친절한 일하는 분들한테 서비스 받으면서 지냈는데요.
게다가 석유왕을 버리고 맘 편히 원룸촌 고 학번 학자금 빚쟁이로 돌아가라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 혹시 협박이야?
“그런데 그냥 돌아가라는 건 참 재미없고 야박한 짓이야, 안 그래? 여기서 고생했으니 상을 주마. 그래...... 내 얼굴 중 하나를 빌려주는 건 어떨까?”
“...얼굴이요?”
“그래. 얼굴.”
남자의 미소가 더 째졌다.
“네가 원하는 하나의 모습으로 둔갑할 수 있는 권능이지. 어때,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절세미인으로 변해서 모든 사람을 욕망의 노예로 만드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지 않을까?”
“아니면 외경심에 무릎 꿇게 만들 권위적인 모습도 좋겠어. 영문도 모르고 중압감에 질린 사람들의 머리를 깔개로 쓰는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는 거야.”
남자가 마치 악수를 청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섬세하고 긴 손가락과 연결된 손바닥 위에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반짝 거렸다.
“그 외에도 참 많은 재미난 일을 할 수 있겠구나. 몹시 기대되지 않니?”
나는 기겁했다.
“전혀요?”
“뭐?”
남자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나는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됐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고 싶지 않네요.”
“......”
드래곤 어르신, 전 그냥 여기서 이미 공략한 절세미남과 석유자본을 끼고 탱자탱자 인생을 낭비하고 싶습니다...!
“...원래 세계에서 맺은 인연이 신경 쓰이지 않나? 생각해보렴. 네 부모가 애타게 널 찾고 있을 거야.”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불운한 사고나 이런 거 아니다. 그냥 워커홀릭 독신으로 살던 두 분이 중년이 다되어서 여행지에서 불타는 만남 끝에 늦둥이로 날 낳으셨던 것뿐이다. 지금도 부모님을 떠올리면 가끔 굉장히 슬프지만 그래도 좋았던 추억이 훨씬 많아서 괜찮다. 힘내자 나야!
“친구들은?”
“다들 제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괜찮아요.”
같은 선택뿐이겠어. 아마 지금도 사실을 알면 겁나게 부러워하고 있을 거라는데 내 원룸을 걸겠다. 지금도 자격증 따느라 정신없을 그 친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텔레파시로 보내고 싶군.
아무튼 종합적으로 내 의사는 몹시 확고했다. 아마 충분히 표정으로도 드러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근한 표정으로 꾀어내려고 애쓰던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드렁해졌다.
“...이 생태계 교란종 같으니라고.”
갑작스럽게 나온 비난 발언이 맥락이 없어서 당황스러운데요.
“왜요?”
“자, 날 보면 무슨 생각이 들지?”
남자가 고개를 숙여 나를 들여다보았다. 날선 동공과 요사스럽도록 잘생긴 얼굴이 날 마주본다. 헉.
“......잘 생겼다?”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안광 깊은 퇴폐섹시 배우 같다?
드래곤은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에 손을 올렸다. 어쩐지 짜증을 참는 것 같다.
“거봐. 네 정신은 아직도 우리를 이야기로 소비하는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고 있지. 이야기 속 괴물에 감당할 수 없는 공포나 매혹을 느낄 수는 없으니 어떤 정신적인 타격도 받지를 않는구나.”
“오......”
그러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방금 미친 듯이 폴리모프를 반복한 드래곤 앞에 서있는데도 특별히 위압감이 느껴지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그 징그러운 말미잘들 만났을 때도 비위만 상했지 그렇게 죽을 만큼 무섭지는 않았지. 이제와 굳이 따져보니 공포영화 보는 수준정도였던 것 같다.
이게 다 장르문학을 대량 소비하는 문명에서 살아서 받은 특전이라는 말인가!
K-장르문학 만세!! 절 살려주셨습니다!
내 감동과는 별개로 드래곤은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다.
“정신에 한해서는 이것도 면역, 저것도 면역. 주문도 되는 게 없군. 게다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내 유물까지 부숴버리다니, 무슨 운이지? 그게 얼마나 이 시나리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거였는지 알기나 하나?”
“그... 수정이요?”
드래곤 하트 말이겠지? 아니 안 부쉈으면 내가 죽을 판이었는데요? 그런 걸 못된 놈한테 맡겨두니까 정의구현 당하는 거잖아! 난 당당하다!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게 제대로 깨어났으면 아주 재밌는 일이...... 뭐, 됐다. 흥이 식었군.”
드래곤이 내밀고 있던 손을 거둬들였다. 어느새 손바닥의 문양도 사라져있다. 남자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정장을 툭툭 털었다.
“문제는 네 그 특성이 주변까지 오염시키고 있다는 점이지. 선사시대 전부터 꾸준히 뇌 속에 박아둔 조건반사가 흐려지고 있어. 정말 재미없어지겠는데.”
“......?”
설마 사람들 머릿속에 위대한 드래곤님에 대한 존재감 어필을 선사시대 때부터 했다는 말인가...? 와 진짜 집요하고 찌질하게 느껴진다.
근데 내가 주변을 오염시킨다는 건 무슨 뜻이지. 표현은 거지같지만 아무튼 주변을 판타지 공포 면역으로 만들어주고 있다는 뜻인가. 인간 공포저항 토템?
“망친 판에 고장 날 장난감을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고. 슬슬 떠야겠군.”
드래곤은 모자를 고쳐 쓰며 툭 말을 던졌다.
“안녕. 앞으로도 영원히 이 동네에 붙어있어라. 다시는 볼 일 없길 바란다.”
와, 대박. 지금 K-보정 덕분에 말 몇 마디 주고받는 것으로 최종보스 티를 팍팍 내는 드래곤을 포기하게 만든 것 같은데?!
그리고 드래곤은 미련 없이 이 공간을 뜨려는 낌새다.
잠깐, 잠깐...! 뭔가 좀 걸리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맞다!! 이거다!
“아, 이 몸 원래 주인! 원래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저 드래곤, 날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준다고 했으니까 이것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혹시 하는 마음에 황급히 다다다 묻자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줬다.
“원래 몸 주인? 그런 건 없는데.”
네?
“아, 따지자면 난가. 이건 내가 장난치려고 만든 거거든.”
“이 몸을요?”
“포함해서 전부.”
흥미로운 계획이었는데. 라고 짧게 덧붙인 말이 들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그 새카만 공간과 남자는 갑작스럽게 나타났던 것처럼, 전등불에 어둠이 사라지듯 갑작스럽게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문득, 내가 바닥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바닥이 아닌가? 등 뒤로 묘한 체온이 느껴졌다.
“...로제?”
눈을 뜨자 눈물범벅인데도 믿을 수 없이 잘난 얼굴이 보였다. 무어 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