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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48화 (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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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단검으로 박살난 유물은 파편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남은 건 칼자루만 남은 단검과, 단검을 휘두르던 여자애의 힘없이 늘어진 몸뚱어리뿐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머리가 고장 난 것 같다. 계속 같은 문장만 대답도 없이 남자의 머릿속에 울렸다. 이 참을 수 없는 이상한 울렁거림.

루카스 무어의 모습을 한 남자는 비틀거리며 기어서 로제 오베르의 쓰러진 몸에 고개를 숙였다.

“...로제?”

“로제?”

잠든 것처럼 평화로운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진다.

아니, 자세히 보니 음영이 아니라 피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에 헐떡거리던 와중에, 남자는 간신히 그것이 자신에게서 떨어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손으로 그것을 닦아내려 애썼다. 떨리는 엄지손가락이 볼가를 스치고 붉은 궤적이 남는다. 볼이 아직 따듯했다. 남자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다가, 생각했다.

공양을 예정대로 진행하자.

그는 기존에 아주 명쾌한 공양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가 습득한 모든 신화적 지식을 동원해 구성했던 아주 거대한 의식이었다.

이 지역의 모든 인간을 한 번에 공양해버릴 의식.

이 지역의 각 방위에 유물과 주문을 짜 넣고 조건을 충족하여, 로만타운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제단처럼 기능하도록 이미 이 저택에 방문하기도 전에 예비해뒀었다.

그 번화가 중심부에 있는 자신의 비밀장소에서 공양을 진행하면, 한 순간 이 지역의 모든 인간이 그 거대한 간이제단을 통해 옛 영주에게 빨려 들어갈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이 망할 제물낙인을 지우고 남은 무어의 흔적을 전부 탈취하기 위해 마련한 방법이었다. 적당할 때에 무어가의 고대가주를 속이고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로제 오베르를 이 저택에서 빼돌리는 기간이 늘어지며 계획의 실행여부도 불투명해졌었다.

아니, 어쩌면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정상적인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는 이 여자애가, 이 계획을 알아차린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게 두려워서 계속 합리화하고, 미루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정말로 상관없었다.

남자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돌려달라고 해야지.”

아직 늦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시간이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그렇지? 그러면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번화가로 가서...... 제단에서 의식을 진행하면 된다. 그 정도의 공양이라면 이 작은 여자애 하나 정도는 충분히 돌려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로제 오베르는 생명력 넘치는 눈으로 이쪽을 보면서 터무니없지만 듣기 좋은 말들을 계속 떠들 수 있을 것이고, 남자는 그 여자애와 함께 이 저주받을 장소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더 부유하고 더 활기찬 도시로 가야지. 그곳에서도 로제 오베르가 사진을 찍고 진귀한 요리를 맛보며 원하는 만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남자가 수발을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 역겨운 일들은 다 지워버리면...

로제 오베르의 피 묻은 볼에 물기가 서렸다.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채 닦아내지 못한 핏기와 섞였다. 남자는 이번에도 자신에게서 떨어진 이물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그것을 닦아낼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처절한 압도감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로제가 이 꼴이 된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그 빌어먹을 단검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로제 오베르가 제 발로 따라와 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당장 이 저택에서 내보냈어야 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게 아니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위한 판단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왜 이 작은 여자애 하나를 위한 판단은 매번 실패했던 것일까?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로 된 성장과정을 거치지 못해서?

이해할 수 없는 선연한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다.

남자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할 수 없었다. 만약에 이 공양이 부족하다하더라도 그에게는 계속 시도할 기회가 꾸준히 남아있었다. 도시는 많았다.

그는 주문을 쓸 수 있었음에도 로제 오베르의 상체를 손으로 안아들었다. 온기가 타오르는 것처럼 뻐근한 몸을 적셨다. 식어서 뻣뻣해지기 전에 그는 모든 의식을 다 끝내고 말 것이다. 식어가는 과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렇게 스스로의 상상에 매몰되던 그때, 남자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품 안의 몸이 움직인 것 같다.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타고 흐르던 눈물이 다시금 평온한 얼굴 위로 떨어졌다. 툭.

그리고 놀랍게도 감은 눈이 움찔거렸다. 눈물 때문에 일어난 착시라면 영원히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하지만 착시가 아니었다.

“...로제?”

로제 오베르가 눈을 떴다. 그 눈에는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순간 소름끼치는 환희가 그의 전신에 격동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관없었다. 설령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참혹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괜찮을 것만 같았다.

로제 오베르가 손을 뻗어서 남자의 눈 밑에 흥건한 물기를 닦아냈다. 알 수 없는 전율이 손가락 끝이 닿은 볼에서부터 타고 내려왔다.

남자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이 날아간 정신으로 자신의 볼에 닿은 손가락에 얼굴을 눌렀다. 말도 안 되는 만족감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불길한 전율이 느껴졌다. 똑같이 남자의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말소의 감각. 얼굴을 덮고 있던 불유쾌한 껍질이 부서지는 아득한 감각.

그의 주문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직 분명 기한이 남아있었다...!

뇌를 채우던 쾌감이 거짓말처럼 공포가 다시금 몸의 주도권을 잡았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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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본 무어 경의 얼굴은 여전히 정말 대단했지만 눈물로 온통 다 젖은 건 안쓰러웠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닦아준 것뿐인데 무슨 병균 묻은 것 마냥 얼굴 가리고 물러났다.

“......”

조금 상처를 받았다...... 우리 최소 썸 아니었어?! 나 정신 잃어서 걱정하고 있던 거 아니었냐고요!

“보, 보지 마십, 마십시오!”

혹시 운 얼굴 보여준 게 좀 민망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기겁했는데? 나는 앉은 채로 후다닥 뒤로 물러난 무어 경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더 멀리 가서 움직이는 보람이 없었다...... 마, 말로 해볼까?

“어... 혹시 무슨 문제 생겼나요?”

“문제... 아뇨, 없습니다. 문제 같은 건 없어요...!”

완전 있는 것 같은데요. 대체 무슨 일이여. 동공지진하고 있으려니까 저쪽에서 먼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조,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아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건... 잠깐, 예. 부작용이 생겨서 그런 거니까,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헉, 혹시 내가 눈물자국 때문에 못 봐서 그렇지 얼굴에 상처라도 생겼나!! 아니면 말미잘 가닥이라도 붙은 걸까? 와, 하기야 저 얼굴로 살다보면 상처 났을 때 기겁할 수도 있지!

일단 진정시키자! 나는 혹시 드래곤에게 인증 받은 공포면역 토템으로써의 기능이 통할까 싶어서 몸을 날려서 무어 경을 잡았다. 약간 몸통박치기처럼 되긴 했지만 성공적이었다!

“......!”

얼굴을 가리고 있던 무어 경은 내가 이런 식으로 이동할 줄을 몰랐는지 얼결에 달아나지 못했다. 하지만 경악이 맞닿은 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음, 내 공포면역은 역시 판타지 요소 한정이란 말인가. 오히려 아까보다 더 공포에 질려서 못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나는 슬슬 과호흡이 걱정되기 시작해 무어 경의 등을 토닥거렸다.

하지만 이것도 역효과였나 보다. 얼굴을 가린 손 틈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어억, 어떡해!!

“지, 진정하고... 얼굴에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그래요?”

“......예.”

대답하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었다. 나는 동공지진하면서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을만한 말을 골랐다. 갑자기 심정이 무슨 나무 위에서 못 내려오는 새끼 고양이 달래는 것처럼 됐다.

“일단 손 좀 내려 보는 건 어떨까요? 아까 제가 봤을 때는 정말 아무 이상 없었어요. 별 거 아닐 수도 있어요. 한 번 확인해볼게요.”

“......괜찮, 괜찮습니다. 정말로...... 예. 잠시,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금방, 될 테니까......”

“...그렇게 보여주기 힘들어요?”

마음이 안 좋았다. 혹시 관련해서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는 걸까? 선셋에게 들었던 사생아가 어쩌구하는 파란만장한 과거사가 떠오르자 괜히 걱정된다. 아까 얼굴이 멀쩡했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거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 심적인 문제 같은데......

그때, 잔뜩 떨리는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싫어하실 테니까...”

“예?”

“이 외관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다시 복구해올 수 있어요...,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보지 마십시오.”

손 아래로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절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으아악, 이거 그냥 두면 왠지 공략 실패 뜨는 각이야!! 얼굴 직접 보고 괜찮다고 말해줘야 될 것 같은 이 느낌!! 후하후하. 나는 심호흡을 했다.

좋아, 갑자기 이 밑에서 말미잘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줄 준비가 됐다!

굳은 결심 끝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무어 경의 양 손을 내 양손으로 번쩍 잡아챘다! 의외로 힘없이 옆으로 치워진 손 아래로 놀란 눈의 무어 경이 보였다.

눈물이 더 번지고 눈가가 빨갛게 되긴 했지만 아무리 여기저기 봐도 다를 게 없다. 눈물 어린 눈이 우수에 차 보여서 오히려 더 잘생겼는데요...? 미모지수가 계측기를 뚫고 하늘로 폭발하고 있는데?!

나는 무어 경의 얼굴을 덥석 양손으로 잡았다.

“자, 잘 들어요!”

와 코앞에서 본인 두고 이런 이야기하려니까 갑자기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멋진 미래를 위해 나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눈코입 전부 예전이랑 똑같이 멀쩡합니다!”

“예...?”

무어 경이 넋 나간 표정을 짓는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해줘야겠다.

“아래속눈썹이 엄청 길고 아치형이라 무슨 꽃받침처럼 눈 테를 감싸고 있는데, 아몬드 형 눈가 가운데 있는 청보라색 눈이 여전히 똑같이 꽃처럼 예쁜 색이에요!”

이거... 항마력이 소모된다.

“그리고 코가 쭉 내려와서 되게 시원스러운데 너무 과하진 않아서 일부러 비율 맞춰 그려놓은 것처럼 보여요! 으음... 멍들거나 부푼 곳도 없이 여전히 깔끔하구요!”

이런 덕톡... 육성으로 해보는 건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다......

“터, 턱도... 예. 아주 선이 선명한데 막 둔탁하지 않게 날이 서있고... 귀밑 턱이 아주 우아하게 떨어져있어요. 평상시처럼 멋진 대칭이에요.”

점점 항마력이 바닥난다... 나도 거의 혼이 나가서 마무리를 했다.

“예...... 아무튼 멀쩡하고... 눈물만 좀 닦으면 아무 이상 없어요. 그리고 좀 이상 있어도 괜찮을 거구요. 네?”

“......”

무어 경이 넋 나간 듯 몽롱한 얼굴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썹이 찌푸려진 채로 눈가가 크게 휘어진다.

어느새 무어 경은 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한껏 웃고 있었다.

“예. 그래요.”

“네넵.”

좋았어. 성공적으로 트라우마를 제압한 것 같다. 훌륭하다 나 자신. 이제 완전히 로판 주인공으로 적응했구나. 나는 코를 쓱 문지르고 싶은 기분으로 뿌듯해했다.

무어 경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장갑 낀 손이 단번에 손을 잡아왔다. 무어 경의 손이다.

어어?

여전히 애달플 정도로 웃는 얼굴 그대로 깍지를 껴온다. 양손가락 사이로 가죽의 매끄러운 촉감이 옭아매듯이 꾹꾹 사이를 누르며 몸이 가까워져온다.

어... 그러고 보니 자세가 상당히... 진도 빼는 자세구나.

에라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고개를 들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꺼풀 위로 뜨겁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거의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중한 몸짓이었지만, 약간 집요할 만큼 오랫동안 촉감은 그 위에 머물러 있었다.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그리고 나는 약간 아쉬웠다. ...아직 입은 아니었단 말인가!

========== 작품 후기 ==========

48화만의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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