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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49화 (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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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릴 자우어는 긴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놀랍도록 정신이 맑았다.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지만, 아마 어떤 걱정도 없이 한 잠 푹 자고 일어난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사방이 고요하다. 사악한 속삭임도 들리지 않았고, 궤괴한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저택에서 벗어난 걸까?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이성으로 제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릴 본인의 침실이었다. 익숙하지만 스산했던 그 침실은 어느새 평범하고 친숙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제릴은 기분 좋게 생각했다. 로제에게 한 번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직후, 마지막으로 본 로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지하 제단.

“......!”

소스라치게 놀란 제릴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마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불타는 듯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 무색하게도, 전처럼 멀쩡한 살갗의 촉감이다. 손가락이 닿은 이마에서 축축한 식은땀이 느껴졌다.

갑자기 고요한 주변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착각일까? 어쩌면 그는 이미 끔찍하게 공양당해 옛 영주의 의식 속에서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지도...

“어억, 괜찮아?”

다행히 억측이었다. 반쯤 열린 문을 박차고 로제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손에는... 샌드위치?

뜬금없이 등장한 평범한 식사에 제릴은 당황했다. 심지어 빵 사이에 들어있는 햄도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다. 5년 만에 보는 멀쩡하고 정상적인 육류의 형태였다.

제릴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상하게 너무 평화롭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제릴은 얼결에 로제가 내미는 샌드위치를 받으면서도 할 말을 정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그러자 로제가 호쾌하게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 다 끝났어!”

“...뭐?”

“내가 그... 저택 밑에 거대한 존재를 쫒아냈다는 거지!”

그리고 엄지를 치켜든다.

제릴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건 또 무슨 정신나간 소리지?

“무, 무슨 수로?”

“나한테 아무 것도 안 통한대! 그래서 재미없어졌다고 떴어.”

제릴은 입을 쩍 벌렸다. 그가 살아왔던 현실을 아득히 초월하는 발언에 뇌가 처리를 거부했다.

그리고 직후, 더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로제?”

방 안에 들어온 로제의 뒤를 따라 훤칠한 키의 남성이 걸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로제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다.

로제는 별 동요도 없이 쾌활했다.

“아, 오빠가 금방 일어날 거라더니, 그 말이 맞았네요. 무어 경!”

무어 경?

제릴은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를 황급히 살폈지만, 아무리 봐도 그 자칭 약혼자 행세를 하던 남자가 아니었다.

그 남자와 체구가 비슷하고 이목구비가 유사해서 어쩌면 친척이나 형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던 뱀 같이 음흉한 윤곽과 눈초리 대신, 정갈한 선 사이로 화려한 눈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눈 색이 달랐다. 루카스 무어의 눈은 이 저택의 장미처럼 끈적이는 붉은 색이었지만, 이쪽은 푸른 보랏빛이 선명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루카스 무어보다도 섬뜩하도록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 느낌은 배가되었다.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제릴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에서, 처음 루카스 무어를 만났을 때 같은 강렬한 위협이 느껴졌다.

악의적인 시선. 같은 종이 아닌, 포식자와 마주친 느낌.

그리고 제릴은 깨달았다. 모습은 다르지만, 저건 루카스 무어가 맞았다.

대체 왜 외관을 바꾼 것일까? 그리고 왜 또 로제는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기이한 주문의 소행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아예 이 남자도 그 옛 영주와 한 패거리로, 더 큰 기만과 고통을 위해 마치 모든 상황이 끝난 것처럼 로제를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래도 제릴은 전처럼 비겁하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저건... 네 약혼자 행세를 하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야.”

로제가 단박에 태평스럽게 대꾸했다.

“그치?”

...그치? ‘그치’라니?

로제가 샌드위치를 한 입 뜯어먹었다.

“거, 이상한 주문에 걸려서 지금 엉뚱한 모습으로 보이나봐.”

“......”

“물론 난 안 통해서 원래 모습대로 보이고 있지.”

제릴은 좀 울고 싶어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믿어야할지 모르겠다.

“샌드위치 안 먹어? 어, 이거 맛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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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릴이 영 샌드위치를 못 먹는다. 아무래도 막 일어난 탓인 것 같다. 무작정 손에 쥔 걸 주는 게 아니라 속 편한 음식을 따로 가져왔어야 했나 보다.

“일단 있어봐. 다른 걸 좀 가져올게.”

“......”

대답이 없다. 하기야 웬 눈 세개 달린 악당한테 몸도 한 번 뺏겼었는데 피로와 충격이 클 것이다. 좀 더 쉬게 둬야지. 나는 양어머니와 관련된 복잡한 현 상황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나올 때까지도 제릴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아마 슬슬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날 따라서 같이 나온 무어 경은 그와 대조적으로 만개한 꽃처럼 웃고 있다. 내 항마력을 소모해서 달랜 보람이 있는 모습이다.

“로제, 마담 자우어의 아들도 깨어났으니 이만 처리...,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잡고 있던 손을 깍지로 바꾸며, 무어 경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두 시간 만에 손잡는 건 기본 스킨쉽이 됐구만. 나는 약간 멋쩍어졌지만 당당해지기로 했다. 앞으로 더 진도를 빠르고 격하게 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막 깨어났잖아요. 일단 식사도 좀 하고 기운 차리면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알겠습니다.”

무어 경이 좀 시무룩해졌다. 크, 귀엽다. 메인 남주 너무 잘 잡았어...! 내 주식 만세! 나는 진정을 위해 몇 번 내적 헛기침을 하면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에 도착하자 샌드위치를 씹고 있던 탐정과 해서가 보였다.

그리고 기둥에 결박된 양어머니도 보인다. 샌드위치를 권했지만 건들지도 않았는지 드린 그대로 접시가 바닥에 놓여있다.

“그 친구 깨어났습니까?”

“어, 네. 어떻게 알았어요?”

“저택이 조용해져서 그런지 여기까지 소리가 울리던데요.”

탐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이 정리되자마자 지하실에 뛰어내려온 두 사람은 이 정신없는 난장판을 수습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쌍둥이라고요?!”

“예. 참 안 닮았죠?”

탐정이 낄낄 웃었다. 해서는 영 탐탁치않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입만 산 촉새와 혈연이라는 게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오, 무작정 실종자 추적하다가 행방불명된 게 누구더라?”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불가항력이었지.”

나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닮은 구석이라고는 선이 강인하다는 것과 푸른 눈뿐이었다. 너무 성격이 달라서 짐작도 못했네. 게다가 묘하게 해서 화이트 쪽이 하녀일 때 내 또래라고 생각했던 바람에 괜히 나이차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 근데... 둘이 성이 다르잖아요?”

전직 하녀 해서 쪽은 화이트, 탐정 쪽은 테일러라고 했잖아.

“실은 내 쪽은 가명입니다.”

탐정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탐정도 급조한 신분이거든요.”

“예?”

뭐라구요?

“...이 지역에 탐정 일을 돕는 친구가 많다면서요?”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죠. 약간의 심리적 위장이랄까.”

빨리 나온 후식도 사실 그냥 뻥카였다고 고백한 탐정의 얼굴이 더 뺀질뺀질해 보인다.

“근데 비슷하긴 합니다. 형사였거든요. ...이 사건을 쫒다가 때려 쳐서 신입형사로 경력이 끝나긴 했지만요.”

“...둘 다요?”

“둘 다.”

둘은 사람들이 무작위로 실종되는 기묘한 사건을 쫒다가 이 저택에까지 흘러들어왔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어쩐지 자세히 설명하기를 꺼리는 기색이었다.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새파랗게 젊은 쌍둥이 형사라니, 너무 과하게 속성에 힘을 준 것 같습니다. 작가님...

어쨌든 사실을 밝히면서 둘의 발언에 권위가 생겼다. 그러면서 안 그래도 드래곤이 등장하는 이 판타지 요소 가득한 사건 경위를 경찰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는데, 그 고민을 이렇게 해결해줬던 것이다.

“공권력이 개입을 못한다, 그러면 개척시대처럼 알아서 권리를 지켜야겠지요.”

탐정의 말을 받아 해서가 차분히 말했다.

“직접적인 피해자인 아가씨께서는 마담 자우어에게 받고 싶은 보상이 있습니까?”

으음, 나는 양어머니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쪽은 겁에 질리지도, 그렇다고 위협하거나 애원하는 기색도 없이 나를 마주보았다. 담담히 내 말을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미 생각을 정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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