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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51화 (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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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차게 시작한 것 치고는 저택 정리를 그렇게 오래하지는 못했다. 온갖 사건들로 이미 시간이 한참 늦은 탓에 금방 자정이 된 것이다. 가뜩이나 오늘 격한 운동을 많이 했는데 먹은 건 샌드위치뿐인지라 몹시 피곤했다. 아마 다들 그랬겠지.

여기서 더 강행하면 바로 눈새가 되는 것이다...!

“일단 좀... 잘까요?”

모두가 동의했다. 음, 역시 좋은 판단이었군.

우리는 안 쓰던 벽난로에서 일단 오늘 치운 수상한 책들과 장식품 같은 것들을 다 태운 후에, 각자 침실을 골라 대충 자기로 했다. 양어머니는 해서가 가지고 있던 수갑으로 한쪽 팔을 묶어두었다. 도망치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나저나 이 정리 다 끝나면 양어머니한테 무슨 일을 할당하지?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그런지 특출난 아이디어는 안 떠오른다. 원래 고고학 전공이라는 말은 사실인 것 같긴 한데, 그럼 그 일을 그대로 하게 두고 돈만 차압해야하나...?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고민해보자. 그러려면 얼른 자야겠어. 크, 최종보스 쫒아내고 자는 잠이라니 엄청난 꿀잠일 것 같군. 룰루루.

“로제.”

어후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자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무어 경이 보였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나보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넵?”

“...이 저택은, 언제쯤 떠나고 싶으십니까?”

예?

“정리가 끝난 후에? 그렇다면 이렇게 일일이 수작업으로 정리하는 것보다 아예 저택 자체를 철거해버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 내일 바로 떠날 수 있을 겁니다.”

“......?”

아니 제가 방금 중간보스도 때려잡고 최종보스도 쫒아내고 전리품으로 얻은 여기를 왜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부터 모르겠는데요... 전 대충 여기서 수상쩍은 판타지의 흔적만 지운 뒤에 뽕 뽑을 때까지 살 예정입니다만...?

물론 일하는 분들을 새로 뽑아야겠지. 설마 일하는 분들이 다 말미잘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그동안 말미잘에게 서비스를 받았다니!

졸려서 생각이 산으로 가려고 한다. 얼른 답변하자.

“굳이 떠날 생각은 없어요!”

다 해결됐으니까 그냥 여기서 살죠 뭐.

그러자 무어 경이 아래를 보던 시선을 휙 든다. 눈이 마주치니 더 잘생김이 잘 보인다. 크으, 난 성공했어!

“그러면, 그렇다면... 이 저택에서 계속 생활하실 생각입니까? ...혼자?”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그렇죠? 뭐 원하면 의붓오빠도 지금처럼 살 수도 있구요.”

우리 같이 드래곤 레이드한 의리가 있는데 막 쫒아내고 그럴 수는 없지. 이 넓은 집에 공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그럼.

졸려서 거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가면서도 제대로 말해줬구만 무어 경은 대답이 없었다. 또 왜...?

그 때 순간적인 직감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이거!!

혹시 슬슬 정식 고백 각을 재고 있나...?

그렇지. 이제 갈등도 다 해소됐겠다, 남은 건 썸의 끝, 공인된 연애의 시작뿐이군. 드디어 로맨스의 비중이 늘어나겠어!

그래, 이거다. 내가 이 저택 나갈 생각이 없다니까 정해뒀던 고백 계획을 수정하고 있나보구만.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그러면 설마 이 반응에는 제릴이 이 집에서 계속 살 수도 있다는 대답에 질투심이 좀 든 것도 포함된 건가? 그래서 그게 고백을 앞당기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나? 크으, 심장이 폭행당하는 이 기분!!

좋아, 나도 예물을 사야지!! 예비 석유왕이 됐으니 아주 비싼 놈으로 지를 거야. 알 큰 반지, 반지를 사자...!

타이밍 봐서 내가 선수처서 먼저 하면 완전히 감동 받겠지?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장면이다.

앗, 근데 그렇게 되려면 먼저 거쳐야할 단계가 있다. 방금 생각났어.

으으음... 울고불고 난리 통에 까먹고 있었지만 이 얼굴천재는 거의 확실한 계략 남주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 간에 깊은 대화가 결말 전개의 필수 요소일 것이다! 후회할 거 있으면 하고 고해성사할 거 있으면 하고 사과 할 거 있으면 하고! 그러면 건전한 관계로 엔딩이 나겠지?

아니면 10할의 확률로 외전 나오면 갈등 터진다. 이 패턴 많이 봤어. 아주 익숙해.

좋아 계획은 다 세웠다. 내일부터 잠시 또 열심히 살아야겠군.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정말 꿀잠을 자야만 한다!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사실 너무 졸린데요.....”

“......예.”

무어 경이 어렵게 뒷말을 덧붙였다.

“.....푹 주무시길 바랍니다.”

“무어 경도요.”

헤어지기 싫은가보구나.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너무 진도가 빠르다. 고백 이후로 하자...... 나는 손을 한 번 흔들고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꾸물거리면서 침대 베개를 고치다가, 퍼뜩 고민했다.

설마 굿나잇 키스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나?

하지만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곧바로 잠들어서, 길게는 못했다. 굿모닝키스로 대체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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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음날 아침, 무어 경을 만나기도 전에 선객이 찾아왔다.

“들어가도 될까?”

“그래......”

제릴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노동에 동원되지 않아서 더 일찍 푹 잤나보다. 내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안색이 무척 괜찮다. 다행이네.

“상황은 대충 알아. ......고마워. 배려해줘서.”

“아니 뭐.”

노동에 동원하지 않아서 고맙다는 건지, 아니면 양어머니한테 내린 노동형이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음 대답에 후자라는 걸 알았다.

“나도 어머니랑 똑같이 급여의 절반을 꾸준히 보낼게.”

“...? 왜?”

왜 갑자기 연대책임을 지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 그래도 양어머니 봉급 압류기간을 깎아줄 생각 없어!

하지만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이 의붓오빠는 그냥 죄책감 수인이었던 것이다.

“아니야. 나도 사실...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어. 저택이 이상하다는 것도 알았어. 알았는데도... 5년 동안 그걸 방관하고 있던 거야. 무서워서.”

아니 무슨 살해공모도 아니고 좀 낌새 이상한 걸 눈치 챘는데 애가 무서워서 말 못했다는 걸로 이렇게까지...? 심지어 5년 전이면 완전히 애였을 텐데 21세기 현대사회 관점으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상황이잖아......?

“그리고 겨우 용기를 내서 시도한 일도 헛짓거리였지. 내가, 내가 하마터면 상황을 완전히 망쳐버릴 뻔했으니까...!”

제릴이 양 손이 희게 변하도록 꾹 쥐었다. 어억 왜 이렇게 극단적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좀 말려보자!

“아, 아니지.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됐잖아. 내가 활약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준 게 됐다니까?”

의도 좋고 결과 좋으면 된 거 아니냐...? 하지만 내 말에도 저 놈의 자괴감 필터는 끄덕도 없었다. 제릴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재주는 없지만, 입대라도 해서 꾸준히 송금할게. ......일 정리되는 대로, 저택은 곧 떠날 테니 걱정 마.”

나는 완전히 기겁했다.

아니 본인도 여기서 드래곤이 내는 온갖 층간소음에 시달렸으면서 왜 자꾸 피해자가 같은 피해자한테 보상을 해주려고 하냐고요.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래. 이렇게 진로를 결정해버리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텐데 난 그 원망 못 받아준다!!

그래서 필터 안 거치고 고대로 말해줬다.

“저기... 받을 유산을 생각해봤을 때 말이야. 군인월급은... 송금하든 안 하든 아무 영향도 없을 것 같아......”

“......!”

제릴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필요 없으니까 됐어. 그렇게 미안하면 차라리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말을 그대로 수행하는 걸로 하자!”

“...조, 좋아.”

제릴이 침을 꿀꺽 삼킨다. 얘는 대체 내가 뭘 시킬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오빠한테 모종의 후원금이 들어왔어!”

“...뭐?”

“이 후원금은 용도가 정해져있어. 무조건 학비로 써야 돼. 도박이나 음주로 탕진하면 아주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거야.”

의붓오빠는 완전히 넋 나간 표정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앞으로 아주 강도 높은 학업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일주일에 하루 반만 쉬는 강행군이지만 반드시 완수해야 돼! 알았지!?”

“아, 알았어.”

얼결에 대답을 들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후원금이 바로 마담 자우어의 봉급 절반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고 내가 투자 겸 드래곤 레이트에 참가한 동료에 대한 복지로 좀 더 끼워줄 예정이다. 취직까지 한국의 공부 스케줄 맛을 보여주마.

제릴은 ‘이건 아니지 않나...?’하는 표정으로 몇 번 다시 말을 정정하려고 시도했지만, 내 단호한 표정에 포기한 것 같았다. 대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결국 푹 숙였다.

“......고마워. 열심히 할 게.”

“그래!”

좋았어. 한 건 해결했군! 스스로에게 엄지를 치켜드는데, 또 제릴이 머뭇거린다. 이번에는 뭐냐.

“...그리고, 이건 돌려줄게. 내가 가질 자격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익숙한 권총을 쓱 내밀었다. 이거 내가 준 거잖아?

와, 지금 선물을 반품하는 거야...?

나는 굉장히 떨떠름해졌다. 내가 무슨 지금당장 쌍권총을 쏴야하는 상황도 아니고, 이거 좀 너무하는 거 아닌가...?

“이거 열심히 고른 건데...... 아니 준 사람한테 도로 돌려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제릴이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고맙게 받아라.”

“......”

제릴은 도로 총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나와 총을 번갈아보더니 슬쩍 총신을 쓸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총을 집어넣는다. 아니 왜 본인이 하고 본인이 자꾸 놀라는 거야.

“이걸로... 충분해.”

어쩐지 좀 후련해 보인다.

“......고마워.”

잠깐... 이거 왠지 묘하게 복선 같다.

설마 이걸 계기로 정말 입대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돌려주려던 무기가 본인에게 돌아온 서사가 생기고 어쩌구 하면서....

나는 조금 불안해졌지만 떨쳐내기로 했다. 설마 그러겠어?

========== 작품 후기 ==========

추가: 안 그럽니다. 걱정 마 로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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