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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52화 (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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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를 사러 짧게 외출한 것 외에는 휴식도 없이 지독한 시간 외 근무 끝에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저택 정리가 대충 끝났다.

나는 승리의 캠프파이어 같은 벽난로를 뒤에 두고 모두에게 선언했다.

“오늘 일당은 뭘 상상하시든 그 이상으로 두둑하게 드리겠습니다...!”

“좋죠!”

탐정, 아니 탐정인 척 하던 전직 형사가 환호와 함께 휘파람을 불었다. 물론 한 손에는 오늘의 야식인 사과맥주를 낀 상태였다. 아까 시내에서 식사거리를 살 때 같이 샀다는 모양이다.

온갖 드래곤풍 잡동사니를 다 태우는 통에 땔감이 많아서 그런지 벽난로가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그 따끈따끈함과 불빛으로 이 넓은 공간도 몹시 아늑했다.

물론 그냥 뜯고 있던 양 갈비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시 고기가 짱이야. 나는 제릴마저 열심히 고기를 뜯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해했다. 메뉴를 잘 골랐어!

그러고 보니 나도 뭘 좀 마셔야겠다.

“로제, 여기.”

“아, 고맙습니다.”

마침 무어 경이 사과맥주를 건네준다. 흔쾌히 받아들며 들이켜 봤다. 존맛.

“그러고 보니 이제 둘은 앞으로 뭘 할 건가요? 다시 형사로 복직할 생각이에요?”

“아쉽지만 여러 문제로 복직은 힘들 것 같습니다.”

해서가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말 놓자고 슬쩍 제안했지만, 이쪽이 더 편하다며 거절당한 탓에 여전히 정중한 말투다. 아무래도 친구가 되기에는 호감도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좀 아쉽지만 꾸준히 공략해보자.

“음, 그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어떤 건가요?”

“뭐, 탐정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는 것도 괜찮겠군요. 비슷한 직종이니.”

금발의 가짜 탐정이 피식피식 웃었다. 본명이 마이어 화이트였었지?

“마이어 씨, 그럼 금전문제가 없다면 하고 싶은 일도 있나요?”

금발 청년이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키며 대답했다.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죠. 이런 이상 현상들을 계속 조사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한 번 의식하고 찾다보니, 여기저기서 수상한 목격담이나 사건이 제법 있더군요.”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간간히 시도해볼 예정이긴 합니다.”

해서가 부연설명을 했다. 둘의 마음이 비슷한가보다.

그럼 더 볼 것도 없군...! 나는 호쾌하게 질렀다.

“제가 여러분을 그 직종으로 고용하겠습니다!”

“뭐라구요?”

“예?”

신뢰를 주기 위해 예전에 교양강의에서 봤던 미국 전직 대통령 연설 중 몸동작을 취해봤다.

“제가 경비를 대고 월급을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쌍둥이가 둘 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캬, 자본으로 하는 베풂의 맛!!

“진심입니까?”

“그럼요!”

주인공의 조력자 타이틀을 따신 포상으로 여러분에게 정년까지 고수익 정규직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위험수당까지 꼬박꼬박 챙겨드립니다!

아, 근데 위험수당 말이 나왔으니 이 얘기는 꼭 해놔야겠다.

“아, 근데 딱 봐도 위험해보이면 당장 저한테 연락하고 도망치세요.”

주인공 보정을 드래곤에게 인증 받은 제가 출장을 나가겠습니다...!

...이건 아닌가? 이건 술자리 끝나고 맑은 정신으로 다시 생각해보자. 에바인 것 같기도 하다.

“하하, 든든하군요. 감사합니다. 예비 고용주님.”

마이어가 씩 웃었다. 해서마저도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것 같다. 좋았어! 아무튼 뿌듯하군.

그런데 이 대화에 의외로 양어머니가 반응했다. 벽난로 옆에서 물끄러미 그 안을 들여다보던 중에 고개를 슬쩍 가로저은 것이다. 어, 혹시 불 때문에 잘 못 봤나?

“곧 죽겠군...”

“예? 뭐라고 했습니까?”

양어머니는 뭔가 중얼거렸지만 바로 옆 벽난로의 타닥거리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마이어가 되물었지만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혼잣말이었단다.”

“흐음.”

마이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들었지만 곧 그냥 어깨를 으쓱거렸다. 캐묻기 귀찮은 모양이었다. 그 맘 알지, 나도 그래. 근데 동의하면서도 괜히 한 번 무슨 말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되긴 한다.

으음... 어쩌면, 양어머니도 저 쌍둥이가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은 걸까? 그렇지, 고고학 전공을 살려서 일하기 좋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 이걸 수도 있겠다. 나는 이건에 대해 쌍둥이와 한번 긴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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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릴은 총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날렵한 검은 금속 밑에 단단한 목재를 대고 깔끔하게 마감한 그 무기는 이 빈약한 손에 들려있기에는 지나치게 유려하고 위협적인 것 같았다. 몇 년간 제대로 육류를 섭취하지 못한 자신의 몸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깡마른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몸으로 입대하겠다고 했으니 로제가 기겁할 만도 했다. 제릴은 쓰게 웃었다.

고대 지식과 사악한 의식에 관련된 거의 모든 물건들을 다 태운 오늘의 강행군으로 다들 녹초였다. 옆에서 로제가 쌍둥이에게 두둑한 일당을 약속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기분이 조금 유쾌해졌다.

하지만 그 가느다란 유쾌함은 곧 끊어졌다.

그 남자다.

제릴은 물끄러미 로제와 쌍둥이를 응시하는 자칭 무어 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음흉한 생김새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요사스럽고 불길한 남자였다. 저 시선만으로도 쌍둥이는 남자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쾌활한 여동생은 인지도 못한 것 같았다.

대체 저 남자는 언제 이 저택을 떠나는 걸까?

어제오늘 알음알음 주워들은 것으로 저 남자가 로제를 지키려고 했다는 건 안다. 심지어 로제를 향할 때마다 시선에서 어떤 뜨겁고 습한 갈구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 나쁜 남자였다. 피어오르는 앳된 연정을 자괴감으로 포기했지만, 아직 완전히 꺼트리지는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저 무어 경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언제 저택에서 나갈 생각이지?”

둘만 있는 상황이 되자마자 한껏 위압적인 태도로 이렇게 물어왔던 것이다. 아니, 질문의 형식이었지만 그 어투와 분위기는 사실상 강압이었다.

제릴은 뒷걸음질 치지 않기 위해 품속의 총을 잡아야했다. 그 동작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눈앞의 남자가 웃었다.

그 청초한 생김새에서 미신적이고 원초적인 불길함이 진동했다.

“안전해지니 또 기생충처럼 여기 붙어있을 계획인가보군. 정말 끔찍한 종자인데.”

제릴은 여전한 공포에 전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감정이 치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울분은 공포의 수위가 낮아진 틈새를 비집고 처음으로 공포 앞에서 표출되었다.

“너, 너야말로 나가야하는 거 아니야? 넌 약혼자도 뭣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가 울분에 차 내뱉은 문장을 후회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뒷말이 흘러나왔다.

“...나, 나는, 여기서 공부를 할 거야. 로제는 내가 그러길 원하니까.”

말할수록 상황이, 생각이 정리되었다.

제릴은 결국 확신에 차서 마지막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안 떠날 거야. 로제가 원하는 동안에는.”

조금 고조된 상태로, 제릴은 침을 삼키며 도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쩌면 분노나 당혹에 찬 표정을 예상하면서.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대신 그 얼굴은 온도 없이 가라앉아있었다.

극한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주제를 모르고.”

표정 없는 얼굴에서 차라리 상냥하도록 억양 없는 목소리가 거친 표현으로 울린다.

“네 어미랑 널 이 저택 밑에 산 채로 파묻지 않을 이유가 굳이 없는데 말이야......”

장갑 낀 섬세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마치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괸다. 마치 흉내 내는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이 말의 섬뜩함을 배가시켰다.

“그렇지. 혹시 둘이 미안하지만 떠나겠다는 쪽지만 남기고 사라진다면 어떨까?”

“......”

“로제는 둘의 행복을 빌어주며, 좋은 마음으로 굳이 추적하진 않지 않을까...?”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기대된다. 그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남자가 마지막 말을 작게 속삭거렸다. 그 작은 소음이 저택을 타고 예언처럼 떠도는 것 같은 압박감에 제릴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보지 않게 된 입과 눈들이 남자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와 함께 다시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는 대신 양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 잡으려고 하진 않더라도, 분명 찾아볼 거야. 걱정할 테니까."

“......”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하겠지.”

그는 휙 뒤를 돌아 뛰었다. 뒤에서 섬뜩한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이 요란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제릴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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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생아는 거칠게 얼굴을 닦아냈다.

내일 새벽에 저걸 처리해야한다.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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