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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는 괴이하고 강력한 신화서를 손에 넣고 온갖 이상야릇한 술수를 부릴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계획을 세워왔었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서, 때로는 보복을 위해서.
그리고 그 계획은 언제나 실행되었으며, 지금까지 그 예외는 오로지 로제뿐이었다.
사실 그 이유는 그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는 이 작은 여자애에게 이런 복잡한 애착과 공포를 느끼게 된 걸까?
아직도 손등의 제물낙인은 선명했다. 그 낙인에 따르면 적당한 시기가 도래하기까지의 숙성기간동안, 만족스러운 품질을 위해 그는 어떤 타인에게도 공감과 몰입을 기반으로 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숨 막히는 감정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사실 의문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왜 로제에게는 겉가죽을 위장하는 주문이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당시에는 미칠 것 같은 안도와 기쁨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로제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통하지 않기에’ 옛 영주가 떠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로제의 유년기는 이 저택을 벗어날 수 없도록 속박하고 지배하는 주문에 점철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계기도 없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는 단 한 번도 동화를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사랑의 힘’처럼 낭만적인 믿음대신 신화서를 기반으로 하는 불길한 추론을 했다.
이곳의 옛 영주, 얼굴 없는 혼돈은 그에게 제물낙인을 찍은 저급한 옛 영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건 비교를 모독으로 취급할만큼 지독히 강력하고 끔찍하여 근원에 가까운 존재다.
그리고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대부분의 신화서에 기록된 주문이 그 존재로부터 알려졌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로제에게 벌어진 현상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사실 이 모든 것은 그 강대한 옛 영주가 차후의 즐거움을 위해 일부러 로제를 ‘이렇게’ 만들어두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마치 그에게 제물낙인을 찍은 옛 영주가, 숙성이 끝나는 때를 기다리듯이......
남자는 복도에 멈춰 섰다.
‘아니야.’
과한 오측일 뿐이다. 옛 영주가 이 땅에 현신할 수 있는 다분히 더 흥미로운 기회를 포기하고 그런 선택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로제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비이성적인 피해망상을 간신히 인지하고 원래의 계획으로 생각을 꺾었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를 돌리자면, 그의 계획은 지극히 과격하면서도 망설임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 기세와 빈틈없는 악의에 의해 꾸준히 성공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빠르게 계획의 흐름을 검토했다.
우선 그는 오전 2시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 멍청한 모자가 긴장한 채 뜬 눈으로 밤을 세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로제가 잠들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는 약을 쓸 구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필요하다면 반 시간정도 더 기다릴 의향도 있었다.
그리고 저택 뒤편의 정원 구석에 석관을 확인할 것이다. 과거 무어가문이 번성했을 때 쓰던 간이묘지가 분명 저 땅 속에 흔적이라도 남아있을 테니, 그 위치를 확인해두면 된다. 분명 정원이 조성되고 땅을 고르는 작업에 의해 제법 깊게 들어가 있을 것이다.
위치를 확인하면, 남자는 묶인 채 자신의 잠자리에 있을 마담 자우어에게 곧바로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신화서를 펼쳐들고, 생명체를 원하는 장소에 나타나게 만드는 주문을 사용하면 된다.
주문에 필요한 것은 이동되는 생명체와 동등한 종의 생명체니, 그 마담이라는 여자를 사용하고 그 주제를 모르는 아들을 석관 안으로 보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일이 아주 깔끔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남자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구체화 시킨 계획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나니 불안과 초조함에 미칠 것 같았던 마음이 오히려 진정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걸 실행해도 로제를 기만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어차피 진짜 가족이나 의좋은 사이도 아니었으며, 본인을 해치려고 했던 기만자들일 뿐이었다. 큰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 밝으면, 남자는 끊어진 구속구와 남긴 쪽지를 확인하고 곤란해 하는 로제에게 ‘정 신경이 쓰이시면 한 번 추적해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무어 경!”
계단 위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늦은 밤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 한껏 낮춘 목소리였지만 귓가를 선명히 두드리는 것 같았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 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로제 오베르가 서있었다. 노란 가스랜턴을 들고 있는 손 위로 어쩐지 결연한 얼굴이 음영 졌다.
“이야기 좀 합시다.”
갑자기, 잦아들었던 불안감이 다시 차올랐다.
장갑아래 손이 떨리고, 긴장으로 심장이 옥죄인다. 온갖 나쁜 예상들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뿌리를 내리며 뇌를 파고들어 체액을 빨아먹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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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도 마음의 준비를 할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선수를 쳐야겠다.
사온 반지가 너무 영롱했기 때문이다...! 당장 주고 반응을 보고 싶어!!
후하후하 약간 외국인 친구에게 양념치킨 먹이기 직전의 기분을 오조오억배로 극대화시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엄청 좋아할 거라는 기대가 있지만 동시에 혹시 떨떠름한 반응이 나오면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서사가 있는데, 믿음을 가지고 추진해 보자!!
“어떤...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일단 제 방으로 가서 말하는 건 어떨까요? 좀 길어질 것 같기도 해서.”
사실 계획대로라면 하나도 안 길어지고 5분 만에 끝나겠지만 일단 밑밥을 깔아두자. 혹시 계획이 변경되어도 자연스럽게 넘기기 위해서 말이야.
나는 광대가 승천하지 않기 위해 애써 표정을 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무어 경이 입술을 깨문다.
혹시 웃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라면 정말 날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다. 이렇게도 자신감이 생기는군.
아무튼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무어 경은 순순히 따라오고 있다. 혹시 분위기를 눈치 채고 본인도 헐레벌떡 뭐 좀 가지고 오겠다고 달려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아주 순조롭다.
나는 방안에 들어와서 나가는 문을 닫았다. 혹시 모를 감격의 탄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소음이 될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무어 경이 황급히 돌아보는 것을 보니, 혹시 이거 엉뚱한 사인으로 오해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아, 안 되겠다. 얼른 진행해보자.
“음, 무어 경.”
“......예.”
나는 헛기침을 참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앞으로 인생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예...?”
무어 경이 갑자기 아득한 표정이 됐다. 그러더니 몇 번의 머뭇거림 끝에 작게 대답했다.
“특별히, 생각해둔 것은 없습니다만...... 왜 그런 것이 궁금하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뒷말은 더 작아졌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으니 더 떠보지 말고 지르자!
나는 서랍에 넣어뒀던 반지상자를 단번에 꺼냈다. 상자만 봐도 비싸보이는 어마어마한 물건이다.
그리고 힘차게 무어 경에게 내밀었다...!
“혹시 그 인생계획, 저랑 같이 짜보실 마음 있으신가요!”
“......”
하지만 무어 경은 반응이 없었다. 어, 조금 기다려보자.
“......”
“......”
여전히 반응이 없다.
죽은 것 같......,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슬쩍 눈이나 손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며 열심히 추측했다.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좋은 의미로 받은 충격이겠지? 그, 그치?
설마 이 세계관에서는 고백을 패물로 하는 건 좀 이상해보이나!? 어제 먹을거리 산다고 하면서 헐레벌떡 백화점까지 들렀다오느라 고생했는데 설마 헛수고였나! 그 백화점 직원은 설마 팔아먹기 위해 내 생각을 정정해주지도 않고 막 부추겨서 구매하게 만든 거였나!
그리고 환불원정대를 구성해서 백화점을 다시 가야하나까지 생각이 미칠 때 즈음에야 무어 경의 반응이 돌아왔다.
울었다.
“...!”
막 흐느낀 것은 아니고, 양쪽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본인은 잘 인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대신 무어 경은 손을 뻗어서 내가 내민 상자를 받아갔다. 잠깐 겹친 손의 가죽장갑너머로도 뜨거운 온도와 떨림이 느껴질 정도라 약간 민망하면서도 뿌듯했다.
흐, 성공인가...!
“가, 감사합니다......”
“뭘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무어 경은 상자를 열지 않고 양손으로 꾹 쥐고 있었다. 눈물은 그쳤지만 여전히 물기어린 눈이다. 속눈썹이 젖어서 더 진한 색이라 어쩐지 더 화려한 인상처럼 보였다.
여전하다 못해 더해먹는 그 잘생김에 생일선물을 열어보라고 재촉할 때처럼 ‘열어줘! 열어줘!’같은 구호를 외치고 싶은 충동이 잠깐 들었지만 참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지. 좀 천천히 확인해 봐도 되겠지 뭐.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도 있고!
“저는, 정말로.....”
“그리고 인생계획 세우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 말 겹쳤다. 무어 경은 간신히 입을 열었던 것이 무색하게 입을 꾹 닫았다. 나부터 말하라는 건가.
그럼 고맙게 선수 받겠습니다!
“이런 공식적인 관계가 되기 전에 먼저, 서로가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는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은데요.”
그래, 이 기회에 얼른 다 털고 정리하자구! 아마 그쪽도 그게 더 편할 거 아냐!
하지만 말 꺼내기 무섭게 무어 경은 또 얼어붙었다.
“으음,”
아무래도 정말 찔리는 게 많나보다. 허, 어쩔 수 없는 계략 남주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