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권 2화
길드의 행정 이사, 아이비리그출신의 초엘리트 김민욱의 말로는 단순 행정 처리 능력만 보자면 오신우보다도 상위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덕분에 수혁의 입장에서는 할 일이 많이 없어졌다.
진두지휘를 하며 길드에 알맞은 인재를 뽑는 일은 네펠리아노를 비롯한 30인의 이사진이 해결 중이다.
회사가 굴러가니 돈은 수혁의 법인 통장에서 제법 지출되었지만, 워낙 돈이 많은 탓인지 건물을 살때만큼 큰 표가 나지도 않았다.
‘역시 사장은 회사를 차리고 안정이 되면 보통 뒤에서 뒹굴 거리면서 돈을 버는 맛으로 하는 거긴한데……
생각해 보면 수혁 역시 환 대륙의 황제 시절, 초반 과다 업무에 시달리던 때를 빼고는 인재 등용을 적절히 처리한 이후론 딱히 직접 전면에 나선 적이 몇 없었다.
스스로 돈 계산을 비롯한 잡다한 행정 업무나 정치 외교에 관련한 일에서는 완전히 손을 놓은 수준이었다.
사실 정치 외교적인 부분에서는 수혁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제국의 위엄 탓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본인이 직접 결제할 정도의 일은 일 년에 몇 번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환 대륙 돈으로는 수천 억을 우습게 쓰고는 했는데……
그게 국가 일이고, 나랏돈이라 생각했는지 감이 없었나 보다.
아니면 힘겹게 살아왔던 한국에 돌아오니 유달리 금전 감각이 더 예민해졌던 걸지도 모른다.
길드를 운영하려고 큰돈을 풀어 쓰기 시작하니 조금씩 감이 돌아오는 느낌도 있었다.
‘돈 나가는 건 대충 비슷한 느낌이고, 오히려 제국 운영 시절에 비하면 너무 편하지.’
모두 오신우가 보내준 인재들과, 네펠리아노의 존재 때문이었다.
“크……. 내가 인복이 있긴 있어.
아, 펠리는 조금 다른가? 어쨌든.. w 남는 시간 동안 수혁이 할 일은 마찬가지로 돈을 쓰는 것이었다.
용산으로 향한 수혁은 목표로 했던 네이의 만물상을 찾아갔다.
어쩌면 문이 닫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가게는 열려 있었다.
“또 왔네? 한동안 인연의 끈이 없을 것 같더니……
“아, 사실 여기 올려는 건 아니었고. 그냥 다른 데서 구매하려다 나름 단골이니 혹시나 해서, 무제한 아공간 주머니 팔아?”
“사기 주머니?”
“……뭔가 이름이 바뀐 느낌인데.”
수혁의 말에 싱긋 웃은 네이가 고양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고는 검지만 세워 까딱거렸다.
“무제한 아공간 주머니라는 이름자체가 사기니까. 물론 진짜 무제한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런 건 단가가 엄청나거든.”
“어쩐지 시작가가 300억이란 말부터 불안하더라니. 혹시 실용성주머니 주제에 브랜드나, 뭐 주머니 재질 같은 걸 또 따지나 싶었네.”
“어머, 당연하지. 판테리음 가죽장인과 엘븐하임 출신의 엘프 연금술사 합작으로 만들어진 블랑드&데로 제품은 같은 수준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도 시작가가 800억부터라고.”
“……실화냐?”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리고 명품이 예쁘긴 예삐.
어딘가 감성이 특별하달까? 혹시 생각 없어? 나도 몇 개가지고 있는데?”
네이가 밝은 빛에 다소 가늘어진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말했다.
“됐고, 뭐 난 그런 명품 찾는 게 아니고 실용성만 있으면 되니까.
300억짜리는 대충 공간이 어느 정도 돼?”
진짜 무제한이 아니라면, 어쨌든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일단 300억이면 기본 제품이니까 어지간한 SUV 차량에 새겨진 마법 주머니 정도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에게? 그래 놓고 무한이란 이름을 붙인 거야?”
“편의성이 높으니까? 작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치곤 엄청 들어가는 것 아냐? 경량화 마법까지 걸렸단 점을 생각하면 납득 못할 가격은 아니야.”
“그거보다 배 이상 커지려면?”
“500억쯤?”
“ 비싸!”
“블랑드&데로만큼은 아니 지 만웨인코 제품이거든.”
“명품 필요 없다니까.”
“어머, 웨인코 제품도 제법 좋아.
겉가죽 질도 좋고, 기본적으로 방어 마법도 걸린 데다가, 공간 확장, 경량화, 유지 마법진이 촘촘히 잘새겨져서 마법이 잘 붕괴되지 않거든. 공간도 시중에 유통되는 기본 300억짜리 제품에 비교하면 2.5배이상이라고 자신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가성비로 유명하지.”
“뭔가 끌리는 소개로군.”
"후후, 정말 좋은 제품이라니까.
어때 500억짜리 주머니 하나 구입안하실래요? 호객 아니, 고객님?”
“너 방금 호객이라고 한 것 같은데?”
“우리 가게의 최고 단골을 위한 서비스 멘트 같은 거야.”
네이가 요염한 다리를 꼬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소 의심 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네이 만큼 믿을 만한 상인도 수혁에게는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판매한 제품, 혹은 소개한 것 중에서 실망스러웠던 적은 없었고 말이다.
“다 좋은데 속는 셈 사는 기분만 없애주면 좋으련만.”
“그러면 판매하는 내가 재미가 없잖아?”
“끙……. 어쨌든 콜.”
“알겠습니다. 카드 결제로 하시겠어요?”
≪ o ”
■o".
“부가세도 10프로 포함하고 싶지만 우리의 단골 호객님이니 특별히 빼줄게.”
“참으로 고맙네.”
그렇게 수혁은 500억이나 하는 무제한 공간 주머니를 얻게 되었다.
* * *
이후 수혁은 또 돈을 썼다.
이번에는 타 차원의 상품이 아니었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백화점!
지구 내의 물건을 취급하는 그곳에 들어선 수혁은 어색한 기분에 잠깐 몸을 떨었지만 곧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주로 시선과, 걸음이 멈추는 곳은 명품 가죽을 이용한 사치품을 만드는 브랜드 입구였다.
‘본래 이런 건 정말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수아랑 한정희를 생각하니 또 마음이 싹 바뀌었다.
그간 수혁은 본인을 위한 돈을 아낌없이 썼다.
힘을 되찾아 안정적인 사냥으로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다지만 가족을 위해 소비를 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양승본에게는 조금 있으면 국가에서 인도해주는 차량이 나온다.
다소 늦은 데에는 새 차, 그것도 국산 최고 등급의 세단으로 준비하느라 그랬다고 하니 불만은 없었다.
반면 수아와 한정희에게는 그런 식의 선물마저 없었다.
새 집을 마련해줬고 용돈을 주며, 집안 살림에 보탬 이상이 될만큼 매달 현금을 주니 그만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빠이자 아들인 수혁의 마음은 또 달탔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집안이라면 하나쯤, 하다못해 여유가 없더라도 가짜로라도 들고 다니는 명품 가방 하나쯤은 선물해주고 싶어졌다.
‘이런 걸로 기가 살고 죽는다는 게 조금 이해하기 어렵지만……
실상 환 대륙 내에서도 사치품이란 것은 여성들의 모임에 있어 꽤나 그런 용도로 사용되곤 했었다.
사실 남성들 사이에서도 그런 나름의 사치품 자랑은 빈번했고 말이다.
수혁은 그런 데에 잘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거기에 대하여 딱히 반발된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이 노력을 하여 대가로 얻은 물건이라면, 충분히 어떠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당한 방법으로 그런 이득을 취해 자랑거리를 만들거나 하는 일은 굉장히 혐오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수혁은 자신만의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고 이제는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저렴한 것이 몇 백 만원, 비싸면 몇 천 만원, 일억 돈도 하는 명품가방을 이제는 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백화점 명품구매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수아의 것은 아직 어린 만큼 300만원 대의 가방을, 한정희에게는 1000만원에 가까운 명품 가방을 준비했다.
'둘 다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지만……
일단 가격을 말하지 않고 품에 안겨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가족을 위한 쇼핑마저 하고 나니, 또 네펠리아노가 눈에 걸렸다.
‘근데 녀석은 여자가 아니잖아?’
그래도 자신의 회사를 위해 노력 해주는 네펠리아노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조만간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직접 고르라고 해봐야겠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수혁은 백화점을 나섰다.
양손 가득, 내용물에 비해 다소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길거리로 나서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이 상태로 뛰어갈 생각을 하니 조금 민망하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안 보이는 곳으로 빠르게 다닌다고 하여도 한동안은 눈에 뜨일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한 대 있으면 좋겠네.’
사냥용이 아닌, 일상용, 평범하게 주행하기 위한 안전한 자동차가 필요했다.
혼자 다닐 때라면 사실 상관없었다.
꽉 막힌 서울의 차도를 다니기보다는 적당히 시선이 없는 길로 경공을 펼치는 게 훨씬 편했으니 말이다.
다만 네펠리아노 외에 타인과 함께 이동할 때는 달랐다.
예를 들자면 가족과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런 때에까지 굳이 양승본을 운전시키기 보다는 본인이 차를 운행하며 함께 하루를 즐기고 싶었다.
“좋아, 조만간 일상용 차량도 하나 사자.”
한 번 마음을 먹고 돈을 쓰기 시작하니,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신적인 한도선 내에 부담이 되지 않으니 소비가 더욱 쉬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비를 통한 만족감도 분명히 느껴졌다.
새삼스레 사치품을 사거나, 자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수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근처로 경공을 사용해 달려오고, 이후 큰 도로로 나와 천천히 도보를 지나갈 때였다.
“드디어 오는군. 양수혁.”
넓은 길목 한편, 벽면에 등을 기대선 채 서 있던 사내가 수혁을 보며 아는 체를 해왔다.
키가 IM 90CM에 가까워 보이는 장신에, 건장한 체격, 얼굴의 반을 가리는 두터운 선글라스에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그를 본 수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상인?”
선글라스 아래, 사내의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면 누구야?”
“이런, 날 기억 못한 거였군.”
잠깐 헛웃음을 지으며 기침을 한 사내가 선글라스를 들어 올렸다.
강직한 인상에, 딱딱한 눈매를 한 그가 수혁을 지긋이 바라봤다.
“잡상인?”
“거 아니면 말고. 누구였지. 기억이 안 나네.”
“나 김만수다.”
“김만수, 김만수. 아아……
사내가 주머니에서 검은 쇠구슬을 꺼내 달그락거리는 시늉을 한 이후에야 무언가를 기억해낸 수혁이 박수를 쳤다.
“기억났어. 이제는 굳이 요주 인물로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수준이라 잊어 버렸지 뭐야. 미안하네.”
몇 개월 전, 오랜만의 가족 식사이후, 화장실을 간 수아를 괴롭히는 한아름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에 대한 분노로 몇 가지 일을 처리한 덕에 트러블이 조금 생겼었다.
김만수는 당시 수혁이 만난 각성자 중에서는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특히 갑작스럽게 쏘아내는 묵환의 위력이 건네주던 심장의 섬뜩함은 제법 강렬했다.
때문에 당시 인상은 강력하게 남았지만, 그런 김만수를 압도하는 각성자 혹은 악마 등과 싸우다보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더 이상 수혁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할 수준의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거기서 느껴지는 진심 탓이었을까?
“남에게 상처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김만수의 목소리에서는 다소 상심한 감정이 물씬 묻어났다.
“큭…… 인정한다. 양수혁, 노네 임드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
고작 몇 달 사이에 어떻게 이런 괴물이 된 거냐?”
나름대로 자긍심이 높은 김만수는,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대우를 받은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수혁에게 그런 점을 따지고 들 자신은 없었다.
몇 개월 전 그가 보았던 때와 지금의 수혁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굳이 정보를 제외하고라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탓이었다.
“그것 궁금해서 물어보러 온 거야?”
“아니, 뭐. 사실 중요한 건 이런게 아니지. 제법 됐지만 말하지 않았나? 찾아오겠다고.”
“그건 진짜 잊고 있었네. 미안.”
“……상관없다.”
짧게지만, 푹 한숨을 내쉰 김만 수가 들고 있던 검은 가방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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