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권 씨화
수혁은 내심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풍기는 위엄과, 그 힘이 주는 중압감 탓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외형이 수혁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저게 뭐야?’
쿤탈로드.
강철 제국의 신이라는 신명을 가진 드래곤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괴했다.
초록빛 두 눈 중 한쪽 눈은 어디서 잃었는지 텅 빈 검은 동공이 깊게 패였으며, 길게 솟아 있어야 할 뿔은 뚝 잘려 나간 채였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동체의 절반은 드래곤의 강대한 비늘 대신 은빛으로 번쩍이는 미스릴로 뒤덮고 있었다.
미스릴로 감싸지 않은 남은 절반의 육체에 흐르는 검은빛 비늘 사이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끔찍한 검상劍傷이 가득 새겨져 있는 채였다. 강인함의 상징인 비늘은 듬성듬성 밖에 남지 않았으며, 흉터 사이로는 검붉은 핏물이 아직도 꾸역꾸역 흘러넘치고 있었다. 세계를 뒤덮은 것 같은 날개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구멍 뚫린 그물 마냥 빈틈투성이였다.
‘죽어가고 있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오만이로구나.]
쿤탈로드가 그를 읽은 듯 분노하며 기운을 쏟아냈다.
용의 위엄.
그 거대한 힘이 어깨를 짓누르는 순간, 수혁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손끝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거대한 내력을 쏟아 부어 호신강기를 펼쳐봤지만 찢어졌고, 극강기를 둘러 맞서려 했지만 밀려났다.
고작 위엄 하나로 수혁의 전신을 속박해버렸다.
‘이게 드래곤.’
천사들마저 인정한 최상위 용종의 힘이었다.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을 수도 있겠는데……
어설픈 동정심으로 대체 무엇에 싸움을 걸었단 말인가?
그 순간 수혁의 머리 위로 강력한 뇌전이 떨어졌다.
쿠르릉-!
벼락.
용의 위엄에 발이 묶인 수혁은 꼼짝 없이 그 마법을 두드려 맞아야 했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은 수혁에게 있어 오히려 긍정적인 면모를 만들어냈다.
정신이 짜릿하게 울려 퍼지며, 잠시나마 느꼈던 두려움을 빠르게 몰아냈다.
‘패배를 상상하면, 정말 지는 거 야:신의 힘은 의념에 기반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달았기에 수혁은 단숨에 왕의 격을 뛰어넘어 신이 되었다.
한데 싸우기도 전에 죽음을 떠올리며, 패배를 염두에 둔다고?
설령 진짜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어도 그래선 안 됐다.
적어도 수혁이 만든 스스로의 신격은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생각을 바꾸었다.
의념을 날카롭게 가다듬어 하늘전체를 거대한 화염구로 덮으며 오만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쿤탈로드를 노려봤다.
체볼 만해.’
언제나 그랬듯, 마음을 바꿔먹었다.
어떤 고역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스스로를 상상하고 구현화한다.
의념기예 - 무패의념無敗意念 모든 정신 오염 효과로부터 면역.
의지력 스랫 +
1500.
온몸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단숨에 떨쳐졌다.
움직일 수 있었다.
수혁은 즉시 다음 스킬을 발동시켰다.
[특수: 전쟁군주는 불패한다. 1V.
10.]
10레벨 달성 효과로 특수 효과가 추가됩니다.
[특수 효과: 선전포고.]
전쟁군주가 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합니다.
선전포고의 효과를 받은 대상은 즉시 전쟁군주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대신하여 전쟁군주는 상대의 약점을 볼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머리를 크게 울렸고, 그 순간 하늘을 뒤덮던 불덩이가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분노한 드래곤은 드워프들마저 모두 몰살시키려는 듯 마구잡이로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혁은 단숨에 용조를 생성한 이후, 극초음속의 세계로 진입하여 날아드는 불덩이들을 가로 지르며 모두 소멸시켰다.
과과광-!
허공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이 노옴-! 고작 인간 주제에-!]
분노한 쿤탈로드가 입을 벌리자 그 내부로 흑색의 섬광이 뭉치기 시작했다.
‘용의 숨결!’
일명 드래곤 브레스.
아직 용으로서 완전하지 네펠리 아노가 사용하였을 때에도 상위 종족들마저 소멸시킨 궁극의 힘이 응어리지기 시작했다.
‘저게 쏟아지면……
수혁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나 그렇게 되면 아이언헤임은 끝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광-!
날카로운 용조가 미스릴로 감싸진 쿤탈로드의 목젖을 강하게 때렸다.
하나 군탈로드는 녹색 눈을 이죽이며 그런 수혁을 비웃을 뿐이었다.
[우습구나.]
과오오-!
용의 숨결이 단숨에 형태를 갖추고, 발출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런……
신음을 흘린 수혁이 해답을 떠올릴 때였다.
한 줄기 백색의 섬광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날아와 쿤탈로드의 앞에 섰다.
“갓 워드God Word - 얼티밋썰Ultimate Seal.”
차가운 목소리는 펼치고 있는 책장을 넘기며 빠르게 붓펜을 놀렸다.
동시에 목을 젖히며, 용의 숨결을 단숨에 쏟아내려던 쿤탈로드의 몸이 잠시 멈추었다.
“갓 워드 - 쇼크 Shock;광-!
이어서 다시 한 번 펜을 놀린 그가 손을 휘젓자 쿤탈로드의 가슴 한편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고개를 젖혔다.
“갓 워드 - 얼티밋 푸쉬 Ultimate Push.”
세 번째 문장을 완성한 그가 붓펜을 길게 그은 순간에는 쿤탈로드의 몸 중앙에 거대한 기파가 번졌다.
과앙-!
폭음과 함께 거대한 쿤탈로드의 신형이 대륙을 넘어 어딘가를 향해 무섭게 쏘아져 날아갔다.
놀란 수혁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상대의 존재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보게 되었군.
인간의 신이여.”
백색의 피부와 마치 물결처럼 찰랑이며 떨어져 내리는 백색의 머릿결, 빛 가루가 떨어지는 화려한 6쌍의 날개, 한 손에는 책, 반대편 손에는 천사의 깃털로 만든 붓펜을 든 존재가 수혁을 향해 차가운 음성을 흘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처음은 아니었다.
수혁은 상대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메타트론……!”
천상의 신격, 신의 서기관이 진체眞體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 포악한 광룡을 사냥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자네 덕분에 무용지물이 되었군.”
입가로 비릿한 웃음을 홀린 메타트론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다. 힘을 합쳐서라도 놈을 죽여야 해.”
“너와 내가?”
수혁이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이미 지구와 천상은 전쟁을 선포했다.
서로 간에 합심을 할 이유는 조금도 없을 터였다.
“광룡은 전 우주적으로 보아도 위협적인 존재다. 단순한 몬스터 몇 마리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
수혁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메타트론의 차가운 눈을 바라보았다.
“너와 나는 결국은 싸우게 될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은 건녔지.”
메타트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메타트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놈이 신의 언어를 떨쳐냈다.”
짧게 번 시간이 대화로 모두 소진된 셈.
수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대신 심장은 내 거다.”
메타트론은 아무런 말없이 수혁을 바라보았다.
“왜? 싫어?”
잠시, 메타트론의 딱딱한 입가로 흐릿한 미소가 지나갔다.
“아니, 좋다. 다만…… 그대가 앞으로 탐욕과 만나게 될 그 날이 기대되는군.”
칠대죄악 중 하나, 심지어 그중 제일이라고도 불리는 탐욕의 이름을 잠시 읊은 메타트론의 날개에 백색의 빛이 가득 휩싸였다.
“광룡이 이곳으로 돌아오면 제약이 많아진다. 가자.”
이후 메타트론의 신형이 먼저 움직였다.
수혁이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속도는 내가 더 빨라.’
이 싸음은 현재로서는 광롱, 쿤탈로드의 사냥이었다.
하나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상대에 대한 정보 수집전이기도 했다.
‘진짜 메타트론의 힘.’
가브리엘의 육신을 빌려 나타났던 영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정한 천상의 신격이 갖춘 이 힘을 기억해야 한다.
‘영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돼.’
어쩌면 바알에 대해서도 잘 못판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거대한 격차.
“잡생각을 할 틈은 없을 거다.”
메타트론이 그런 수혁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동시에 둘의 눈앞으로 흑색의 섬광이 나타났다.
‘용의 숨결 r
접근을 눈치 첸 쿤탈로드가 망설임 없이 가장 강력한 드래곤의 무기를 쏘아 보낸 것이다.
방심을 노린 치명적인 급습.
메타트론이 펜을 움직일 타이밍마저 놓친 그때였다.
‘칭호, 투왕 효과 발동.’
아직 칭호 통합을 결정하지 못하여, 단독으로만 남아 있던 투왕이 발동되었다.
그 순간, 수혁의 눈에 용의 숨결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부분이 보였다.
'저 점은……?’
결結이었다.
모든 물체에 존재하는 약점.
무공을 익힌 수혁에게는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다만 이 결이란 것은 매번 음직였고, 변칙적이었다.
특히 강력한 힘일수록 너무나 제멋대로인지라 사실상 결을 노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지금 수혁의 눈에는 고정된 하나의 결이 보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겹치는 몇 개의 점.
‘이게 선전포고의 힘?’
하나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수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특수 스킬만으로는 약점조차 보지 못할 정도였나 보지!’
하지만 칭호까지 발동하며 이제는 확실히 그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수혁은 쿤탈로드의 날개와 맞먹는 거대한 용조를 단숨에 생성했다.
그리고 날아드는 용의 숨결을 향해 손을 뻗어, 약점으로 표현된 점을 짚었다.
과가가각-!
극강기가 갈려나가며 팔이 저려 왔고, 상처가 나며 핏물이 튀기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옷은 가루가 되어 흩어진 지 오래였다.
하나 수혁은 망설임 없이 나아가, 그 점을 움켜잡고 뽑아내듯 거칠게 용조를 휘둘렀다.
찌이이익-!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강렬하게 회전하던 용의 숨결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불타오르는 극강기의 응집체였던 용조 역시 그 순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흐릿하게 변하여 흩어졌다.
“하악-!”
거친 숨을 쏟아낸 수혁이 허리를 굽혔다.
“후우-!”
이어서 깊은 숨을 다시금 내뱉으며 흔들리는 정신을 일깨웠다.
“놀람군……. 용의 숨결을 정면에서 막았다고?”
메타트론이 경악한 음성을 흘렸다.
용의 숨결은 모든 용종에게 있어 최강의 무기이자, 최후의 비밀 병기였다.
그 위력은 신에 다다른 용종일경우 대륙 하나를 절반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수준.
한데 수혁은 그를 한 손으로 막아서고 소멸시켰다.
오죽하면 메타트론도조차도 용의 숨결에 대항하는 법은 회피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나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건방진 인간과 비둘기 놈! 이제보니 한통속이었구나!]
어느덧 두 사람의 앞으로 무섭게 날아온 쿤탈로드가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미스릴로 덮인 두터운 꼬리가 가하는 일격은 단순히 그 규모만으로도 위협적인 수준.
수혁과 메타트론이 서로 위와 아래로 찢어져 방향을 나뉘었다.
“갓 워드 - 보어Bore.”
아래에서 메타트론의 주문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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