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9화
환영이나 분신과 같이 다소 특별한 형태 또한 아니었다.
그보다 더 단순한, 기록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녹음기와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뜬 수혁은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메시지에 주목했다.
[네가 잠든 동안, 이 우주에 또 한 번의 대격변이 일어났어. 흔치 않은 일이고,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중복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발생한 거야.]
언제나 보던 메시지와는 다른 무거운 형태.
표정 역시 기계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말에 수혁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정확하기보다는 다소 돌려서 한 설명이었지만, 우주의 대격변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탓이었다.
“또 다른 대신이 나타났다고?”
수혁이 대신의 위에 오른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다.
평균 하나의 우주에서 또 다른 대신이 나오기까지 최소 1만년 이상의 시간을 요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정도의 격차인 것이다.
분명 어떤 변수가 생겼다.
[새로이 탄생한 대신의 성향에 위험성을 느낀 나는 그를 찾아갔지.
……실수였어.]
치직-!
전류가 튀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환영이 일그러지듯 흩어졌다.
[상대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어. 기록을 살펴보니, 너와 만난 적도 있더라고. 데이모스. 고대통의 멸종에서 살아남은 일족의 배신자.]
수혁은 데이모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명확히 그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만났던…… 그자!’
외딴 행성에서의 대전쟁.
그 속에서 네펠리아노를 괴롭히던 화염에 휩싸인 고대롱을 기억한다.
스스로를 네펠리아노의 아버지라고 지칭하던 사내.
첫 만남부터 느낌이 과하게 좋지 않았다.
괜히 치밀어 오르는 불안한 마음에 네펠리아노를 ‘아내’라고까지 선언하며 데이모스에게서 떨어트려 놓은 것도 그 탓이었다.
이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만 여겼었다.
네펠리아노가 가진 위험성은, 황준우와 달기가 직접 제어에 나섰으니 말이다.
‘그때 당시 느꼈던 불안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수혁의 눈빛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해진 메시지의 정황만으로도 상황 파악을 끝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안, 당하고 말았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
파지직-!
또다시 이름을 부르자 전류가 튀기며 수혁의 어깨 위로 강한 부담감이 내려앉았다.
더욱 굵은 핏줄기가 수혁의 입술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음 하나 흘리지 않은 수혁은 주먹을 움켜쥔채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바라보았다.
대신인 그녀가 본신이 아닌 환영과 같은 존재로 메시지만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
단순히 수혁을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데이모스는 지고신, 제강의 힘중 하나인 파괴를 가지고 있었어.
여러모로 내 상태가 안 좋았던 점도 문제였겠지만…….]
쩌적-!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머리카락일부의 형태가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너L 다시 한 번 말할게. 이 메시지를 네가 읽을 때쯤엔 어떤 사태가 이미 발생한 이후겠지. 그는 지구를 향한다고 했어. 아마 네 연인인 네펠리아노가 목적일 테고, 현재 회복 중인 너는 무력하게 그녀를 잃었을 수도 있을 거야.]
눈을 질끈 감은 수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는 완전히 네펠리아노가 사라진 연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수혁이 사랑하는 지구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말이다.
[제우스와 무신, 마신 등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하지만 제우스 쪽도 혼돈의 적자와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은 상태야. 무신과 마신은…… 어째서인지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아. 미안해.]
조금씩 작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모습을 보며 수혁은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애초에 그녀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었다.
적어도 수혁이 생각하기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이 우주를 누구보다도 아끼는 존재 중 하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수혁을 위해 가장 많은 희생을 한 인물이었다.
[내가 너희를 지켰어야 했는 데…….]
“네 책임이 아니야.”
애초에 그녀가 수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 꽤나 많은 힘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파괴의 힘을 가졌다고 하여도, 이제 막 대신이 된 데이모스에게 허망하게 당하지 않았을 터였다.
[먼저 네가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어. 아마 꽤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만……
완료된다면 내가 남긴 또 다른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이미 받았어.”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남긴 메시지는 데이모스와의 만남 전이었다.
[아마 그때쯤에도…… 난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나는 널 못 보겠지.]
[수혁.]
이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깨진 유리창처럼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 시간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더 이상 메시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형태를 한 형상이 자잘한 유리조각처럼 깨어지며 빛의 입자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말없이 입가로 흐르는 핏줄기를 닦은 수혁은 머릿속에 단 하나의 이름을 되새겼다.
‘데이모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
‘원수怨鑑. 꼭 찾아내서, 처참하게 죽여주마.’
오랜만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깊이 증오하게 된 수혁의 두 눈동자에 분노가 타올랐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이 종말을 맞이한 황폐한 세계.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은 그 땅에는 한때 이 우주에서 무엇보다 찬란한 황금의 문명을 누렸으며, 가장 강대하다 추앙받았던, 그렇기에 모두가 두려워 멸살減殺을 바란 종족이 살았었다.
“때문에 지워졌지.”
세계는 살아남았지만, 이 세계를 살아가던 생명체는 무엇도 남지 않았다.
첫 시작은 그들의 세계를 아름답게 빛내던 인공 태양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태양에 문제가 생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지.”
그저 인공 태양을 덮을 만큼의 무수히 많은 어둠이 하늘을 뒤덮었을 뿐.
“누구라고 명명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이 우주의 모두가 우리를 오만하다 꾸짖었고, 증오하였으니 붉은 두 눈에 지난날을 회상하는 데이모스의 시선에 뜨거운 감정이 일렁였다.
“진화가 죄인가? 발전하고 싶은 욕구가 오만인가? 아니, 그들은 그저 두려웠을 뿐이다.”
한때 찬란하게 빛났던, 하나 이제는 투박한 구릿빛이 되어버린 성채의 내성內域,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왕좌의 방 내부에서 구멍이 크게 뚫린 성벽과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데이 모스가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왕좌 위.
모든 마력이 봉인 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흔들림이나 떨림 없이 차가운 눈을 빛내고 있는 네펠리아노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 오른 검은 아지랑이가 마치 족쇄처럼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탓이었다.
“리아. 나의 딸아.”
싱긋 웃음을 보인 데이모스가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거부하지 말거라. 본래 이 자리는 네 것이어야 했다.”
천천히 들어 올린 투박한 손, 데 이모스의 검지 끝이 네펠리아노의 볼가에 다가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녀의 턱 끝에 닿았다.
“역시, 아름답구나.”
“내 이름은 리아가 아니야.”
웃음을 보인 데이모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는 리아다.”
“네 딸인 적도 없어.”
“네게 흐르는 피는 나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났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안달이라……
피식 웃은 데이모스가 뒷짐을 졌다.
“네가 그렇게도 지키고자 하는 사내의 행성을 지금의 나는 마음만 먹으면 가볍게 부숴버릴 수 있겠지.”
데이모스의 두 눈에 난폭한 감정이 일렁였다.
“데이모스!”
분노한 네펠리아노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라 부르거라.”
“너……!”
“리아.”
시선을 돌린 데이모스의 입가로 진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나 눈은 차갑게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버……지.”
입술을 꾹 깨문 네펠리아노가 고개를 숙이며 데이모스를 불렀다.
순간, 그녀의 머리에 작은 충격이 찾아왔다.
H비이-!
짧은 이명과, 뇌 일부가 갉아 먹히는 듯한 기이한 기분.
“그래, 리아. 너를 부정하지 말거라. 네 탄생의 근원을 떠올려라.”
아랫입술을 깨문 네펠리아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생각으로는 눈앞의 사내를 몇 번이고 찢어 죽이고도 남았다.
하나 닿지 않았다.
클레시아 급은 아니지만, 데이모스 역시 이 우주에 여섯뿐인 당당한 대신 중 하나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의 목을 꺾을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공허의 문.’
잠시나마 느꼈던, 그 괴이한 세계를 열 수 있다면 결과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나, 그 선택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파멸을 불러올 것이다.
“리아, 나는 네가 사랑하는 그 인간을 부정할 생각이 없단다. 다소 건방지긴 하지만…… 능력은 출중하지. 우리가 만들 새로운 세계의 네 부군夫君 감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단다.”
“그를 미워하지 않게 도와다오.
할 수 있겠지? 아름다운 내 딸아이야.”
턱 끝까지 내린 검지를 이제는 그 아래 목선으로 홀리기 시작한 데이모스가 징그럽게 웃으며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리아.”
“나는 너의 무엇이냐?”
“아버……지.”
“네 목적은 오롯이 하나, 나와 함께 모든 대신을 살해하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해……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지배자의 씨가 필요하겠지.”
데이모스의 검지 끝이 이제는 그녀의 쇄골을 넘어 가슴 언저리 바로 위까지 향했다.
흠칫, 몸을 떤 네펠리아노의 눈이 높게 솟았다.
“그만둬!”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이어진 발버둥에 데이모스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더 나아가면…… 그냥 모두 포기할 거야.”
이를 아득 갈며 흘러나온 지독하게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
그에 웃음을 보이며 손끝을 네펠리아노에게서 떼어낸 데이모스가 뒷짐을 졌다.
“하긴 그래도 부군의 이름으로 네게 내어줄 것이니, 첫 아이쯤은 양보해야겠지. 하지만……
단숨에 큰 손을 휘둘러 네펠리아노의 뺨을 높게 올려친 데이모스의 눈과 머리카락에 불길이 솟았다.
고개를 크게 젖힌 채 붉게 달아오른 뺨 위로 새하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표정을 감췄다.
“다시는 이 아비의 뜻을 거절하지 마라. 알겠느냐?”
“대답은?”
“……알겠습니다. 아버지.”
“후후후……
흡족한 웃음을 지은 데이모스의 입가로 진한 웃음이 떠올랐다.
레벨업하는 무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