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13화
손귀공이 지구로 귀환하여 수혁의 위치를 조사하고, 릴리아의 우주선에 도달했을 무렵까지도 공변의 방문은 다시 열리지 않은 채였다.
만 하루.
짧지 않은 시간동안 손귀공의 마음에는 조급함이 생겼고, 문 앞을 오가는 그의 발걸음은 안달이 난 어린아이와 같아졌다.
“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 양수혁.”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하는 그의 시선이 곁에 선 릴리아를 향했다.
“넌 그의 사도이지 않나? 소식을 전달할 수는 있을 텐데?”
“네 부탁대로 소식은 바로 전달했다. 다만 완성의 신께서 목표로 하신 세계와 이 세계의 시간선이 다르니…… 메시지가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를 일이지.
시간의 변수란 건 내가 측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니까.”
“시간의 변수니 뭐니,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잘 몰라. 짧게 줄여서 말해.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냐?”
“……그걸 내가 알 수 없단 뜻이다.”
“무능하군.”
한숨을 푹 내쉰 릴리아는 손귀공과의 대화를 끊었다.
손귀공은 그런 릴리아를 짧게 노려보고는 공변의 방문 앞에 섰다.
쾅-!
이후 적지 않은 힘으로 문을 내려 쳤다.
놀란 릴리아가 곧장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무슨 짓이냐!? 이 안에 그분이 계신단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러니까 들으라고 내려친 거다. X신 같이 안에 있다가 제 연인과 동료를 모두 잃지 말고 이만 나오라고.”
“멍청한……! 시간선이 다른 세계에 충격을 가하면 자칫하면 모든게 어긋날 수도 있다!”
“닥쳐-!”
광-!
손귀공의 목소리와 함께 퍼져 나온 기파가 릴리아의 몸을 강하게 밀쳐 냈다.
“쿠엑-!”
피를 토한 릴리아가 바닥을 굴렀다.
릴리아 역시 꾸준히 성장을 거듭했다지만 그녀의 격은 기껏해야 하급 신이었다.
반면 손귀공은 수혁으로부터 앙그라 마이뉴의 격까지 전수받으며 최상급 신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애초부터 격과 힘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 멍청한 원숭이가! 제가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하나 릴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손귀공의 그릇된 판단으로 수혁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저 힘만 센 미친 원숭이를 막아야만 해.’
신념으로 가득 찬 눈을 한 릴리 아가 몸을 일으켰다.
무겁게 일어난 기세가 손귀공의 전신을 억누르듯 펼쳐졌다.
“흥-!”
손귀공 역시 그런 릴리아를 노려보며 털을 바짝 세우고는 기세를 일으켰다.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계집. 놈이 저 안에서 나오지 못해 그 악당 놈과 연인을 잃으면 죽는 것만도 못하겠지!”
“그 무엇도, 그분의 죽음과 비견할 수는 없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계집이로군!”
“고집불통의 똥만 가득 찬 머리를 한 원숭이 놈!”
둘의 기세가 서로를 향해 강렬하게 날을 세울 때였다.
쿠궁-!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손귀공과 릴리아, 둘의 고개가 동시에 방문을 향했다.
그 내부에서 칠색의 빛에 휩싸인 신형이 튀어나와 둘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비추던 기운들이 한순간에 한여름 태양을 맞이한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그 날카롭고도 깔끔한 움직임에 손귀공의 두 눈에 옅은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성장했다더니……
격 자체가 다른 것이 확연히 체감되 었다.
게다가 칠색을 내뿜는 기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손귀공은 저처럼 화려한 빛은 처음 보았다.
무엇보다, 그 힘과 격에 손귀공은 장담할 수 있었다.
‘압도적이로군.’
데이모스와 같은 대신이라지만, 격이 다르다.
“늦어서 미안하니까 둘 다 그만 싸우고……
수혁의 시선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손귀공을 향했다.
“반지 내놔.”
“아……
손귀공이 수혁을 향해 반쯤 금이 간 반지를 건넸다.
“위치는……
“어……
“기록되어 있군. 흑산자 녀석 솜씨인가.”
당황하는 손귀공 대신, 반지를 살펴보며 헤어지던 당시의 좌표를 확인한 수혁의 입가로 난폭한 미소가 떠올랐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쉬고 있어.”
파앗-!
그렇게, 둘의 앞에서 빛 무리에 휩싸인 수혁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수혁은 손귀공으로부터 건네받은 반지로 고대롱의 고향별에 도착하였으나, 데이모스와 흑산자의 모습을 바로 찾을 수는 없었다.
흑산자는 데이모스를 피해 도주하기 위하여 몇 개나 되는 행성을 옮겨 다녔으니, 최종 위치로부터 수혁이 추적을 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흑산자가 수혁이 알아볼수 있게 곳곳에 남긴 흔적들이 있었다.
‘빠르게 쫓아가면 하루 내에는 도착할 수 있겠군.’
별 탈이 없다면 딱 그 정도의 시간.
속이 타는 일이었다.
그 하루 사이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수혁은 다급하게 우주로 나아가 몇 개나 되는 행성을 가로지르며 빠르게 움직였다.
생각보다 추적에 힘이 들지는 않았다.
공변의 방에서 펼친 성역의 힘까지 더해져 완전히 회복한 덕일까?
아니면 단순히 분노 탓일지도 모르지만 수혁의 감각은 클레시아와의 전투 직전에 비해 몇 배는 더 예민해진 상태였으며, 날카로웠다.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약 반나절.
자연스럽게 혼돈기를 생성하고 완성기를 운용하며 수혁이 느낀 바는, 본인이 완벽히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막 대신이 되었을 때와는 달라.’
따지자면 지금도 이제 막 대신의 위에 오른 신참에 불과하지만 클레시아와의 전투는 생각보다 더 큰 체감적 성장을 가져왔다.
그렇게 반나절이 조금 더 흘렀을 무렵.
수혁은 흑산자가 마지막으로 향한 세계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검은 우주를 찢으며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어?’
목적지 세계의 하늘 위, 우주에서부터 빛이 번쩍이며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수혁은 그 벼락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눈앞에서 그 빛이 번뜩이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제우스?”
의문에 화답하듯,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아주 조금 늦었군. 그래도 다행이로군. 마지막으로 벼락 한 번 던질 힘은 남아 있어서…… 친구의 사랑을 계속 응원할 수 있겠어.
-이름 모를 신.
이름 모를 신.
수혁이 아직 신이 되기도 이전부터 그를 지켜보고 후원하며 도움을 주었던 신이다.
이제야 수혁은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제우스, 당신이었군.’
당황스러웠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긴 이름을 감춘 채로 수혁을 그 정도로 도와줄 수 있는 신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 우주에 몇 없는 대신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대신들 대다수에게는 참 많은 빚을 졌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스승님, 제 우스.’
사실상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수혁은 지금과 같은 자리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터였다.
심지어 대신들 외로도 수혁을 도와준 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애초에 수혁을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 그리고 함께 자라온 동생 수아야 말할 것도 없는 게 당연했다.
가족이 있었기어L 그 따뜻함을 알기에 수혁은 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온 이후로도 수혁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독불장군에 제멋대로인 나인데도 다 받아주었지.’
첫 적응에 큰 도움을 주었던 샤하르, 그리고 수혁의 가치를 높게 샀다지만 끝까지 믿어준 오신우가 시작이었다.
그 뒤로 우연치 않게 얽힌 인연에서 연인이 된 네펠리아노를 만났다.
환 대륙에서 시작된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진 흑산자와는 악연이라 말하고 싶지만, 분명 친우親友라 말할 수도 있을 터였다.
마찬가지로 다소 좋지 않은 관계로 만났지만 끝내는 곁에 남아 동료가 된 릴리아, 손귀공 등도 있었다.
그 외로도 수혁을 응원해주고 도와주는 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모두가 소중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직까지 수혁은 소중한 이들 중 누구도 잃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고비가 있었던 것치고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결단코 잃지 않을 터다.
짙은 흑염이 불타고 있는 세계, 그 중심을 향해 수혁의 육체가 단숨에 대기권을 뚫고 진입했다.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의 전경에 취할 틈은 없었다.
검은 로브를 눌러쓴 하데스 앞에서, 기 하나 죽지 않은 채 외치고 있는 그의 동료와 연인이 보였다.
‘흑산자, 네펠리아노.’
그들의 안전을 확인한 이후에야 수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이후, 추락하고 있는 헤르메스를 품에 안았다.
그 놀람고도 빠른 움직임에 헤르메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혁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완성의 신……?”
대답을 듣기도 전이었다.
무시무시한 흑염의 파도를 뚫고 들어간 수혁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손이 괴성을 내지르는 데이모스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 그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데이모스, 이제 혼 좀 날 시간이다.”
광-!
불타오르는 데이모스의 신형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직후 지상으로 내려선 수혁이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 포세이돈의 앞에 헤르메스를 내려주었다.
“도망갈 수 있죠?”
“그 정도쯤은……
포세이돈과 헤르메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최대한 멀리 달아나. 사실 지금 내가 화가 많이 나서……
다시금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데 이모스를 보며, 온몸에 칠색의 완성기를 두른 수혁이 지면을 박찼다.
“힘 조절을 다소 못할지도 몰라.”
수혁이 사라진 후, 뒤늦게 음성이 전달됐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포세이돈이 헤르메스를 품에 안고는 파도에 휩싸여 뒤로 물러났다.
과과광-!
그 직후 허공에서 연이은 폭음이 들려왔다.
처음 수혁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손길에 흑염을 뚫고 몸에 닿았을 때 데이모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한낮 인간이 고작 백년도 살지 않은 채 대신이 되었다고……?’
의문은 그의 몸이 바닥으로 내던져지며 확신이 되었다.
과광-!
등허리를 짜르르 타고 흐르는 충격, 목덜미를 콱 졸라오는 두터운 격.
같은 대신이 아닌 이상에야 이와 같은 공격을 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허공으로 날아올라 수혁을 바라보았다.
‘가능성이 있다고만 생각했는 데……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군.’
게다가 처음 보는 칠색의 빛을 내뿜는 완성기마저 불쾌했다.
심지어 짧게 주고받은 몇 번의 공방.
그 속에서 자신이 밀린다는 것을 깨달은 데이모스의 심장 한편에는 섬뜩함이 차올랐다.
‘무武로 다투면 안 된다.’
데이모스 역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또 많은 세계와 우주를 오가며 적지 않은 무를 갈고 닦았다.
검 한 자루를 들며 소드마스터라 불렸으며, 주먹을 말아 쥐면 권왕이라 불렸었다.
어떠한 세계에서는 그를 향해 무극無極, 그랜드 마스터라는 칭호까지 선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한데도 불구하고 무의 완성에서 밀렸다.
애초에 본인이 무극에 진정으로 도달하지는 못했어도, 적지 않은 수련을 쌓았다고 생각하던 데이모스의 자존심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하나 단순히 그뿐이었다.
쾅-!
흑염을 쏟아내며 거리를 벌린 데 이모스의 머리 위로 드높은 두 개의 뿔이 솟아났다.
콰드드득-!
마력이 솟구치며 세계를 뒤흔들었다.
“우선은 칭찬해주마. 인간 주제에 대신의 경지에 오르다니……
“내 생각엔 아마 너보다 내가 먼저 대신이 됐을 텐데? 후배야.”
수혁이 데이모스를 향해 이죽거리는 미소를 보였다.
“그럴……리가. 아니, 과연……
데이모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대신이 되기 이전, 우주협의회에 파고들던 그 순간 짧지만 우주가 크게 반동하는 것을 느꼈었다.
“설마 그게 또 다른 대신의 탄생일 줄은……
데이모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면 놈의 격이 이 몸보다 위일수도 있다는 것인가?’
당황하는 데이모스를 향해 손을 까딱거린 수혁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누가 선배인 줄 알았으면, 예의부터 새로 갖춰야지?”
“……역시, 말도 안 되지. 천박하고, 방정맞으며, 가볍다. 네놈은 운이 좋구나.”
데이모스는 안도의 미소를 흘렸다.
대신의 위에 오르기도 힘들지만, 그에 걸맞은 격이란 것은 결코 쉽게 쌓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레벨업하는 무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