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15화
'아니……
쫓으려면 못 쫓을 것도 없지만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힌 흑산자가 도망치듯 사라진 상황이었다.
‘괜히 따라가 봐야 민망한 상황만 생길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 아니겠지.’
모른 척하자.
흑산자랑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함께 볼 사이였다.
짧은 민망함이, 평생의 이불킥각으로 남는 건 수혁으로서도 사양이었다.
대신하여 시선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한 네펠리아노에게로 향했다.
“수혁…… 님……
“그래, 나야.”
눈빛이 돌아오다 못해 음성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혹여나 몰라 기운을 돌려 살펴본 결과, 육체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안해. 많이 고생했지.”
네펠리아노는 대답 대신 편안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녀 나름의 위로일 터였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기꺼워, 닮은 미소를 보인 수혁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릴 때였다.
“가암히……!”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등 뒤로부터 다시금 뜨거운 기운이 일어났다.
수혁은 네펠리아노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데이모스.”
애초부터 죽이지는 않았기에 놀라진 않았다.
만약 그가 목숨을 거둔다면, 그 상대는 네펠리아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데이모스가 분노하며 일어난다고 하여 두려울 것도 없었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짧은 말과 함께 격을 내뿜자, 얼굴이 바짝 굳은 데이모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힘겹게 세웠던 무릎이 허망하게 꺾여버렸다.
정상인 상태에서도 이미 수혁에게 밀렸던 격이다.
이미 반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한 번 크게 패배한 데이모스는 더 이상 수혁의 격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쿵-!
무릎과 고개를 동시에 꺾은 데이 모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치욕, 절망, 허무함.
말로 다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그의 정신을 고통스럽게 어지럽 혔다.
“으아아아-!”
내뱉는 절규에 담긴 한恨이 세계를 떨게 만들었다.
조심스럽게 네펠리아노의 귀를 막아준 수혁은 그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 그랬어?”
데이모스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수혁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를 터였다.
때문에 수혁이 알 수 있는 사실은 단 하나였다.
“네 멋대로 날뛰더라도, 선은 넘지 말았어야지.”
그가 수혁의 소중한 이들을 건드렸다는 것.
만약 네펠리아노가 연관되지 않았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그에게 상처 입지 않았다면 데이모스는 지금처럼 절망할 일이 없었을 터였다.
“으아아-!”
절규는 조금씩 비명을 넘어 흐느끼는 울음소리로 바뀌어갔다.
“내가…… 내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다. 어떻게 연명한 삶인데…… 되갚아야 할 삶인데!”
비탄悲鳴을 토한 데이모스의 붉은 머리카락에 또다시 불꽃이 튀기며 흑염이 일어났다.
아니, 흑염인 줄로만 알았다.
검은 불꽃은 곧 새하얗게 타오르는 백염白炎이 되어 커다랗게 덩치를 키웠다.
머리카락을 집어삼키고, 머리를 휘감더니, 이내 데이모스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 모습을 본 수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염은 흑염과는 또 달랐다.
‘스스로를 태워서 화염을 키웠군.’
이전까지 데이모스는 분명 화염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 백염은 달랐다.
불꽃에 오히려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으허허허-!”
실성한 광인처럼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 데이모스의 육체가 지면을 박차며 수혁을 향해 쏘아졌다.
자신을 태워 만든 백염의 힘이 일순간이지만 격의 무게조차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소용없어.”
그래봐야, 수혁에게 닿기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번쩍이는 완성기의 호신강기가 백염과 부딪치며 천지사방을 흔들어 댔다.
하나 결국 호신강기를 뚫지 못한 채 발악하는 백염의 폭주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수혁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아쉽군.’
말했듯 그의 죽음은 네펠리아노가 관활해야만 했다.
한데 스스로 목숨을 불태워 마지막을 내던질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수혁의 옆에 힘겹게 기대어 선 네펠리아노가 타들어가는 백염을 보며 묘한 시선을 흘렸다.
아마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하였지……
또한 이 드넓은 우주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일족이었다.
그 마지막 씨가 타들어가며 죽어가고 있었다.
“리……아-!”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 네펠리아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리까지 막았어야 했나.’
내심 수혁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데이모스.”
힘겹게 입을 연 네펠리아노가 답했다.
“나의…… 소중한…… 딸!”
역시 지금이라도 소리를 막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수혁이 기운을 일으키기도 전이었다.
“당신은 내게 조금도 소중하지 않았어.”
차가운 표정을 한 네펠리아노가, 굳은 시선으로 타들어가는 백염 너머를 바라보았다.
“제발 이만 사라져. 당신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일족 따위도 지긋지긋해. 그대로 사라져서, 다시는 보이지 말아줘.”
“리……아……
“그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
“내…… 소중한…… 딸……
목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완전히 소멸하고 있었다.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백염의 폭주는, 사그라지는 것만 같은 작은 가닥만을 수혁의 완성기 너머로 들여보냈을 뿐이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그 작은 실과도 같은 백염을 보며 수혁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피는…… 무엇보다도…… 진하단다.”
“펠리!”
가닥으로부터 들려온 목소리에 기겁한 수혁이 불꽃을 잡아채기도 전이었다.
네펠리아노의 손끝에 파고든 짧은 백염이 단숨에 그녀의 몸을 집어삼켰다.
화르륵-!
순식간에 다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에 휩싸인 네펠리아노의 몸이 빠른 속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백염을 헤집고, 그녀의 어깨를 잡은 수혁이 완성기를 일으켰다.
“펠리! 빌어먹을!”
방심?
분명 그랬을지도 몰랐다.
데이모스의 격은 수혁보다 아래였다.
그의 원한과 증오 역시 무용했다.
생명을 불태운 백염 또한 완성기를 뛰어넘지 못했다.
하나 혈족血族이란 것을 너무 무시했다.
먼 거리의 짧은 접촉, 몇 마디 대화.
그것만으로 둘의 관계에 링크가 생겨났다.
연결고리가 커다란 화염이 되어 일어난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리아, 이제야말로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으하하-!]
네펠리아의 육체를 빌려 데이모스의 음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꺼져-!”
수혁의 완성기가 그를 몰아내기 위해 거세게 파동을 일으켰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수혁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갈 뿐이었다.
‘안 돼. 이대로는……!’
수혁의 직감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위험하다.
아주 위험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동시에, 네펠리아노에게서 흘러 나온 보랏빛 기운이 수혁의 완성기를 강하게 밀쳐냈다.
광-!
폭음과 함께 밀려난 수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완성기가……
흩어졌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보랏빛 기운의 불길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다행인지, 그런 불길함은 비단 수혁의 영역만이 아닌 듯했다.
[이, 이게 무슨……!]
네펠리아노의 육체에 접신接神한 데이모스의 음성에 당황과 함께 경악이 어렸다.
[네, 네놈들은 뭐냐! 물러가라!
이건 나와 딸아이의…… 으어아-!]
경악과 비명이 공존하는 경계속으히히히-!
마치 귀신들의 웃음과 같은 소름돋는 음성이 주변으로 흘러나왔다.
보랏빛 기운은 점점 더 강렬해지며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안 돼.’
수혁은 그 기운에 맞서며 완성기를 일으켰다.
완성기가 아니면 애초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
강력한 기파의 충돌 속, 데이모스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렇구나…… 이것이 공허……!]
쿠구구구-!
기운의 발산만으로 세계의 기반인 지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풍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수혁은 그 복잡한 세계선을 쉴새 없이 가로지르며 네펠리아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끝이 힘겹게나마 네펠리아노의 어깨에 다시 맞닿는 순간이었다.
[안 돼……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으아아악-!]
파앗-!
데이모스의 긴 비명과 함께 거짓말처럼 보랏빛 기운이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거꾸로 뒤집히고 무너지던 세계가 곧장 제자리를 되찾았다.
으히히히-!
섬뜩한 웃음소리는 그 뒤를 한참이나 따르는 듯했으나, 곧 종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수혁이 느끼던 기묘한 불안감 역시 모두 사라졌다.
눈이 풀린 네펠리아노는 힘없이 수혁의 품에 안겨 들었다.
“펠리……!”
놀란 수혁이 그녀의 몸을 받아들며 다시 상세를 살폈다.
‘문제는…… 없는 건가?’
그렇다고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펠리아노의 육체에 깃든 데이 모스의 격과 힘이 그녀를 연신 뒤 흔들고 있었다.
영혼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은 탓이었다.
‘공허…… 그건 대체 뭐였지?’
의문은 잠시일 뿐.
수혁은 날뛰는 데이모스의 흔적을 진정시키기 위해 네펠리아노를 바닥에 눕혔다.
이후 그녀의 혈맥에 손을 얹고는 완성기를 흘렸다.
빠른 속도로 네펠리아노의 내부에서 폭주하던 기운들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됐어.’
위험한 구간은 모두 넘겼다.
안도한 수혁이 손을 떼자 네펠리 아노의 육체를 흑백의 빛이 동시에 휘감았다.
기운을 휘감은 네펠리아노의 육체가 껍질을 벗겨내듯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근육이 뒤틀리고 뼈가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수혁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환골탈태!’
인간이 아닌, 용족, 그중에서도 제일이라는 고대통이 더 강력한 육체를 얻기 위해 탈바꿈하고 있었다.
쿠구구궁-!
우주가 다시 한 번 찬란한 빛을 터트리며 진동했다.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연이어 3 번째.
새로운 대신의 탄생이었다.
현대의 지구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고전 중국 양식의 2층짜리 허름한 식당 건물.
미풍에도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간판에는 상호명을 뜻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와룡객점臥龍客店.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며, 손님 하나 잘 들지 않을 것 같은 으스스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음식 솜씨가 퍽 훌륭하다 하여 인근마을에 들르는 사람들은 꼭 찾는다는 지역 명물과 다름없는 객점의 문 앞에 선 중년 사내 둘이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장기휴무長期休務라고?”
“이런…… 와룡객점의 음식을 먹고자 먼 곳에서부터 찾아왔는 데……
안타까움에 탄식을 토한 사내들이었지만, 음식점이 쉰다는데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그들은 한참이나 미련을 못 버리고 와룡객점의 간판을 보다가 등을 돌려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객점 내부.
손님 하나 없는 그 고요한 건물 안에서 누가 보아도 잘생겼다고 말할 법한 두 사내가 인근 지역 내에서도 지독하기로 유명한 화주火酒를 놓아둔 채 말 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손을 먼저 멈춘 쪽은 꽤나 곱상하게 생긴 사내 측이었다.
반대편에 앉은, 다소 사내답게 생긴 이의 손길 역시 그 뒤를 따라 곧장 멈추었다.
“놀랍군……
입을 먼저 연 이는 사내답게 생긴 인물 측이었다.
나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50대쯤.
하나 실제로는 수천 년 이상을 살아온 존재였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마신?”
반대편에 앉은 곱상한 사내의 말에, 마신이라 불린 인물의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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