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윌렌 황제의 몰락(Ⅰ)
면담이 끝나고 슈미트 공작이 나가자 라온은 크림슨 후작, 멕베인 후작과 함께 회의를 시작했다.
“두 분 후작과 미리 슈미트 공작에 대한 제안을 상의하지 못했다. 서운하게 생각한다면 미안하네.”
라온의 말이 끝나자 멕베인 후작이 먼저 대답했다.
“전하, 아닙니다.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휴신 황제 측에서도 반기리라 여깁니다.”
“크림슨 후작,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네, 좋은 제안이긴 합니다. 다만, 슈미트 공작을 따르던 귀족들이 문제가 될 거 같습니다. 그들로선 영지를 모두 버리고 라트시아 왕국 땅으로 가야 하는데 그걸 받아들일까요? 그리고 윌렌 황제를 버리기로 작정했다면, 저희는 배제시키고 바로 휴신 황제와 손을 잡을 겁니다. 휴신 황제 측도 저희가 끼어드는 걸 좋아하진 않겠죠.”
“좋아하진 않겠지만 차려 놓은 밥상에서 제외하기도 힘들 텐데? 안 그런가? 그리고 휴신 황제가 나중에 어떻게 보복할지 모르니 두려움에 손잡기 싫은 귀족들도 있을 것이다.”
라온의 지적에 크림슨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습니다.”
“귀족들은 슈미트 공작의 거취에 따라 아마 크게 흔들릴 것이다.”
“혹시나 슈미트 공작이 윌렌 황제를 제거하고 휴신 황제에게 붙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크림슨 후작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워낙 거물이라 휴신 황제가 그에 맞는 제안을 해야 할 텐데. 휴신 황제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 슈미트 공작을 받아들일까?”
“하긴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워낙 거물이라 부담스러워하겠죠. 하지만 만약 휴신 황제가 슈미트 공작을 받아들이고 갈메시아 제국이 다시 하나가 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
“휴신 황제가 제국 내부의 혼란스런 상황을 종식시키고자 북쪽의 세 왕국들과 연합하여 저희 마케니안 왕국에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일부러 전쟁을 벌인다?’
크림슨 후작의 지적을 들은 라온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휴신 황제로서는 껄끄러운 존재들을 전쟁에 앞장세워 자연스럽게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 마케니안 왕국과의 전쟁을 통해 갈메시아 제국의 위신을 세우려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납득하기 힘든 것은 최근 마케니안 왕국의 급격한 성장이었다.
“우리가 보유한 타이탄이 300기가 넘는다. 저들이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전쟁을 걸어올까?”
“그럴 수 있습니다. 아르니아 왕국에서의 전투와 갈메시아 제국을 상대로 하는 전투는 양상이 많이 다릅니다.”
“어떻게 말이오?”
“갈메시아 제국은 땅이 넓습니다. 그러니 전투 지역이 넓게 퍼지게 되죠. 게다가 그들은 자기들 안방에서 싸우는 거라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게 됩니다. 마법사들도 많아 포탈을 이용한 전술 구사도 쉽구요. 타이탄 라이더들의 실력도 평균적으로 보면 갈메시아 제국이 훨씬 앞서고 있습니다. 저희로선 국왕 전하를 제외하곤 다들 변변치 못한 실력을 가졌습니다. 혹시나 전하께서 위험에 빠지시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크림슨 후작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라온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슈미트 공작이 휴신 황제와 손잡기는 힘들 거야. 잡을 수 있었으면 벌써 잡았을 것이다. 차라리 라트시아 땅에서 왕이 되는 게 마음 편하겠지. 어쨌든 선택은 그에게 있다. 내 말을 따르든, 아니면 후작 말처럼 휴신 황제에게 붙든 결정이 나겠지. 갈메시아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면 각오를 해야 한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온은 앞으로 닥칠 어떤 문제든 피할 생각이 없었다.
잠깐 말을 멈췄던 라온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보다 두 후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전하.”
두 사람은 무슨 말일까 기대하며 라온을 쳐다보았다.
“아르니아 왕국 땅에 있는 평민 소작농들에게 귀족들의 땅을 나눠줄 생각이다.”
라온은 필로 자작에게 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당장 두 사람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크림슨 후작이 먼저 질문하고 나섰다.
“그럼 영주는 누굴 세우시게요?”
“영주는 없다. 관료를 세울 생각이다. 앞으로는 지방 통치를 위해 영주제를 폐지하고 관료제를 실시할 예정이다. 귀족이 가진 영지는 모두 국가가 환수하고, 그들은 명예직으로 남기며 일부 땅과 노예를 하사할 생각이다.”
“혹시 마케니안 왕국도 동일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크림슨 후작은 라온의 의도가 아르니아 왕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라온은 잠시 두 사람을 쳐다본 후에 대답했다.
“그렇네. 난 오래전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서 귀족제 대신에 관료제를 생각해왔네. 마음 같아서는 노예제도까지 한꺼번에 개혁해서 폐지해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신분제도가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지. 기존의 마케니안 왕국과 아르니아 왕국 땅에 있는 노예들을 모두 해방하여 자영농으로 삼고, 아르니아 왕국 땅에서 얻은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귀족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네. 귀족의 직위에 따라 하사하는 땅의 크기도 넓게 할 생각이야.”
“그래도… 영지보다는 턱없이 작아지겠죠. 그리고 귀족이 영지군을 가지도록 허락하지도 않으실 거구요.”
이번에는 멕베인 후작이 질문했다.
묻고 있는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렇지. 관리 밑에 영지군을 둘 생각이야. 단, 귀족들에게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한 사병을 제한적으로 허락할 생각이다.”
“…….”
라온의 말에 두 후작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마케니안 왕국을 위해 몸 바치려는 두 후작이지만, 뿌리 깊은 귀족제를 바꾸겠다는 라온의 말에는 쉽게 동조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던 두 후작 중에서 크림슨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아마 많은 귀족들이 반대할 것입니다. 굳이 지금 개혁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솔직히 저도 인정하기 힘듭니다. 귀족이란 직위는 그냥 얻은 게 아닙니다. 왕국이 세워질 때 몸 바쳐 함께 싸워 얻은 것입니다.”
“크림슨 후작, 신분제는 유능한 인재가 발굴되는 것을 막아. 그리고 소작농이나 노예들은 하루하루 적당하게 살지. 귀족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게 아니야. 가진 것을 줄이라는 거지. 귀족이 가진 것을 줄이면 왕국 내에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생긴다.”
“지금 마케니안 왕국의 귀족들은 아르니아 왕국을 정복했으니 누가 어떤 영지를 차지할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리제라니…….”
“그것도 문제다. 귀족들이 한 것이 무엇이라고 귀족입네 하고 영지를 바라는 것인가?”
“…….”
라온의 질문에 두 후작은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왕성의 잡무를 처리하는 일을 위해 관리들을 뽑아왔으나, 앞으로는 체계적인 관리 조직을 만들겠다. 두 후작은 재상직을 맡아주게. 멕베인 후작은 왕국의 기사단과 군대을 통솔하는 좌재상을 맡고, 크림슨 후작은 왕국의 재무와 지방 관리를 통솔하는 우재상을 맡아주게.”
“언제부터 관리제로 바꾸실 생각이십니까?”
“아르니아 왕국 일이 정리되면 바로 시행할 생각이네.”
라온은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슈미트 공작은 라온과 둘만의 면담을 요청했다.
“밤새 고민했습니다. 애초에 윌렌 황제의 계획에 동참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많이 들더군요. 라트시아 왕국을 확실히 넘겨주겠다면 제안에 동의합니다.”
공작의 입에서 동의라는 말이 나오자 라온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뭐가 문제가 되나?”
“왕실 기사단입니다. 이들은 윌렌 황제를 따르는 자들로 모두 173명입니다. 각각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지요. 나와 함께하는 귀족들은 92기의 타이탄을 가지고 있으나, 왕실 기사단에 비해 실력이나 보유한 타이탄 기수로도 밀리는 형편입니다.”
“윌렌 황제가 죽는다면 이들은 구심점이 없어질 텐데 그래도 걱정인가?”
“휴신 황제로서는 윌렌 황제를 따르던 자들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저를 따를지도 미지수라…….”
슈미트 공작은 자신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공작은 일단 윌렌 황제만 처치하고 뒤로 빠져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휴신 황제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 전에 제가 라트시아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면 마케니안 왕국과 갈메시아 제국에서 불가침 약정을 해주셔야 합니다.”
‘흥! 그렇겠지. 그냥 끝날 리가 없지.’
라온은 슈미트 공작이 당연히 이것을 요구해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네?”
“언제까지 불가침인지 기간을 정해라. 30년? 50년?”
“못해도 300년입니다. 그 정도는 지켜 주셔야 저와 후손들이 안정되게 살 수 있습니다.”
“하하! 300년이라. 무척 길군. 좋다! 마케니안 왕국은 그 약속을 지키겠다. 윌렌 황제 측에도 받아내도록 해보지. 하지만, 조건이 있다.”
라온이 조건이라는 말을 하자 슈미트 공작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어떤……?”
“다른 왕국 일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 마케니안 왕국이나 갈메시아 제국, 심지어 대륙의 다른 왕국 일에도 중립을 지켜라.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바로 공격하겠다.”
“알겠습니다. 그 대신 전하가 작성한 친필 문서를 원합니다. 휴신 황제가 친필로 작성한 문서도 마찬가지구요. 내용은 라트시아 왕국 땅을 주겠다는 것과 함께 불가침, 그리고 어느 한쪽이든 약속을 어기고 라트시아를 침범하면 다른 쪽에서 막아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걸 받고 나서 일을 착수하겠습니다.”
“알았다. 곧바로 친필로 문서를 써주겠다. 그런데 휴신 황제 측의 친필 문서는 어떻게 받을 셈이지? 내통을 위해서 비밀리에 왕래할 수 있는 포탈 마법진이 있어야 한다.”
“제가 좌표를 남기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휴신 측의 확답을 받아 친필 문서를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요구 사항이 있습니다.”
“뭔가?”
“갈멘 수도를 전하가 점령해주십시오.”
“응? 무슨 소린가?”
“휴신 황제는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그가 수도를 점령한다면 약속을 어길 수 있습니다. 전하가 먼저 갈멘 수도를 점령하면 좋겠습니다.”
“갈멘 수도를 점령하려면 필연적으로 큰 전투가 벌어진다. 마케니안 왕국이 홀로 큰 피해를 입을 수는 없다.”
“그럼 휴신 황제와 같이 진격해오기 바랍니다. 윌렌 황제의 암살 시기는 미리 통보하겠습니다. 이동하실 포탈 마법진의 좌표도요.”
“알았다.”
라온은 슈미트 공작에게 약속을 해주었고, 둘 사이의 비밀 면담은 끝이 났다.
면담 후에 라온은 곧장 슈미트 공작이 원하는 내용을 담은 친필 문서를 써서 전달해주었다.
* * *
마케니안 왕국에서 돌아온 슈미트 공작은 윌렌 황제에게 소드마스터 시신을 휴신 황제 측에 보낸다는 라온의 말과 함께, 아무래도 라온이 휴신 황제 측과 손을 잡을 것 같다는 보고를 했다.
윌렌은 보고를 듣자 안절부절못하면서 북쪽의 세 왕국에 연락해 지원군을 보낼 것을 명령했다.
한편, 휴신 황제 측은 마케니안 왕국에서 보내온 소드마스터 시신을 받고 무척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이들은 시신의 정체가 사이드 백작임을 알아냈다.
휴신 황제는 라온에게 특별 서신을 보내 힘을 합쳐 준다면 옛 박트니아 왕국 땅을 돌려주겠다는 서약을 해왔다. 또한 슈미트 공작에게 보낼 친필 서신도 보내왔다.
친필 서신은 곧 마케니안에서 파견된 비밀 특사에 의해 슈미트 공작이 알려 준 포탈 마법진을 통해 공작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그동안 둘로 나뉘어 정체 상태에 있던 갈메시아 제국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저택에 돌아온 슈미트 공작은 자신의 심복인 암흑 마법사 첸틀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나으리.”
“그래, 첸틀러, 자네와 상의할 일이 있다.”
“네, 말씀하십시오.”
슈미트 공작은 첸틀러에게 마케니안 왕국에서의 일을 설명하며, 라온과 휴신 황제 측에서 받은 친필 서신까지 보여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첸틀러는 얼굴을 찡그리며 끄응 하고 신음성을 냈다.
“윌렌 황제를 버려야 하는군요. 제국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는데… 휴신을 함께 독살하지 못한 것이 아깝군요.”
“갈메시아 제국은 이미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윌렌 황제는 확실히 밀리고 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 예전 같은 권세를 누리지는 못하겠지만, 라트시아 왕국의 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왕이 되면 너는 바로 공작에 임명하겠다.”
“제가 원하는 것은 마탑입니다. 그리고 대륙에 퍼져 있는 암흑 마법사들을 모으길 원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저희는 모든 왕국에서 핍박을 받아 지하로 숨어야 했습니다.”
첸틀러는 자신이 염원하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처음 슈미트 공작과 손을 잡을 때부터 그가 원하던 것이었다.
암흑 마법은 사악한 악마의 기운을 이용한 마법이었으며, 대륙에 왕국이 생겨나기 전에 악독한 암흑 마법사들이 미개한 인간들을 잔혹하게 다스렸던 과거가 있어 모든 왕국에서 암흑 마법사는 처형 대상이었다.
“그래! 자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조금만 참아라.”
슈미트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첸틀러를 다독였다. 그로선 첸틀러가 가장 훌륭한 심복이었다.
“윌렌 황제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독살하실 건가요?”
“응? 글쎄다. 내 생각에는 말이다…….”
슈미트 공작은 첸틀러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 얘기를 듣던 첸틀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도 좋군요. 마법도 연구할 겸. 하하!”
“그래, 연구 재료로 훌륭할 것이다. 하하!”
슈미트 공작은 첸틀러와 함께 음흉하게 웃어댔다.
* * *
마케니안 왕국의 수도 마케스.
라온이 없는 왕성에 멕베인 후작과 크림슨 후작이 다리오 상왕을 찾아 알현했다.
국왕의 직위를 아들인 라온에게 물려준 다리오 상왕은 다빈 왕자와 함께 소일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었다.
“오~ 멕베인 후작과 크림슨 후작, 오랜만이군. 아르니아 왕국 문제로 바쁠 텐데 어떻게 찾아왔나?”
반기는 다리오 상왕과 달리 멕베인 후작과 크림슨 후작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둘은 먼저 격식에 따라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아르니아 왕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다리오 상왕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상왕의 질문이 끝나자 크림슨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왕 전하, 오늘 저희 두 사람이 전하를 찾아뵌 것은 마케니안 왕국에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입니다.”
이미 두 사람의 심각한 표정에서 예삿일이 아니라 느낀 상왕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지금 라온 전하께서는 귀족제 대신에 관료제를 만드시겠다고 합니다.”
“관료제?”
“네. 귀족을 명예직으로 만들어 뒷전에 두고, 영지를 뺏어 전하께서 임명하신 관리에게 나눠주시겠다고 합니다. 또 노예도 해방하고, 소작농들도 아르니아 왕국에 보내 땅을 나눠주어 자영농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후작의 얘기를 듣는 다리오 상왕은 라온이 걱정되었다.
“전반적으로 왕국에 큰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귀족들은 반발할 테구요. 저희 두 사람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어 상왕 전하를 찾았습니다.”
크림슨 후작의 말을 들은 다리오 상왕은 얼굴이 굳어졌다.
“흐음… 그렇군, 그래.”
다리오 상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그래’를 반복했다. 사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관료제를 실시하면 라온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상황 전하! 귀족들이 병권이 없어 약하긴 하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것들이 있습니다. 병사들만 믿고 밀어붙이시면 솔직히 어떻게 될지…….”
크림슨 후작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흐음, 라온이 힘든 개혁을 하려고 하는구나. 라온을 만나고 싶은데 아르니아 왕국에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이번 달 말까지 거기 계시면서 남아 있는 반항 세력들을 소탕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서신을 보내야겠구나.”
다리오 상왕은 두 사람을 내보내고 홀로 라온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다음 날.
라온은 아침 일찍 다리오 왕이 보낸 서신을 받게 되었다.
<내 아들 라온아.
멕베인 후작과 크림슨 후작에게서 니가 아르니아 왕국 점령을 잘 수행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슈미트 공작의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다.
대륙의 최약소국이었던 마케니안 왕국에 있어서 지금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한 적은 건국 이래 처음이다. 모든 것이 너의 탁월한 능력임을 모든 백성과 귀족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두 후작을 통해 새로운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네가 귀족제 대신에 관료제를 택하겠다는 것 말이다.
관료제라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몇백 년 전에 나타난 이상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왕국에서 하나같이 불온 세력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일부 왕국의 왕이 관료제를 시행하려고 시도했다가 귀족들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지.
너도 알다시피 멕베인 후작과 크림슨 후작은 마케니안 왕국의 큰 두 기둥이다.
두 사람의 걱정은 크게 반발할 귀족들 때문이다. 비록 니가 왕실 기사단과 자유 기사단을 장악하여 누구도 반역할 수 없는 병권을 가졌다고 하나, 귀족 세력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귀족의 체계를 바꾸겠다는 것은 다른 왕국으로 하여금 마케니안 왕국을 침범할 명분을 만들어준다.
귀족이란 계급을 적으로 돌리면 왕국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치기 때문이다.
설사 니가 개혁을 한다고 할지라도, 갈메시아 제국에게서 옛 박트니아 왕국 땅을 돌려받고 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아니, 몇 년을 더 참아 확실한 왕권을 세운 후에 시행해도 늦지 않다.
너는 지혜로운 아들이니 아비의 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아들었으리라 본다.
마지막으로… 아르니아 왕국 땅에는 임시적으로 관리를 임명하도록 해라. 단, 마케니안 왕국의 귀족들이 그 땅의 영주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잘 조치해라.
시간을 끌며 네가 목적한 바를 이루어야 한다. 시간은 많다! 니가 갈메시아 제국에서 4년을 버티며 참은 것같이 말이다.
니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면 두 후작을 불러 안심시키도록 해라.>
서신을 모두 읽은 라온은 다리오 상왕의 노련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갈메시아 제국에서도 꿋꿋이 버텼다. 관료제 시행은 잠시 시간을 두자.’
라온은 결심을 한 후 두 후작을 불러 상왕의 뜻과 같이 관료제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두 후작은 라온의 결정을 크게 반기며 기뻐했다.
* * *
융 사막의 제롬 부족 거주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바위산 포탈 마법진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라온.
아르니아 왕국에 잔존하는 저항 세력을 제거하는 중이라 하루하루가 바쁜 라온은 시간을 내어 이곳을 방문했다.
‘그나마 아르니아 왕국 땅에 있으니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이곳에 왔다. 마케니안 왕국에 있었으면 하루만 자리를 비우려 해도 멕베인 후작과 크림슨 후작이 난리 칠 텐데.’
제롬 부족의 거주지를 찾아가는 그는 마음이 심란했다.
무엇보다 플로랑스에게 전쟁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가장 난감했다.
이제 그녀는 돌아갈 왕국이 없어진 셈이었다.
그녀에게 당당히 청혼하겠다는 것도 모두 무산되었다.
‘차라리 해적 소탕을 하고 나서 바로 청혼할걸……. 거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크히, 크로노스.”
아공간에서 크로노스를 불러내 착용한 라온은 사막을 나는 듯 달려 제롬 부족의 거주지로 달려갔다.
얼마 후, 도착한 거주지는 전보다 규모가 2분의 1 정도로 줄어든 모습이었다. 절반이 쥬덴 영지를 찾아 떠났기 때문이었다.
라온은 거주지 가까이에서 크로노스를 탈착해 아공간에 대기시킨 후에 살렘의 천막부터 찾았다.
살렘이 남아 있는 자들의 대표자였으며, 플로랑스를 돌봐주고 있기에 그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예의였다.
살렘은 갑작스런 라온의 방문에 잠깐 놀랐지만 악수로 인사를 나눴고, 라온은 그와 짧게 얘기를 나눈 후에 플로랑스가 머무는 천막을 찾았다.
천막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한 라온은 플로랑스를 불렀다.
“플로랑스? 플로랑스?”
낮이라 뜨거운 해를 피해 천막 안에서 쉬고 있던 플로랑스는 갑작스런 라온의 목소리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열었다.
“오! 라온!”
그녀는 바로 라온의 품에 달려들었다.
따뜻한 그녀의 체온!
라온은 ‘난 마케니안의 왕이다. 아르니아 왕국의 전쟁 선포에 대항해야 했다. 스타베 왕과 사일 왕자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면서 전쟁 중에 꿋꿋하게 버텨 왔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오로지 그녀에 대한 미안함만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어쩌지? 아버지도, 동생도 죽었다는 얘기를 어떻게 한다? 왕국을 내가 뺏었다는 얘기는 또 어떻게 한다지…….’
어떤 것부터 설명할지 너무 난감했다.
한참이나 라온을 껴안고 있던 플로랑스가 드디어 그의 품에서 떨어지며 라온을 쳐다보았다.
“언제 갈 거야? 내일까지는 있을 수 있지?”
그녀의 첫마디에는 라온과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응! 그럼.”
오늘 안으로 돌아가려 했던 라온은 플로랑스의 말에 금세 무너져 버렸다.
“이리 앉아, 라온. 그리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해줘. 아르니아 왕국은 지금 어때? 내가 사라지고 나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모두 얘기해줘.”
“어? 글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라온은 망설이며 스타베 왕 사건부터 얘기를 시작했다.
먼저 자신이 국왕에 오른 것과 축하 행사에 참석한 스타베 왕 얘기를 꺼낼 때만 해도 플로랑스는 너무나 기뻐하며 좋아했다. 그러나 드디어 본 와이번이 출현한 얘기에 접어들자 얼굴이 굳어지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라온은 이 대목에서 스타베 왕의 죽음을 숨길까 고심했다. 하지만 그녀도 알 권리가 있다고 느끼고서 어렵게 왕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 순간에 갑작스럽게 본 와이번이 출현해서 브레스를 뿜었는데… 그만 스타베 왕께서…….”
“어머, 그래서… 그래서!”
“즉사를…….”
“헛!”
플로랑스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라온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흑흑, 흑흑흑, 아아아~ 아아아!”
한참을 울던 플로랑스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럼 지금 사일이 왕위에 올랐어? 걔는 나이가 어려서 힘들 텐데. 어떻게 됐어?”
“파가 둘로 나뉘었어. 사일 왕자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려는 레더스 백작과 이를 반대하는 쪽으로 말이야.”
“그래서?”
“그런데… 아르니아 왕국의 혼란 때문인지…….”
“무슨 일인데. 말해줘!”
플로랑스가 라온에게 매달렸다.
“아르니아가 마케니안에게 전쟁을 선언했어.”
“허엇!”
털석!
플로랑스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아? 플로랑스!”
라온은 즉시 그녀를 붙잡고 안위를 살폈다.
그녀는 멍한 눈이 되어 라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됐어? 전쟁이… 일어난 거야?”
“플로랑스… 난 마케니안 왕국의 왕으로서 전쟁을 선언한 아르니아 왕국이 침략해오도록 지켜볼 수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기사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수도 디죵으로 갔지. 그래서…….”
“말해. 멈추지 말고 말해줘!”
플로랑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흐음… 수도에는 갈메시아 제국에서 보내온 소드마스터가 있었어. 그자랑 겨루느라 힘들었지. 하지만 결국 이겼어. 그리고 수도 디죵도 우리가 점령했어.”
“사일은? 내 동생 사일은?”
플로랑스는 거칠게 라온을 붙잡고 흔들었다.
“미안해. 내가 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어.”
쿵!
플로랑스는 라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플로랑스!”
라온이 크게 놀라 그녀를 붙잡고 흔들었다.
늦은 저녁.
제롬 부족의 족장 살렘은 특별히 연회를 열려고 했으나, 라온이 쓰러져 누운 플로랑스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살렘은 직접 찾아와 플로랑스의 모습을 보고 라온을 위로한 후에 식사를 직접 천막에 가져다주도록 지시했다.
천막 안에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으나 라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플로랑스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누워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못했어. 그냥 속일걸. 휴우~’
라온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때, 세미한 플로랑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라온?”
“어! 플로랑스!”
라온은 즉시 그녀의 부름에 대답했다.
“나 말이야, 부탁이 있어.”
“뭔데? 말해.”
“당분간 그냥 여기 있을게. 제롬 부족이랑.”
“그래, 그렇게 해.”
사실 라온도 그녀를 데려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리고? 말해, 플로랑스.”
“라온이 가진 타이탄 말이야. 작은 거.”
“어. 크로노스?”
“그래. 그거 나한테 줘. 나도 마나를 다룰 수 있어.”
“응? 크로노스를?”
라온은 플로랑스가 의외의 부탁을 해 와서 약간 놀랐다.
“싫어?”
“아니야. 줄게.”
“몸을 보호하려고 그래. 덩치 큰 타이탄은 불편해서.”
“그래, 알았어. 당장 줄게. 아크히, 크로노스!”
라온은 즉시 크로노스를 불러내고는 말했다.
“크로노스, 너와의 계약을 해지한다.”
(해지? 정말인가?)
크로노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시 물어왔다. 그에 라온은 담담히 다시 말했다.
“크로노스, 계약을 해지한다.”
(알았다. 크로노스는 라온과 계약을 해지한다.)
크로노스는 라온과 계약이 해지되자 바로 고개를 숙이며 잠잠해졌다.
“플로랑스, 계약을 해지했어.”
“날… 날 좀 일으켜 줘.”
플로랑스는 억지로 일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라온은 그녀를 부축해 크로노스 가까이 데려갔다.
크로노스는 그녀가 다가오자 즉시 반응했다.
(내 이름은 크로노스! 그대의 이름은?)
“플로랑스.”
(플로랑스! 그대는 크로노스와 주종의 계약에 승낙하는가?)
“승낙한다.”
(플로랑스와 크로노스 간에 주종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이제부터 크로노스는 플로랑스의 명을 따른다.)
“착용!”
플로랑스의 외침에 크로노스가 그녀의 몸 위에 입혀졌다.
휘청!
기운이 달리는 플로랑스가 크로노스를 입은 채로 쓰러지려 하자 라온이 얼른 부축해주었다.
“플로랑스, 지금은 무리야. 나중에 다시 입어.”
“알았어.”
플로랑스는 라온의 말에 크로노스를 탈착해 아공간에 보냈다. 그러더니 라온을 바라보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온?”
“왜?”
“나 말이야… 나…….”
그녀는 목구멍까지 네 아기를 가졌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라온은 자기 왕국을 무너뜨린 적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아버지와 동생도 라온과 얽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녀로선 도저히 아기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휴우~ 라온… 나 혼자 있을게. 그만 돌아가.”
“아니야. 같이 있을게.”
“싫어. 혼자 있고 싶어. 그리고… 당분간 찾아오지 말아줘.”
쿵!
라온의 가슴이 바닥까지 떨어져 내리는 심정이었다.
‘찾아오지 말아줘. 찾아오지 말아줘. 찾아오지 말아줘. 찾아오지 말아줘…….’
몇 번이나 그녀의 마지막 말이 라온의 머리를 울렸다.
“나 쉴래. 이제 가, 라온.”
플로랑스는 바닥에 누워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미… 미안해.”
천막을 나온 라온은 바위산의 포탈 마법진을 향해 내달렸다.
‘라온… 안녕. 흑흑!’
플로랑스는 고개를 돌린 채로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은 평생 다시는 라온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