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나는 사기를 당한 건가?’
설마 사기겠어. 가람은 우울한 얼굴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침대 위에 다이빙하듯 뛰어들었다. 매끈한 푸른빛 보석이 쇄골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괜히 분한 마음에 목걸이를 꽉 쥐었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오늘의 스킬 ? 노래☆ : 노래를 아주 잘 부를 수 있게 된다. 작은 새나 소동물들이 당신의 노래에 이끌려 다가와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추가 뽑기권 사용 가능]
믿지도 않는 신을 부르며 뽑기를 돌렸지만 가람의 스킬은 별 반 개, 그것도 정말 쓸모없어 보이는 ‘노래’로 결정됐다. 벙찐 얼굴로 휴대폰을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 충동적으로 추가 뽑기권을 쓸 뻔 했지만, 지금 당장 스킬이 필요한 건 아니라서 꾹 참았다.
도마뱀 택시가 생각보다 속도가 빨라서 여유가 생긴 까닭에, 가람은 샨도라 강에 도착하기 전 큰 도시에 들러 가구를 이것저것 구매했다. 침대와 서랍장, 화장대, 책장이 붙어 있는 책상, 문을 열면 거울이 붙어 있는 옷장, 간단한 티 테이블과 의자를 먼저 구매하고 바닥에 깔 카펫과 침대 커버 및 토퍼, 이불도 샀다. 돈이 워낙 많으니까 돌아다니며 고민 없이 마음에 드는 건 모두 살 수 있었는데, 미믹 안의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환불한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가람은 가정용 미니 와인 바를 설치하려다 포기했을 때가 가장 아쉬웠다.
가람은 근력 강화제를 마셨기 때문에 티 테이블 정도는 스스로 옮길 수 있었지만 도저히 혼자서 퀸 사이즈 침대와 책상 같은 커다란 가구를 옮길 수가 없어 가구점의 도움을 받았다.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믹에 대해 공개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구점에선 통 큰 손님을 위해 특별히 가구를 옮길 수 있는 일꾼 둘을 빌려 주었고, 그들은 가람이 미믹 뚜껑을 열고 가구의 다리를 걸쳐 쏙 빨려 들어가듯 집어넣는 걸 보며 ‘굉장히 신기한 열매를 먹었다’며 감탄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두 명의 남자는 가람의 지시에 따라 가구를 배치했다. 되는대로 구매한 가구들이라 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다음에 더 느긋하게 싹 갈아치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구색만 맞추었다. 가람의 최하급 미믹은 꿈에 그리던 휴대용 자취방이 되어 있었다.
도시를 떠나 샨도라 강에 도착해서 그곳에 아직 남아 있는 고잉 메리 호를 발견한 가람은 냉큼 최하급 미믹 에그를 꺼내 그 안에 들어갔다. 배가 정박해 있는 강변에 초라한 나무 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가람은 원피스의 모든 개요와 시간적 흐름을 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특정 에피소드의 특정 내용들에 대해선 꽤 자신 있었다. 특히 그녀가 눈물을 뽑아냈던 장면들이 그랬다. 알라바스타 편에선 왕녀 비비가 확성기를 들고 외치는 컷과 다음 컷에서 루피 친구들이 팔의 붕대를 풀고 들어 올리는 장면이었다. 비비의 연설을 다 외울 정돈 아니어도 그들이 12시 정각에 배를 잠깐 댄다고 약속했던 거나 비비가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으니까!’라고 외친 부분은 정확히 기억했다.
밀짚모자 일행은 해군에게 쫓기고 있었으니 그 근방에서 기다릴 여유가 없다. 12시 정각이란 건 항해사 나미가 계산했을 때, 그들이 샨도라 강으로 향하고 거기서 항구까지 가 비비를 픽업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일 거다. 그래서 가람은 전날 호텔에서 샨도라 강까지 걸리는 시간과 샨도라 강에서 남쪽 항구까지 수로를 이용한 시간 등을 물었다. 이제 곧 애들이 배를 찾으러 올 거야. 그녀가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휴대폰을 켰다.
가람의 계획은 배를 찾으러 온 밀짚모자 해적단이 미믹을 발견하고 보물 상자인 줄 알고 가져다 배에 싣고 나면 나중에 로빈이랑 같이 ‘짜잔! 밀항자였습니다!’ 하며 나타나는 거였다. 물론 지극히 평범한 상식인은 이 계획이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다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가람은 계획대로 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밀짚모자 일행이라면─특히 나미─ 상자를 보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가져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남는 시간 동안 설정이나 좀 만져 봐야지.’
이놈의 게임은 유저에게 상당히 불친절해서 일일이 하나하나 만져봐야 알 수 있는 게 많았다. 스킬 자세히 보기 기능도 무심코 터치했다가 알아낸 기능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까먹기 전에 휴대폰의 잠금을 풀어 놓는 거였다. 저번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빨리 휴대폰을 써야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람은 잠금 없이 드래그만 해도 바로 켜지도록 설정하고 ‘원피스~대 해적시대~ 시뮬레이션!’으로 접속했다. 톱니바퀴 모양 아이콘을 눌러 설정 탭으로 들어가자 언어 설정, 소리 설정, 디스플레이 설정, 푸쉬 알림, 전체 알림 보기 종류가 있었다. 가람은 소리 설정에서 무음으로 바꾸려다가 멈칫했다. 그러다가 꼭 필요할 때 못 보면 어떡하지? 그녀는 소리 설정을 건너뛰었다. 디스플레이 설정에서는 UI 색상, 시스템 글자 크기, 화면의 밝기 조절, 게임 내의 이펙트 간소화 설정이 가능했다. 가람은 가장 먼저 UI 색상을 분홍색으로 바꾸고 이펙트 간소화를 체크했다. 그놈의 폭죽 터지는 이펙트 너무 지겨워.
전체 알림 보기는 말 그대로 여태까지의 알림을 게시판 글처럼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가람은 대충 훑어보다가 푸쉬 설정으로 들어갔다. 여태까지처럼 팝업창만 뜨게 하거나, 팝업이 뜨면서 내용까지 같이 읽을 수 있도록 하거나, 아예 창이 뜨지 않고 소리만 나도록 바꿀 수 있었다. 가람은 냉큼 메시지가 같이 뜨도록 설정을 바꿨다.
휴대폰 시계는 현재 시각 9시 43분을 나타냈다. 호텔 주인한테 듣기로 수도 왕성에서 최단거리로 직진해서 샨도라 강에 도착하는 곳이 이곳인데, 역시 고잉 메리 호가 정박돼 있었고 여기서 남쪽 항구까지 2시간이 조금 덜 걸린다. 지체 없이 12시 정각에 남쪽 항구에 배를 데려면 루피 일행은 아마 시간을 맞춰 곧 이곳에 도착할 게 분명했다.
가람은 휴대폰을 슬쩍 놓고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어젯밤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 잠을 설쳤는데 거기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기까지 해서 졸음이 밀려들었다. 자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을 깜빡이는 게 점차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눈꺼풀이 닫히고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까무룩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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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아, 아?!”
가람은 보들보들한 침대 토퍼에 뺨을 부비적거리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침대 위를 더듬대며 휴대폰을 찾아 쥐자마자 버튼을 눌렀는데, 화면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자는 사이 왔던 푸쉬 알람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여신 포츈의 목걸이’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행운의 여신 포츈은 이 바다의 무법자, 해적들의 손아귀에 잡혀갈 처지의 당신을 측은히 여겨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신의 도움으로 당신은 안전히 해군에 구조되었습니다.]
벙찐 얼굴로 텍스트 문구를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던 가람이 아악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팡팡 내리쳤다. 행운의 여신이라며! 막상 필요할 땐 도움도 안 주더니! 그녀가 씩씩거리며 베개를 침대 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가람의 계획은 밀짚모자 일행이 상자를 발견하고 가져간다는 그 어떤 확신도 없이 너무 무모하고 안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실 그렇게 될 뻔 하기는 했다. 나미는 가람의 예상대로 상자를 발견하자마자 배에 싣길 원했고 루피 또한 아무 생각 없이 좋아했다. 그러나 여신 포츈의 목걸이가 발동함에 따라, 먼저 배에 올라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조로가 느닷없이 수상하다며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고 [위장 Lv.1] 기능으로 텅 빈 상자처럼 보인 미믹은 덩그러니 사막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윽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밀짚모자 일행을 추적하던 해군선에 의해 미믹이 발견되고 그들에 의해 선내로 옮겨졌다. 꿀맛 같은 단잠을 자는 사이 이동해, 가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가람은 허탈한 심정으로 집어 던졌던 베개를 다시 침대 위로 가져와 껴안고 털썩 누웠다. 휴대폰 화면을 밀어 게임 어플로 접속하자, 가람을 기다리던 알림창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띠링! 새 알림이 있습니다.]
[‘사막 왕국 알라바스타’ 지역을 무사히 클리어 하셨습니다. 당신은 ‘사막 왕국 알라바스타’의 무시무시한 음모를 저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클리어 보상이 90% 감소합니다.]
[보상 받기]
클리어 보상이 있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 메인 스토리 기여도와 같이 특정 에피소드의 진행에 도움이 되면 보너스로 주는 것 같았다. 가람이 보상 받기 버튼을 눌러 젬 200개를 수령하자 674개의 젬이 874개로 늘어났다. 90퍼센트가 감소했는데 200개라니, 원랜 2000개라는 뜻이잖아.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녀가 투덜거리며 아무렇게나 휴대폰을 내던지고 기지개를 켰다.
‘미적대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어. 일단 나가 봐야겠다.’
해군이라면 민간인에게 적대적이진 않을 테지만, 실어 나른 상자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여자를 민간인 취급 해줄까에 대해선 조금 회의적이었다. 가람은 방 한구석에 내려와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미믹의 뚜껑을 아주 조금만 열고 그 사이로 바깥을 살펴보자, 그리 어둡지 않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람은 잠깐 더 기다리다가 조용히 뚜껑을 열고 그 안에서 빠져나온 뒤 미믹을 에그로 되돌려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지금 시간이, 어디보자. 가람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오후 2시 34분. 많이도 잤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건자재를 보관하는 창고인 듯, 약간의 먼지가 맴도는 방 안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나 마른 낙엽 냄새 같은 게 가득 차 있었고 저어 위쪽에는 유리 없는 창문을 통해 햇빛이 어스름히 새어 들어왔다. 나무로 된 창살 사이로 빛이 갈라져 창고 안을 밝혔다.
‘대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지?’
줄곧 여기 안에서 버티고만 있을 수도 없고 언젠가는 들통 날 일이니 최대한 빨리 모습을 드러내는 게 덜 수상하고 좋을 것 같지만, 무어라 설명해야 안전하게 해군선 내에서 보호 받을 수 있을지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가람이 아무 상자 위에 걸터앉아서 끙끙거리던 와중,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문 밖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음성은 점점 가까워졌다. 가람은 당황한 얼굴로 상자 뒤로 몸을 구겨넣어 숨었지만 부질 없었다. 문이 열리고 상대가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발견했다.
“누구냐?”
“아, 음, 제가 일부러 숨은 게 아니라…… 어?”
“당신이 여긴 어떻게?”
“만타 씨?”
어정쩡한 자세로 상자를 붙잡고 타조처럼 머리만 숨기기 급급하던 가람은 낯익은 목소리에 머리를 들어올렸다. 머쓱한 표정을 띤 상대의 얼굴은 양 뺨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만타, 만타다. 길거리에서 그녀를 구조해 도움을 주었던 그 젊은 해군.
“무사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동안 틈 날 때마다 가람 씨를 찾아 헤맸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나이스. 어쩌면 별다른 변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가람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