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럭키 투데이-46화 (46/82)

■ 46.

루피의 그림자가 들어간 거대 좀비 ‘오즈’로 인한 충격으로 메인 마스트 저택 뿐 아니라, 저택 부지에 위치한 교회도 멀쩡할 수 없었다. 바다를 떠돌며 비바람에 삭아 있던 교회 외벽이 쩍쩍 갈라졌고 문은 한 쪽이 뜯어져 나갔다. 본래는 종이 매달려 있었을 뾰족한 지붕도 부러진 지 오래였다. 스릴러 바크에 쿵쿵거리며 오즈의 발걸음 소리가 울릴 때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에 진동이 울렸다.

가람은 신경질적으로 빠따를 흔들었다. 가볍게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길쭉한 나무 의자가 부서져 장작더미가 되었다. 투명 인간을 찾아 교회에 도착한 건 좋은데, 당최 그 보이지 않는 놈을 잡아낼 방법이 없었다.

“변태 새끼야!”

“입이 험한 여자군. 내 결혼식을 방해할 셈인가 본데, 난 너처럼 못생기고 막돼먹은 여잔 필요 없다!”

“뭐, 뭐?”

압살롬 녀석의 위치를 알 수 없어서 허공에 대고 빽 소리를 지르니 냉큼 대답이 튀어 나왔는데, 답이랍시고 한 말이 어이가 없다 못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씨발, 쟤 진짜 미쳤나봐. 가람이 황당한 얼굴로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허, 참. 이 새끼가 어따 대고 얼평질이야? 네 와꾸는 뭐 괜찮은 줄 아냐? 얼굴에 썩은 걸레조각이나 꿰매놓은 주제에.”

“……미친 여잔가?”

“어디 아스팔트 강판에 갈아버린 와꾸 들고 내 얼굴에 못생겼다고 지랄이야! 너 같은 새끼한테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거든?!”

처음에는 작은 중얼거림으로 시작한 말이 끝에선 고함으로 커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빡치네. 가람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양 손으로 빠따를 쥐고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홈런이다, 씨발놈아!”

휘두른 방향으로 뿜어져 나간 참격은 허공을 죽 가로질러 단상에 누워 있는 나미를 지나 교회의 벽에 큰 구멍을 내고 사라졌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가 않고 얼추 방향만 알 수 있으니 답답해 죽을 맛이다. 풀 길 없는 화가 들끓었다. 가람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며 데룩 굴렀다.

“정말 정신이 완전히 나갔군! 여기엔 네 동료도 있단 걸 잊었나? 내 신부가 될 여자니까 상처 하나 내지 말란 말이다!”

“야, 닥쳐!”

압살롬의 말이 맞았다.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나미를 교회 안에 두고 전투를 벌여봤자, 그녀가 인질로 잡혀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굳이 싸움을 벌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일단 나미를 데리고 안전한 곳에 옮겨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적을 찾아 온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자신을 화나게 만든 적을 눈앞에 두고 자리를 피하는 걸 본능이 거부했다. 지금 당장 머리를 잡아다가 두들겨 패서 곤죽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성에 차지를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돼. 그녀가 정말 필사적으로 이 상황에서 길길이 날뛰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단 걸 되새겨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를 꽉 악물고 분한 마음에 빠따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에다가 암만 방망이를 휘둘러도 바닥 타일과 나무 의자만 하염없이 쪼개질 뿐이었다.

“으하하하!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압살롬님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받아라, 사자의 손!”

“이……!”

마침 놋으로 만든 촛대를 부러뜨리고 있던 가람의 등 뒤로 압살롬이 공격을 가했다. 그가 팔에 매달아두었던 바주카 포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발사한 바주카는 위력이 굉장했다. 옷의 등판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고 살갗도 까맣게 그을렸다.

“악!”

지독한 화상임에도, 가람은 얼굴을 찡그리며 짧은 비명만 지르곤 곧바로 뒤돌아 무작정 앞으로 빠따를 휘두르며 달려갔다. 이리저리 냄비에 국자를 넣어 휘젓듯 공격하던 빠따가 아슬하게 ‘무언가’에 스쳤다. 타격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얕았으나 짜증으로 한계까지 내몰린 이성은 그 작은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야토 특유의 본능에 불이 켜져 고통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쿠엑!”

우당탕탕! 압살롬의 몸이 빠따에 처맞아 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다. 투명화가 풀린 상태에서 그가 얼굴을 손으로 짚었다.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압살롬은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곰과 코끼리와 고릴라를 섞어 닥터 호그백에게 꾸준히 개조를 받은 그의 몸뚱이는 웬만한 타격엔 간지럽지도 않아야 하건만, 저 왜소한 몸집의 여자가 제대로 자세도 잡지 않고 대충 휘적댄 방망이에 골이 띵 울렸다. 각 잡고 휘두른 공격에 맞았다면 잠시간 정신을 잃었을 수도 있을 공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신부를 데리고 도망가서 맹세의 키스를 먼저 해야겠어……!’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단상으로 힐끗 향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가만히 누워 있는 나미의 모습이 보였다. 허걱, 여신? 아니, 아니지. 압살롬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하마터면 넋을 잃을 뻔 했다. 그에 비해 저 괴물 같은 여자는 별 예쁘지도 않고 얼굴만 맹하게 생겨가지고, 말하는 게 웬만큼 구른 해적 좀비보다 더럽다.

“어쩌다 운 좋게 때려 맞춘 걸로 기세등등해하지 마라!”

“쫄보 새끼!”

“신부와 온전히 맺어진 뒤에 돌아와서 네 년을 손 봐 주겠다.”

압살롬의 몸이 다시 스르르 투명해졌다. 가람이 발을 쾅쾅 구르며 곧장 달려가 압살롬이 서 있던 자리에 주먹을 내질렀지만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황급히 단상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직 나미가 곱게 기절해 있다.

“가만 둘 줄 알아?”

가람의 몸이 제자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냉큼 단상 근처에 버티고 서서 빠따를 바닥으로 쿵 찍었다. 대체 상디는 이 녀석을 어떻게 상대했던 거지? 상디가 나미의 몸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안아들고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장면은 기억나는데, 투명했던 압살롬을 어떻게 상대했느냐는 도저히 모르겠다. 먼저 공격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뿐인데, 방금 전처럼 한 대 맞고 공격 방향을 짐작해 반격하니 데미지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단상의 모서리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으로는 빠따를 움켜잡은 채 주변을 예리하게 경계했다. 문득 귓가에 아주 희미하게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들렸다.

“어딜!”

은근슬쩍 나미를 채가려던 압살롬은 가람에게 팔을 걷어차이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온갖 짐승을 섞어 외피를 단단하고 질기게 만들지 않았다면 뼈가 가루가 되도록 부서졌을 지도 몰랐다. 압살롬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저 여잔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신체길래, 개조한 흔적도 없이 저런 완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나미를 두고 땅따먹기 할 시간은 없다. 곧 오즈가 정신을 차리고 모리아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나면 이 성의 존재 여부가 불분명해지고 만다. 차라리 상디가 도착하면 그와 함께 싸우거나 나미를 맡기기라도 할 텐데. 가람은 답답한 마음에 자신이 참격으로 뻥 뚫어놓은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저 멀리서 날아오는 하얀 털 뭉치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빙봉?”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알뜰살뜰 기여도를 모아주던 빙봉이었다. 무너진 벽으로 포르르 날아든 빙봉은 곧장 제 둥지를 찾듯 가람의 머리 위로 올라와 앉았다.

“왜 왔어? 무슨 일 있어?”

“씨씨!”

소금은 다 쓴 모양인지 가지고 있지 않다. 가람은 이 상황에서 빙봉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빙봉…… 상대가 눈에 안 보이는데, 너라면 어떻게 할래?”

“씨싯?”

“응?”

“찌르르.”

빙봉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날개를 펼치고 저 멀리 머리가 사라진 상의 옆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빙글 한 바퀴 도는 걸 보며 가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헐, 빙봉! 그대로 분노의 주둥이!”

“씨─!”

한 입도 안 될 새 한 마리가 고 작달만한 부리로 쪼아대면 얼마나 아프겠냐 싶어 무시하던 압살롬은 제 머리통에 정을 대고 망치로 쾅쾅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에 비명을 질렀다. 부리는 작았지만 머리를 앞뒤로 흔들 때마다 부리에서 시퍼런 기운이 뭉쳐 그를 후려쳤다.

“크악! 뭐야, 이건!”

“좋아, 뺨치기, 뺨치기도!”

제대로 사용한 ‘꼬리깃 뺨치기’는 평소에 빙봉이 심술궂게 가람을 때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몸에 비해 길쭉한─그래봤자 한 뼘도 안 된다─ 꼬리 깃털로 압살롬의 뺨을 치자마자 ‘철썩!’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머리통이 휙 돌아가며 뺨이 얼얼함과 동시에, 길게 찢어진 상처가 생겼다. 핏방울이 얼굴을 타고 턱에 고였다가 똑 떨어졌다.

빙봉이 쪼르르 날아와 다시 가람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날개를 부리로 열심히 다듬는다. 그리고 칭찬해 달라는 듯 부비대는데, 가람은 제 펫이 생각보다 강하고 쓸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게임은 등급이 깡패지. 얄팍한 겉모습에 속을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압살롬이 투명해져도 빙봉은 그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넌 이제 뒤졌어.”

가람이 씩 웃으며 우아하게 손짓했다. 하얀 솜뭉치처럼 생긴 새가 다시금 압살롬에게로 쏜살같이 향했다.

-

“으악, 진짜 저 오즈 일족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가람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부서져 내리는 돌덩이를 피해 호다닥 몸을 날렸다. 오즈 좀비가 악의를 가지고 공격한 게 아니더라도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온 저택이 비명을 지른다. 그녀는 적당히 돌무더기를 피하고 애매한 건 빠따로 쳐내며 복도를 지났다. 빙봉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았다.

빙봉의 도움으로 압살롬을 만족할 만큼 개떡으로 만든 뒤, 찾아 온 상디에게 나미를 넘겨줬다.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지켜 주라는 말에, 상디가 온 몸을 불태웠다. 떠나려는 가람에게, 상디는 나미를 넘겨받은 채 또다시 습관적으로 위험하다고 걱정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보기에 가람은 오늘, 무척 강했으니까.

“빙봉.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

“씻씨!”

온 섬을 휘젓고 다녔던 빙봉은 섬의 지리를 얼추 알고 있는 모양인지, 가람을 충실히 안내해줬다. 한참 빙봉을 따라 달리다 보니, 점차 인기척이 줄어들었다.

“빙봉……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시싯?”

머리를 갸웃거리는 빙봉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했지만 펫을 귀여워하는 건 미뤄두고 가람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따라오라고 했었잖아. 오즈한테 가는 지름길을 알려 준 거 아니야?”

빙봉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가람이 휴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작은 펫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 그녀는 저 멀리서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오즈에게 가려다 빙봉이 따라오라고 옷깃을 물어 잡아 당기길래, 지름길을 알려 주려나 보다 해서 따라나섰었다. 그러나 오즈는커녕, 오히려 그 영향권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그래, 알겠어. 고마워.”

탓해서 무얼 하랴. 가람은 일단 지금 위치를 파악해두자 싶어 복도의 길쭉한 창문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어라? 저어쪽에 하늘에 동동 떠 있는 페로나가 보였다. 가람이 서 있는 복도에서 두 번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복도의 창문에 대고 뭐라뭐라 떠들고 있었다. 창문 안쪽에는 우솝이 있는 게 분명했다. 페로나는 살짝 늦게 가람을 발견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허공에서 흔들거리던 유령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유령은 아무렇지 않게 벽을 통과했다.

“어, 음.”

가람은 난처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끔뻑였다. 이것만은 정말 자신 없었다. 제아무리 싸움을 잘 하는 스킬을 뽑아봤자, 아까 루피나 조로 같은 애들만 봐도 이건 전투 능력에 상관치 않고 사람을 좌절시킨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하다 보니 벽이 등에 닿았다. 유령은 멍청한 얼굴로 흐느적흐느적 가까이 다가와 가람의 몸을 쏙 통과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

아무렇지 않다. 유령은 가람과 벽을 동시에 지났다가 다시 옆쪽 벽을 통해 나왔다. 그리고 페로나가 있는 곳으로 떠나갔다. 가람은 느릿한 유령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빙봉. 가서 우솝 좀 도와줄래?”

“시씨!”

가람의 머리 위에 앉아서 딴청 피우던 빙봉이 자그마한 날개를 파닥거리며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녀는 곧장 손바닥을 펼쳐 휴대폰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어디에 뒀는지도 까먹었던 그 물건이 고스란히 손바닥 위로 나타났다.

“시리.”

[네,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페로나의 능력이 나한테 안 통한 게 너 때문이지?”

[네, 맞아요. 주인님의 인공지능 비서인 저 ‘시리’와 디바이스는 ‘사용자 보호 매뉴얼’에 따라 사용자의 육체와 정신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을 관리’라는 부분에서 가람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기계와 말다툼을 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고 소모적인 행동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그 네거티브 홀로가 매뉴얼에 걸려?”

[사용자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쟝고의 최면술 같은 것도?”

[네, 맞아요.]

“그 외에, 정신적인 건 모두 다?”

[네, 맞아요.]

가람은 누누이 생각했다. 디바이스, 즉 휴대폰과 시리가 반드시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단 건 진즉에 깨달았고 그녀 스스로가 가진 인간적인 부분에 반한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디바이스와 시리의 기계적인 조치는 가람이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패닉에 빠져 울다 지쳐 쓰러지거나 향수병으로 시름시름 앓지 않는 것도 이 물건의 덕분이란 건 알고 있다. 지나치게 현실감 없이 행동하던 일도 그 이유에서였으니까.

에니에스 로비에서 시리에게 명령을 내린 이후 깨달은 게 있다면, 시리는 ‘모든 것’을 주인에게 알려 주지 않는단 점이었다. 가람은 본인 스스로가 몰이해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직접적으로 눈앞에 동료들을 두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그 괴로움마저 단시간에 잊어 버렸다. 그게 전부 시리가 ‘막아 놓은’ 탓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허탈함과 허무함. 아직도 목구멍 안쪽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그녀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영영 밀짚모자 일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시리는 끊임없이 ‘학습’한 대로 가람의 현실감을 저해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물건의 존재 자체가, 가람을 위해서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걸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시리는 가람의 목숨을 끊임없이 구해주고, 정신을 구제했다. 그녀가 애써 묻어두었던 한 가지 의문. 나는 왜 집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걸까. 가람은 답을 알고 있었다.

“……내 신체 정보를 수정할 때, 알림 울리는 거랑 안 울리는 거 차이가 뭐야?”

[사용자의 육체적 손상을 이유로 신체 정보 수정이 이루어질 경우, 사용자에게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손상에 대해선 사용자의 요청이 없을 경우 알리지 않습니다.]

가람은 언제, 얼마나, 어떻게 자신의 정신이 고쳐지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정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까마득한 기분이 들며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치만 알고 싶지는 않아.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그녀가 도장을 찍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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