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럭키 투데이-77화 (77/82)

■ 76.

에이스와 가람의 일과는 조금 바뀌었다. 아침에 에이스가 가람을 찾아와 깨우고, 둘은 계곡으로 가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인사를 했다. 가람은 에이스가 다단 패밀리와 더 가까워지고 정서적 교류를 나누길 원했으므로 아침 식사를 그들과 하라며, 대신 저녁은 같이 먹자고 달랬다. 산적들은 그녀가 나중에 떠나고 나면 에이스의 가족이 되어 줄 이들이다. 처음엔 불만스러워했던 에이스도, 낮엔 할 일이 있다며 순순히 납득했다. 그가 사보와 함께 ‘일’을 하러 가는 낮에는 가람도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한다. 그녀는 이 심심하고 따분한 숲 속에 있기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마을에서 보냈다.

“와, 온천이 있어요?”

“그럼요. 작년에 새로 생겼는데 모르셨어요?”

“아, 작년……. 하하, 네네.”

고아 왕국은 격리 사회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것들은 모두 대문 밖으로 내몰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벽 안으로 들였다. 가람은 그게 참 우스우면서도 꽤 ‘보기 좋게’ 잘 만들어졌단 것엔 동의했다. 적어도 끄트머리 마을을 지나 중심가부터는 아주 쾌적하고 훌륭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가씨. 혼자 오셨나요?”

“네, 그런데요?”

“안내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뇨. 길은 다 알아요.”

“하지만 단순히 길만 안다고 해서 이곳 주민들의 추천 가게나 좋은 정보를 들을 순 없잖아요.”

“혹시, 몇 살?”

느긋하게 깨끗한 중심가를 돌아다니는 그녀에게 앳된 남자애 하나가 접근해 약간의 품삯과 식사만 해결해주면 하루 종일 마을 구석구석 안내를 해 주겠다며 자처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소년의 주근깨가 에이스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한 번 들어나 볼까 하고 나이를 물었다.

“열세 살이에요.”

“……말 놔도 되지? 이름이 뭐야?”

“그럼요! 저는 잭이에요. 아가씨 이름은요?”

“가람이라고 불러.”

확실히 에이스보다는 조금 더 커 보였다. 열세 살의 잭은 가람과 거의 눈높이가 엇비슷했고 몸은 비쩍 말랐다. 가람은 굳이 자선 사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썩어날 정도로 돈이 많고 이 돈의 가치가 스스로에게 그리 크지 않으며 서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생각이 있었다.

“좋아. 그럼 밥부터 먹으러 갈까? 돈은 언제 주면 되니?”

“헤어질 때요. 제 봉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만족하신 만큼 주시면 돼요.”

“그거 괜찮네.”

잭은 이 일을 자주 했었던 건지, 그가 데려가는 가게마다 사람들이 아는 척을 했다. 짐작컨대 친분 있는 가게에게서 뭔가를 얻고 손님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 그가 가람을 돌아보며 베시시 웃었다.

“여기 맛있어요. 해산물 좋아하세요?”

“싫진 않아.”

“좋아하게 되실 거예요.”

가람은 소년의 앙큼한 상술에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그의 말대로 해산물 레스토랑은 비린내 없이 깔끔하고 맛있었다. 간이 좀 센 게 단점이었지만 와인을 같이 시키는 걸로 해결했다. 이것도 노린 게 아닐까? 그녀는 조개 요리를 골랐고 잭에게는 생선찜을 주문해 주었다. 잭은 가람의 조개 요리를 깨끗하게 손질해 그녀의 접시에 옮겨 주는 서비스를 발휘했다.

“제법이네.”

“이렇게 해야 장사할 수 있거든요.”

“오래 했어?”

“열 살 부터요. 어린 동생이 있어서요.”

“동생은 지금 몇 살인데?”

“일곱 살이에요.”

잭이 열 살일 때는 네 살이었다는 소리다. 가람은 눈치 없이 부모에 대해서 묻는 대신, 아이를 위한 과일 주스를 하나 더 주문하고 잭이 눈짓으로 인사하는 걸 못 본 체 했다.

“아까 온천을 구경하고 계셨죠? 식사가 끝나면 온천에 가실래요?”

“그럴까. 여기 온천은 처음인데.”

“아주 근사해요. 왔다 간 귀족이 마음에 들었는지 저 안쪽 높은 마을에도 온천을 만든다고 난리란 소문을 들었어요.”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 세계는 섬마다 특색과 문화가 묘하게 다른데, 유럽 풍의 섬에서도 묘하게 일본 문화가 섞여 있었다. 가람은 그러려니 생각하며 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매일 깊은 숲 속 계곡에서 씻거나 가끔 ‘샤워’ 아이템을 구매하는 걸로는 완전히 만족할 수 없었는데 마침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글 생각에 기대가 됐다. 써니 호의 대욕탕이 그립네.

“너는?”

“저는 밖에서 기다릴게요. 죄송하지만 온천욕이 끝나면 저곳으로 와 주시겠어요?”

“그래.”

이곳에서는 돈이 전부였다. 가람은 값비싼 개인 욕탕을 택했다. 지금 남은 돈이 얼마인지 생각하지 않고 써도 될 만큼 있어서, 전망이 좋고 아주 비싼 개인실을 빌렸다. 원래는 예약제라고 하는데 어차피 비어 있고 해서 웃돈을 주니 가게 측에서도 받아들였다.

높은 마을은 이 나라의 한 가운데에, 중심가 뒤편으로 석벽을 짓고 고지대에 세워진 곳이었고 이 온천은 중심가에서 가장 높았다. 가람은 온천에서 멀거니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심가와 저 멀리 끄트머리 마을을 구경했다. 뒤로는 높은 마을의 석벽이 위치했다. 그녀가 제아무리 비싼 옷을 입고 말끔히 단장해도, 높은 마을은 들어갈 수 없었다. 철저하게 신분 조사를 한 뒤 마을의 평판에 흠이 될 것 같으면 절대로 들여보내지 않는다. 명색이 이스트 블루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니까 와 본 김에 구경도 해 보고 싶어서 아쉬웠다. 어쩔 수 없지. 가람은 저 멀리 소동이 일어난 중심가 가장자리를 가만히 살피며 턱을 고였다. 뜨끈한 열기가 온 몸을 녹진하게 풀었다.

‘저긴 왜 저렇게 소란이래. 도둑이라도 있나…….’

아니나 다를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데 어딘가 익숙한 뒤통수가 마을을 헤집는다.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이곳저곳을 누비고 지붕을 뛰어다니는 저 모습은 가람에게 아주 낯이 익었다.

“어, 어어어?! 에이스?”

벌떡 일어나며 뜨거운 물이 잔뜩 넘쳐흘렀다. 가람은 유리창에 머리를 쾅 가져다 붙였다. 에이스다! 그리고 옆에는 사보가 분명하다. 두 악동이 마을을 뒤집고 다니며 도망을 치고 있었다. 호루라기 같은 걸 입에 물고 뒤쫓는 경관이 셋. 세상에,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그 애들이 해적이 되겠다며 돈을 모은단 건 들었지만 중심가에서 이렇게 대놓고 소동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가람은 서둘러 몸을 헹구고 머리도 말리지 못한 채 건물에서 뛰쳐나왔다. 길가로 나오자마자 에이스가 어디에서 날뛰고 있는지 단번에 알았다. 가장 시끄러운 장소의 중심.

“저 놈들 잡아!”

“B구역으로 도망간다!”

“젠장, 너무 빨라─!”

“고작 꼬마애 두 명인데 왜 잡지를 못하는 거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경관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쫓아오는 가운데, 에이스는 가람을 발견했다. 다급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어도, 에이스에게 있어서 가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천막을 뛰어넘다가 발을 헛디뎠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사보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야, 에이스!”

“에이스!”

동시에 가람의 목소리도 들렸다. 에이스는 이를 악물고 얼른 자세를 바로잡은 뒤 훌쩍 점프해서 아슬아슬하게 목덜미를 낚아채려는 경관의 손길을 피했다. 사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냐? 별 일이네, 네가 이 정도에……. 근데 저 여자는 누구지?”

“몰라. 이 가게에서 일하나 보지.”

에이스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자신이 천막을 부숴 놓은 과일 매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리고 사보의 어깨를 밀며 얼른 도망가자고 보챘다. 사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묻지 않았다.

“허어…… 저게 나 쌩까네?”

가람은 분명 눈이 마주치고 이름까지 불렀는데도 모른 척 도망가는 에이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쫓기는 와중에 아는 척을 하면 곤란해진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조금 서운했다. 그렇게 보고 싶었다고 품에 안겨 엉엉 울 때는 언제고─에이스는 그런 적이 없다─ 이렇게 시치미라니. 그녀는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면서 등을 돌렸다. 저 멀리서 놀란 얼굴의 잭이 후다닥 뛰어왔다.

“에구, 가람 아가씨!”

“아, 잭. 미안. 다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녜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어요? 저런 불한당 같은 놈들…….”

“난 괜찮아. 너 쟤들 아니?”

잭은 경관들에게 조사를 받기 전에 얼른 뜨자며 가람을 데리고 그곳을 벗어났다. 가람은 중심가 대로에 있는 키오스크에서 음료 두 잔을 사서 잭에게 하나 건넸다.

“그럼요. 이 마을에서 에이스와 사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그, 그렇게 유명해?”

“악명이 높죠. 벼르고 있는 사람도 엄청 많고……. 당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왜?”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쑤시고 다니거든요. 특히 저번에 당한 가죽 장수가 화가 많이 났어요. 되게 비싸게 거래하기로 한 걸 털렸대요.”

“저런…….”

가람은 혀를 쯧 찼다. 이제 에이스를 데리고 마을에 내려오는 건 조금 힘들어졌다. 그녀는 솔직히 숲 속에서 자연인의 삶을 살기 보다는 자주자주 내려와 도시의 문명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에이스가 사보랑 어울려 다니는 낮 동안을 잘 활용해야겠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음료를 쪽쪽 마시는 걸 보며 잭이 슬쩍 말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그 가죽 장수가 당한 게 좀 고소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 ……너도?”

“헤헤, 뭐, 그렇죠.”

“그건 왜 그런데?”

“거야 그 자식이…….”

잭은 잠깐 말꼬리를 흐리며 가람을 힐끗 쳐다봤다. 잘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 유명한 저 두 악동을 모르는 걸 보니 잠깐 방문한 외국인인가 싶은 여잔데, 얼굴은 앳되면서 하는 행동은 귀부인처럼 느긋하고 우아해서 섣불리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말을 꺼내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자식이…… 어린 소녀를 상대로 매춘을 하거든요.”

“와, 진짜 씨발 새끼네.”

“네, 네?”

“에이스가 그 좆같은 놈을 아예 골로 보내버려야 할 텐데.”

“하, 하하하…….”

가람이 나중에 에이스를 칭찬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빙그레 미소 짓고, 잭은 식은땀을 흘리며 삐질삐질 마주 웃었다.

-

“야, 사보. 나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너 혼자 해라. 미안, 다음에 오늘 몫까지 챙겨 올게.”

“뭐어?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이해 좀 해 줘.”

씩 웃으며 사보의 어깨를 툭툭 치고 에이스가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사보는 입을 떡 벌리고 저 놈이 왜 저러나 싶은 얼굴로 멀거니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평소에는 그보다 더 열정적이면 열정적이었지, 이렇게 농땡이 부릴 녀석이 아니어서 더 황당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중심가에서 사고를 일으켰을 때에 대해 물었을 때도 어물쩍 넘어갔었지.

‘흐음, 뭔가 수상한데…….’

그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요 일주일 간 묘하게 기대에 가득 차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평소와 너무 다르다. 지난 3년 간 봐 왔던 에이스는 절대로 저렇게 밝고 쾌활한 녀석이 아니었다. 정말 수상하다, 수상해. 사보는 오늘 일은 미루기로 하고 에이스의 뒤를 따라나섰다. 둘 사이의 신뢰 관계에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사보에게도 에이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지만,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한편, 너무 들뜬 나머지 사보가 뒤따라오는 것도 모르고 에이스는 익숙하게 산을 거슬렀다. 반의 반 정도 올랐을 무렵 새하얀 새가 익숙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빙봉. 가람은?”

“씻씻.”

그가 평평한 지대에서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밀어내고 들어서자, 바닥에 기묘한 무늬를 그리고 있는 가람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 걸음이 빨라졌다.

“가람, 나 왔어.”

“아. 잠깐만, 조금만 기다려 줘.”

에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에 기대서서 가람이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둘은 어젯밤 모종의 약속을 했다. 가람은 에이스에게 내일 바닷가에 놀러 가지 않겠느냐 물었고, 에이스는 그에 혹했지만 매일 사보와 작업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까스로 거절했다. 하지만 가람이 ‘부족한 하루 일당은 내가 메꿔 줄게. 어때? 네 시간을 내가 사는 거야. 절대 섭섭한 값은 아닐 걸.’ 이라고 제안하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이것도 일종의 돈벌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설렘으로 가득한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바닷가, 바닷가, 가람이랑 바닷가.

흙바닥에 기묘한 무늬를 그리던 가람이 이윽고 다 되었다며 손바닥을 땅에 가져다 붙였다. 번쩍!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흙과 나뭇가지와 돌이 굴러다니던 바닥이 오목하게 파이고 두 개의 모종삽이 생겨났다. 에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흙놀이엔 이게 제격이지. 자, 가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앞으로 불쑥 내민 손을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으니, 가람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아, 아니.”

에이스는 가람의 손을 얼른 붙잡고 같이 서쪽 길로 산을 내려왔다. 두 사람 다 보통 사람보다 체력도 좋고 걸음도 빨라서 서쪽 해안가는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바다가 육지 쪽으로 움푹 들어온 해만이었는데, 그 길을 따라서 해적들이 가끔 배를 대기도 했다. 둘은 배가 들어오는 바위 지대를 지나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에이스 수영 잘 해?”

“당연하지. 수영 못하는 해적이 어디 있어?”

“엄청 많아. 일단 능력자들은 전부.”

“난 그런 거 없어도 강해.”

가람은 입술을 깨물며 샐쭉 웃었다. 대답 없이 웃는 그녀를 보며 에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그 표정.”

“아니 뭐─ 에이스는 열매 먹어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불꽃이라던가.”

“……잘 어울려?”

“그럼. 넌 뭐든 어울리지. 아무튼 이리 와 봐.”

모래사장은 부서진 조개껍질이 드문드문 보이는 걸 제외하곤 의외로 곱고 부드러웠다. 에이스가 유치하다며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걸 꿋꿋이 무시하고 모종삽을 땅에 푹 꽂았다.

“이런 건 어린애나 하는 거라고.”

“……아냐?”

“아니야! 누굴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 진짜!”

가람은 에이스가 어린애 아니라고 바락바락 화를 낼 때마다 굉장히 즐거워했다. 저 얼굴로 뺨을 발갛게 붉히고 어린애 아니라며 우기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본인은 모르나 보다. 그녀가 싱글방글 웃으며 에이스의 뺨을 쥐고 살짝 흔들었다.

“난 어린앤가 봐. 재밌는데?”

“유치하기는.”

그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리면서도 옆으로 다가왔다. 가람은 삽을 젖은 모래사장에 꽂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연금술 문양을 그렸다. 에이스가 그녀의 곁을 따라 걸으며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까 그 마술이랑 같은 거야?”

“내가 멋진 거 보여 줄게. 너도 놀랄 걸?”

“별로.”

원을 그리고 연성을 위한 수식과 도식을 그려 넣는다. 가람이 오늘 뽑은 스킬은 ‘연금술’이었다. 하늘섬에서 사용했던 연금술에 비해서는 그 수준이 몹시 낮아서 일일이 문양을 그려야 하고 새로운 물질의 구성을 쉽게 파악하는 건 힘들었지만 모래와 흙 정도야 가뿐하다.

번쩍! 문양을 다 그리고 손바닥을 붙이자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에이스는 전혀 흥미 없는 척 굴면서도 힐끗거리며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문양이 그려진 곳의 모래가 분수처럼 빨려 들어갔다가 위로 솟으며 새로운 형태로 변해간다. 머리를 꼿꼿이 치켜 든 용의 형상을 하거나, 에이스의 키 만큼 높은 모래성을 세웠다.

“우왓!”

“어때, 근사하지?”

“…….”

마음 같아선 아니라고 톡 쏘아붙이고 싶은데, 입이 떡 벌어져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가람은 능력자인 걸까? 그녀와 계곡에 갔을 때 보면 수영도 곧잘 하고 물에 들어가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어떻게 매일같이 신비한 능력을 펼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에이스는 머뭇머뭇 다가가서 멋지게 지어진 모래성을 툭 건드렸다.

“에이스. 나 봐봐.”

“어?”

가람이 다시 한 번 연성을 일으켰다. 바닥에서 와르르 솟구친 모래가 단숨에 에이스를 덮쳤다. 그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모래로 된 보아뱀은 에이스를 꿀꺽 삼키듯 덮치고 땅으로 흩어져 내렸다. 졸지에 고운 모래를 뒤집어쓰게 된 에이스가 심통 난 얼굴로 가람을 노려보다가 달려들었다.

“아하하하! 그러게 누가 방심하래!”

“야, 너……!”

얼굴을 잔뜩 구기고 가람에게 달려들고, 그녀는 어어 하는 사이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갔다. 에이스와 졸지에 한 데 엉켜 모래 위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머리와 옷에 모래가 왕창 섞여 엉망진창이 된 꼴로 크게 깔깔 웃는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아니. 이런 거 너무 오랜만이라.”

모래사장에 등을 대고 누워서 한참을 웃어댔다. 에이스는 가람의 위에 올라탄 채로 뭐가 불만인지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제 허리에 그녀의 양 손이 닿자 화들짝 놀라서 몸을 파드득 떨었다.

“우왁, 뭐야!”

“읏차.”

에이스는 가람보다 힘이 더 셌지만,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리는 것에는 체중 이상의 힘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의 양 손에 짐짝처럼 들려서 얼굴을 확 붉혔다.

“……내려놔.”

“에이스. 우린 아마 계속 함께 있을 수가 없을 거야. 그러니까 같이 있을 때만이라도 계속 좋은 것만 하고, 기쁜 시간만 보내고 싶어.”

“뭐라구? 너 또 어디 가?!”

가람은 잠깐 대답 대신 비명처럼 꿱 소리를 지르는 에이스의 얼굴과 머리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고 옷도 툭툭 털어 주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에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나도 몰라. 어느 날 갑자기 못 오게 되는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에이스 너와 내 시간이 다르게 지나가 버려. 절대로, 절대로 널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니야.”

“……저번처럼?”

“진짜야. 약속할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내가 사라져도, 네 곁으로 오겠다고.”

이 과거에서의 시간만큼은, 온전히 너를 위해 사용할 거야. 가람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에이스는 손을 잡아 걸었다. 마음 같아선 안 된다고 화를 내고 붙잡아두고 싶은데, 그렇게 생떼를 쓰기엔 마주 본 그녀의 얼굴이 너무 아파 보였다. 하얀 얼굴에 모래를 잔뜩 묻히고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니 숨이 탁 터져 나온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떼를 쓰는 건 어린애나 할 짓이야. 에이스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꼬마가 아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아이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약속한 거야.”

가람이 샐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에이스는 그녀의 뒤쪽 저 멀리서 아주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사보?”

“야, 에이스!”

사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모자를 잡고 바위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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