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Chapter 21 (3)
“제 실력이 초이에 비해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자리를 마련해 봤어요.”
두 사람이 있는 야외 코트는 덕 노비츠키가 가끔 별장으로 사용하는 빈집에 딸려 있었다.
덕 노비츠키는 흔쾌히 사용해도 된다 말했고, 그 덕분에 이블린과 호영은 남의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농구를 할 수 있었다.
“하버드 크림슨의 에이스가 직접 1 on 1으로 상대해 주는 건데, 영광이죠.”
“에~ 제가 더 영광이죠! 언드래프티의 기적, 댈러스의 초이를 상대하는 건데. 그래도…… 저 제대로 할 거니까 긴장하세요.”
출사표를 던지듯 야심 차게 말하는 이블린의 모습은 호영의 눈에는 귀여운 소동물같이 보여서 난감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을 튀기기 시작하는 이블린을 보며 호영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한껏 낮춰 수비 태세를 갖췄다.
‘기본기 탄탄하네.’
한때, 제2의 베키 해먼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망주였던 이블린 앳킨스.
NCAA에서 바닥을 치는 하버드였지만 이블린 앳킨스가 에이스로 있던 시절에는 광란의 3월 끝자락을 노려 볼 정도로 역대급 시즌을 보냈을 만큼, 그녀가 가진 캐리력은 상당했다.
모난 곳 없이 정석에 가까운 드리블. 부상을 입었음에도 아직 견고한 드라이브 인 스킬은 그녀가 얼마나 농구에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호영은 평소 경기를 뛰던 때처럼 사이드스텝을 밟으며 이블린을 마크했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기분에 혼란스러웠다.
‘뭐지?!’
평소에는 땀내 가득한 상남자들과 뒤엉키며 농구를 해서 그런지, 온갖 땀 냄새와 악취에 나름대로 적응했다 생각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겨드랑이 구린내나 입 냄새나 하여간…… 뭔가 젠틀한 외모와 달리 냄새가 고약한 선수들도 있어서 얼굴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호영.
하지만 이블린과 맞부딪히며 느낀 건…… 산뜻하고 향긋한 향기.
그래, 냄새가 아니고 향기다. 말총머리로 질끈 묶어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은 자체적으로 향을 발산하는 그런 기능이 있는 것 같아서 호영은 순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초이! 수비 헐거운 거 아니에요?!”
이블린은 진심이다. 그러니, 잡념을 떨치고 진심으로 이블린을 상대하는 것이 옳다고 호영은 생각했다.
“흡!”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최대한 입으로 호흡하며 이블린에게 진심 모드를 발동하는 호영.
이블린은 가진 스킬을 모두 활용하는데도 전혀 속지 않는 호영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 스킬이 NBA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건 맞지만…… 상상 이상으로 큰 벽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게 NBA에서 ‘평범한 대인 수비’라면, 과연 숨 막힐 정도의 대인 수비를 당하면 어떤 느낌일까?
이블린은 잠깐 궁금해졌지만, 금세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뭔가…… 알 수 없지만, 호영을 제외한 다른 NBA 선수들과는 굳이 1 on 1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블린 인생에서 NBA 선수…… 그것도 한 팀의 에이스와 이렇게 1 on 1을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큰일이었다.
호영의 성격상, 이블린이 도전하면 언제든 쿨하게 받아 줄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한 번이 소중한 경험이다 보니 이블린도 욕심이 생겼다.
크로스 오버, 스텝 페이크, 슈팅 페이크 등등. 가진 잔기술을 모두 활용하여 호영을 속여 보려 했지만, 진지하게 임해 줬으면 좋겠다는 이블린의 부탁에 호영도 진심을 다해 수비했기에 하나도 속지 않았다.
도리어, 실전에 버금갈 만큼 날카로운 스틸에 공을 뺏길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이블린은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흐읍!”
이제 모든 기술을 다 썼고, 공도 양손으로 잡아 버린 상태.
더 이상의 드리블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블린은 전성기 시절의 감각으로 페이드어웨이를 구사했다.
하지만 아무리 트레이너로 계속 운동을 했어도 부상으로 접은 사람이 실전을 생각하고 하면 무리가 오는 법. 이블린은 자신도 모르게 뻣뻣해지는 발목에 화들짝 놀랐다.
“아앗!”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이블린.
호영은 수비를 하다 말고 뒤로 크게 넘어질 것 같은 이블린을 껴안은 뒤 자신의 등으로 바닥에 넘어졌다.
쿵-!
호영의 키와 무게 때문에 꽤 큰 소리가 났다. 하지만 호영은 이블린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고, 이블린은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순간 얼음이 되었다.
“이블린, 괜찮아요?”
“네, 네…… 전 괜찮아요. 초이는요? 크게 다친 건 아니에요?”
“예, 저도 멀쩡해요. 어…….”
서로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두 사람은 서로 밀착한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다들 여기 있었네! 저기…….”
하필, 이 타이밍에 등장한 크리스 헤임즈 에이전트.
두 사람은 허둥지둥 일어나 황급히 떨어졌지만, 크리스 에이전트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 내가 방해한 모양이네. 미안, 눈치 없이 등장해서. 그럼 좋은 시간 보내라고! 난 조금 있다가 천~천히 올 테니.”
“아, 아니! 크리스! 그런 거 아니에요!”
“맞아요! 크리스, 그런 거 아니니까 어디 가지 마요!!!”
두 사람이 황급히 말리는 탓에, 크리스 에이전트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뭐 다 큰 사람들인데 어때서. 여기 전세도 냈겠다. 그냥 확…….”
“뭘 확이에요, 확은! 하여튼. 어쩐 일이에요, 크리스? 뭐, 새롭게 스케줄이라도 생겼어요?”
호영은 순간 크리스 헤임즈 에이전트가 말했던 ‘확’이라는 걸 상상할 뻔했다가 정신을 차리곤 그가 온 이유를 물었다.
“맞아. 역시, 초이는 눈치가 빨라. 스케줄이 하나 들어왔어. 근데, 꽤 괜찮은 제안 같길래 일단 물고 왔지.”
“뭔데요?”
“TheCrawsOver에서 주최하는 프로암 리그. 여기에 초이가 게스트로 초청받았습니다. 다들 박수!”
스타 선수들도 한 번씩 눈도장을 찍으러 나가는 프로암 리그. 호영은 자신이 여기에 게스트로 초청받았다는 것에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요?”
“그럼, 뭐 거짓말이라도 하겠어요? 솔직히, 지금 위상으로는 초이가 나갈지 말지 정해도 되는 수준이긴 한데,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친 적 없으니, 성의 차원에서 한번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거죠.”
크리스 헤임즈 에이전트의 이야기에 호영도 그거 괜찮겠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블린만큼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두 사람은 그런 이블린의 표정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에요, 이블린?”
“그게…….”
* * *
“초이, 괜찮겠어요?”
이블린과 1 on 1으로 농구 한 다음 날, 호영은 평소와 달리 좀 낯선 경기장에 도착해 몸을 풀었다.
이제는 같이 다니는 게 디폴트가 되어 버린 이블린 앳킨스 트레이너는 호영의 발목과 어깨에 직접 테이핑을 해 주며 이 경기를 뛰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게스트로 초청받고 한 경기 뛰는 거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블린, 어제 그 소식 때문에 그래요?”
이블린은 부정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영이 초청을 받고 온 경기는 바로, 프로암(Pro-Am)리그.
프로 선수와 아마추어 선수가 한데 뭉쳐 벌이는 이벤트성 리그인데, NBA 선수들은 이 리그에 게스트로 초청되어 한 게임 정도만 뛰는 편이었다.
특히, TheCrawsOver에서 주최하는 프로암리그는 NBA 선수들이 자주 뛰기로 유명했고, 오늘은 댈러스 매버릭스의 선수들을 컨셉으로 게스트 초청을 했는지 호영과 루카, 그리고 트레이닝 캠프 ‘썰’이 솔솔 도는 크리스챤 우드와 카일 콜린스워스. 이렇게 네 명이 초청되었다.
그 이외에도 스페인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NCAA 대학 무대를 평정 중인 유망주들도 우르르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이벤트성 경기이다 보니 다들 즐겜하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NBA 선수 특유의 그 독기? 프로 의식? 이런 게 과하다 보면 비시즌기간에 시즌처럼 빡빡하게 게임을 뛰다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미예 오니가 입은 부상은…… 정말 불운한 부상이었어요. 그런 부상이 나와선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운한 부상을 걱정해서 초청받은 경기를 안 뛸 순 없으니까요.”
“그쵸.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미예 오니는 예일대학교의 에이스 출신으로, 호영의 전생에선 내년 드래프트 2라운드 58번으로 뽑히는 선수였다.
말석이긴 해도 3시즌 동안 유타에서 어느 정도 기회를 받았던 재능이었다.
하지만 그 선수가 어제, 프로암 경기를 뛰던 중 착지 과정에서 상대 수비의 발을 밟는 바람에 중족골 골절이라는 부상을 입게 되었다.
“걱정 마요. 루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정말 안전하게 플레이를 할 생각이니까. 이블린도 알잖아요? 저 마음 먹으면 아재 농구 끝판왕으로 할 수 있는 거. 응? 이렇게, 질질 끌면서. 지공으로 경기 풀고. 쇽쇽 패스 찔러주고. 어차피 제 피지컬로 뭐, 다이나믹한 앨리웁 덩크 같은 걸 찍어 봐야 사람들이 얼마나 신나겠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패스 띄워 주는 게 더 좋지.”
“푸훗! 하긴, 그건 그래요. 초이가 베테랑처럼 플레이한다고 다짐하면 진짜, 한 번도 안 뛰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농구 하니까.”
오프시즌, 이블린과 상당한 시간을 보냈던 호영은 사적으로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고, 어제는 서로 1 대 1 농구를 하기도 했다.
잠깐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이후 호영은 ‘아재 농구의 무서움을 보여 주겠다.’면서 정말, 한 발자국도 안 뛰는 농구로 이블린과 즐겜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가 하버드의 에이스였던 이블린의 스킬에 깜짝 놀라며 진심으로 뚫린 적도 몇 번 있었다.
어쨌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농담을 건네니, 이블린의 표정도 한결 편해진 듯싶었다.
“정말…… 조심해야 돼요. 초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아셨죠?”
“그럼요. 시즌 경기도 아니고, 이런 경기에서 다치면 정말 끔찍할 테니까. 같이 뛰는 선수들에게도 무리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으니까. 다들 즐겁게 게임한다는 마음으로 임할 거예요.”
“그래요. 그러면 됐어요.”
짝!
이블린은 매운 손맛으로 호영의 어깨를 치며 테이핑이 끝났음을 알렸다.
“경기 끝내고,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요, 초이.”
“옙. 분부대로 합죠.”
이블린은 피식 웃으며 ‘분부대로 안 하면…… 알죠?’라고 귀엽게 협박한 후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호영은 슈팅 핸드인 오른쪽 손목과 어깨, 그리고 양쪽 발목에 꼼꼼하게 테이핑을 해 준 것을 빤히 보더니 경기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호영은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루카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중간에 불쑥 난입한 기자들 때문에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응? 한국?’
이중국적은 가지고 있지만, 고등학교 시절 잠깐 활동한 후엔 그다지 좋은 기억도 없어서 잊고 지내던 나라, 한국.
솔직히 호영은 자신을 검은 머리 미국인이라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 굉장히 무덤덤했고, 큰 관심도 없었다.
한국에서도 언드래프티가 된 후 본인에 대한 관심이 뚝 끊겼다가, 갑자기 반등하니까 올 시즌부터 부랴부랴 온 듯싶은데. 그런 식으로 속 보이게 다가오는 건 호영 입장에선 별로 선호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라스트 댄스 - NBA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