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6화
후반전은 팀을 섞기도 했고 내기가 안 걸려 있기에 다들 편안하게 공을 찼다.
로베르토는 아까처럼 조급하거나 분해하지 않고 날 상대했다. 이번에 나는 왼쪽 풀백 자리로 옮겼는데 롭이 날 상대하겠다고 오른쪽 윙어 자리로 따라왔다.
나는 로베르토와 대화를 나누며 경기를 즐겼다.
“아까 절 도와준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도와줄 거예요?”
“운동장처럼 넓진 않지만, 잔디가 깔린 공간이 있어. 거길 쓸 수 있게 해줄게.”
“어디인데요? 멀면 못 가는데…….”
“그 정도로 멀진 않을 텐데…… 너희 아버지랑 상의해 보지 뭐.”
“좋아요.”
공이 내게 와서 받자마자 왼발을 이용해 반대쪽으로 패스했다. 이번 경기의 나는 적당현준이다.
“너 설마 양발 다 쓰니?”
“아뇨, 오른발잡이긴 한데 오늘부터 연습할 거예요. 방금 패스는 불안정했어요.”
“음…… 굳이 장점을 죽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나라 선수들은 이 시절부터 양발을 잘 썼다. 왼발을 못 쓰면 억지로라도 쓸 수 있게 만들려는 감독들도 있었다. 하나를 특출나게 잘하는 것보다 골고루 잘하는 게 우리 정서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럽 선수들은 타고 나거나 자연스럽게 양발을 쓰는 게 아니라면 그걸 강요하지 않는다.
이 시절 몇 단계는 선진축구나 다름없었던 유럽 축구는 개성을 존중해 줬다. 남미 축구도 마찬가지다.
물론, 양발을 자유자재로 다루면 좋은 건 사실이다. 그게 어려우니까 한쪽에 집중하는 것이고.
“저는 양발 다 스페셜리스트가 될 거예요.”
“건방지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로베르토는 실실거렸다.
빛나는 원석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테니 오죽할까.
잡담도 섞어가며 경기를 즐기고 있으니 교문으로 한 아저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번 생은 운이 좋다. 딱 공을 받을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잠깐이지만 본격적으로 할 때가 왔다.
골키퍼 아저씨에게 손을 들어 패스를 달라고 어필했다.
패스를 받기 직전 한 번 눈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우리 팀과 적팀의 위치를 전부 파악했다.
특히, 방금까지 그냥 옆으로 패스만 했기에 날 막아야 하는 로베르토가 방심하고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순식간에 그려졌다.
“어어?”
오른발로 받은 공을 왼발로 옮기며 순식간에 치고 나갔다. 단순하지만 폭발력 있는 라크로케타는 내 주력 개인기였다.
“이 자시이익아아아!”
로베르토가 이를 악물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 치고 나갈 뿐이었다.
옆에서 달려오는 아버지는 속도를 살짝 늦췄다가 급가속해서 따돌렸고, 수비수 아저씨의 슬라이딩 태클은 공을 띄우고 나도 점프해서 넘어갔다.
교문으로 막 들어온 아저씨. 다른 아저씨들이 영대 형님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눈을 부릅뜨고 날 보고 있었다.
축구는 참 좋다. 난 네 번째 전생부터 저 아저씨에게 날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증명하기 위한 타이밍은 매번 같았다.
하지만, 경기장 상황에 따라 저 아저씨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 달라졌다.
어느 전생에서나 같은 상대와 경기를 하더라도 내용이 전부 달라진다. 이 경기뿐만이 아니다. 같은 상대라도 매번 과정과 결과가 달라지는 게 축구 경기였다.
축구 경기에 몰입할 때만큼은 실감이 났다.
나는 지금 회귀라는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다는 실감이 말이다.
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중앙 수비수 아저씨를 앞에 두고 기세 좋게 왼쪽으로 치고 나가는 척하다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트는 바디 페인팅을 선보였다.
중앙 수비수 아저씨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동시에 나는 오른발 인프론트로 강하게 공을 찼다.
공은 멋지게 휘어져 골망 구석을 출렁였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에 축구는 언제나 재미있다.
삑, 삐익!
종료 휘슬이 울렸다.
여태까지의 전생 중에 두세 번은 실패했지만, 이번은 타이밍이 좋았다.
짧은 시간 내로 방금 교문으로 들어온 영대 아저씨에게 좋은 첫인상을 줘야 편한 중학교 생활을 보낼 확률이 높아진다.
“야이, 살살 좀 하지.”
아버지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어색하게 웃고 있으니, 후보로 쉬고 있던 아저씨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방금 막 들어온 아저씨, 영대 형님이라고 불리던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현준이라고 했지? 너 우리 학교 학생이라며. 이렇게 잘하면서 축구부에서는 왜 본 적이 없을까?”
우리 학교는 사립 중학교였고, 이 아저씨는 우리 학교의 이사장이었다.
조기축구회는 축구를 좋아하는 지역 인맥이 모이는 곳, 같이 공을 찬 아저씨 중에는 중소기업 사장도 있었고 경찰서장도 있었다.
아무튼, 이분은 무척 화려한 플레이를 좋아한다.
세 번째부터 회귀 직전 전생까지 나는 한 번을 제외하고 전부 조기축구회에 들어왔고, 이사장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축구부가 아니라서요.”
“왜? 당장 들어와도 되겠는데? 태상이랑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운동을 오래 쉬어서 아직 고민 중이에요.”
이어서 아버지가 왠지 우쭐한 것 같은 태도로 이사장에게 형님 거리며 내가 2년 쉬었다는 걸 얘기했다.
이사장은 놀라는 표정을 하더니 날 아주 관심 있게 보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선선히 이사장의 물음에 답해주고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축구부에 들어가는 건 몸도 만들고 고민도 더 해보고 결정하려고요.”
“그래? 기대하마!”
이사장은 기쁜 얼굴이었다. 조기축구회에 나올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는 이사장은 우리 학교의 축구부 성적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내가 축구부에 들어가지 않으면 지금 있는 감독이 성적 부진과 선수단 관리 부족이라는 명분으로 잘리고, 이사장이 여기서 눈여겨보던 로베르토를 임시 감독으로 쓰는 것이다.
로베르토는 상당히 능력 있는 코치였기에 들어오자마자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3년 내내 감독님으로 있게 된다.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할까?”
그리고 이사장에게 화려한 플레이로 첫인상을 주는 데 성공하면 나중에 축구부에 들어갔을 때, 여러 방면으로 지원을 받기 수월해진다.
좋은 인상을 심어준 만큼 친해지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네. 냄새가 정말 좋네요.”
자연스럽게 그런 얘길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친해져 보자. 축구부에 들어갈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어느새 끼어든 로베르토까지 포함해서 아버지와 로베르토, 이사장은 육개장에 막걸리, 수육까지 즐기며 떠들었다.
나도 마시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환타나 마시면서 수육을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베르토는 헤어질 때, 가능한 한 빨리 내가 훈련할 곳을 준비해 보겠다고 말했다.
* * *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현관까지 나와 있었다.
“현준아, 어땠니?”
“현준이 미쳤어! 당장 선수로 뛰어도 되겠던데!”
“에이, 아직 아니에요.”
“겸손은! 여보가 못 봐서 그래! 얼마나 대단했는데!”
“당신한테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정말 잘 됐다. 현준아.”
어머니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리고 유난히 목소리가 높고 들뜬 아버지를 보며 정색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 송상진 씨가 술을 그렇게 처먹은 건가? 현준이가 잘한 게 기뻐서?”
“어, 어어?”
“현준이 너는 들어가서 쉬고, 오늘 고생 많았어.”
“현준아? 같이 들어가야지.”
아버지의 간절한 요청을 무시하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형 집에 있어요?”
“자기 방에서 쉬고 있을 거야. 우린 방금 점심 먹었거든. 그리고 당신은 잠깐 거기 서봐요. 얼굴이 아주 빨개지셨네?”
아버지를 뒤로하고 형 방으로 향했다. 닫혀 있는 문에 노크했다.
“들어와.”
형은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위닝 한판 고?”
“또 지려고?”
“웃기시네.”
나는 중학교 1학년, 형은 고등학교 3학년.
형과 나이 차가 꽤 나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형제는 늘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어릴 때 좀 얻어맞긴 했지만, 형은 늘 나랑 잘 놀아줬다. 공부도 잘했다. 아는 것도 많았다. 그렇기에 어릴 때부터 조금이나마 동경하고 좋아했다.
형은 벌떡 일어나서 PS2를 켜고 위닝일레븐 6을 켰다.
이건 매번 적응이 안 된다. 피파 26, 27 이런 걸 하다가 위닝 6을 하면 역체감이 너무 심하다. 폴리곤 덩어리들이 뛰어다니는 거 같달까.
하지만, 재미는 확실했다. 적응도 은근히 금방 됐고.
“국가대표 할 겨, 클럽 할 겨?”
“클럽이 좋아.”
“난 레알.”
“그럼 난 맨유.”
형은 레알 마드리드, 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골랐다.
호나우두, 베컴, 카를로스, 지단, 반니스텔루이, 긱스, 스콜스, 개리 네빌 같은 내로라하는 선수들의 이름이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많이 해서 대충 읽을 줄 알았기에 나와 형은 게임에 집중했다.
형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다가 패드를 집어 던졌다.
“와…… 송현준 왜 이렇게 잘하냐. 나 야자 할 때 연습했냐?”
“형이 못하는 거야~.”
“뭐?”
발끈한 형이 집중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위닝 6만 십 년을 한 사나이다.
“아 진짜 이거 버그 아니야? 골대를 몇 번이나 맞추는 거야.”
“또 덤벼봐.”
“본때를 보여주마.”
8-0으로 완벽하게 패배한 형은 바로 이어 하기를 눌렀다.
그리고 말없이 게임을 하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축구 다시 시작한다며?”
“응.”
“잘해라.”
형은 언제나 한결같구나.
형과 대화하면 따스함을 느꼈다. 형이 정말 다정한 사람이라 그런 걸까.
늘 툭 던지듯이 좋은 말을 해준다.
“당연하지. 나중에 형이 먹고살 걱정 없을 정도로 대박 내볼게.”
“뜬금없지만 마음에 드는 얘기네.”
“형이 평생 재수해도 괜찮을 정도로 벌 테니까 수능 그까짓 거 대충 봐도 돼.”
“이 자식 보게, 그래. 너만 믿으마.”
형은 패드를 놓고 내 머리를 막 문질렀다. 나는 빡빡머리였기에 머리가 헝클어지진 않았다.
“아, 형! 실력으로 안 되니까 이렇게 방해하는 거지!”
“뭐? 이 자식이.”
형과 게임 몇 판을 더 했다. 몇 번 봐주기도 하며 적당히 놀았다. 그리고 형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그만하자고 했다.
형은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줬다.
즐거운 주말이었다.
* * *
오늘도 새벽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은 후에 학교로 출발했다.
회귀해서 어린 몸이 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어린 몸은 정말 사기다. 치트키다. 버그다.
그렇게 힘든 강도의 운동을 했는데 몇 분이 지났다고 금세 체력이 차오르다니.
심지어 매일 느는 게 느껴질 정도로 체력이 좋아지는 속도도 빠르다.
그만큼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겠지.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지나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도착하니 박종혁이 상의를 탈의한 채로 내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친구들과 떠들고 있었다.
“야, 야, 더러운 엉덩이 치워.”
그 말에 친구들이 낄낄거리면서 동조했다.
“현준이 말이 맞지.”
“심지어 아침 훈련 때 입은 옷 그대로 입었잖아.”
“그러네. 미쳤네. 개 더럽겠다.”
“와…… 억울하네…….”
박종혁의 책상에는 운동복 상의가 펼쳐져 선풍기 바람을 맞고 있었다.
박종혁은 부들대면서도 비키지 않았고, 나는 대충 의자에 앉으며 가방을 걸었다.
“지난주에 승부 하자고 한 거. 오늘 고?”
내 물음에 박종혁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고.”
“같은 방식으로?”
“아니, 다섯 번 차서 세 번 먼저 넣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하자.”
“좋아.”
박종혁과 내 대화를 들은 친구들이 물었다.
“뭔데?”
“둘이 뭐 하는데?”
이들은 나와 박종혁을 포함해서 함께 PC방도 다니고 노래방도 다니고 성인이 되어서도 연락하는 친한 녀석들이었다.
편하게 말했다.
“토요일에 내가 얘 개 발랐거든.”
“……개 바르긴 무슨! 네가 2년이나 쉬었다고 해서 봐주려다가 꼬인 거지.”
완벽하게 당한 게 맞았기 때문에 박종혁은 양심에 찔리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뻔뻔하게 나왔다.
“웃기시네.”
무리 중 공부를 제일 잘하는 역사 마니아 지상준이 물었다.
“근데 뭐로 발랐는데? 스타?”
“축구. 슈팅 시합했거든.”
“오, 재밌겠다. 점심시간이면 구경 가도 되지?”
“당연하지!”
입을 열기도 전에 박종혁이 먼저 말했다. 말 안 해도 따라올 녀석들이라 나도 그러라고 하려고 했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박종혁한테 물었다.
“자신 있냐? 너 망신당한다.”
“으으, 내기도 하자.”
“내기? 너부터 말해 봐.”
“네 형이 가지고 있는 플스2 한 달 빌려줘.”
절대로 못 빌려주지만 이길 생각이니까.
“그래. 그럼 너는 내가 하는 운동 너도 똑같이 하기.”
“무슨 운동?”
“발목 강화 운동. 집에서 혼자 하니까 심심해서 내일부터는 교실에서 하려고. 점심 먹고 매일 할 거야. 30분 정도 할 거니까 점심시간에 놀러 다니지는 못해.”
박종혁은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점심시간에 놀 수 없다는 건 아침과 오후가 훈련으로 꽉 찬 박종혁에게 아주 큰 손실이었다.
나는 결정타를 날리기로 했다. 나는 박종혁 정도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내가 토요일에 말했던 개인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훈련 중 하나야.”
“……거짓말 아니지?”
거짓말이다.
“당연히 진짜지.”
“그러면 좋아.”
박종혁은 승부욕을 불태웠고, 흥분한 건지 웬일로 1교시부터 4교시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다. 3교시 수업이었던 정미영 선생님이 신기하게 볼 정도였다.
물론 수업을 들은 건 아니었다. 교과서를 훔쳐보니 슈팅 자세를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다. 책상 밑에 발목을 폈다 접었다 하고 무릎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걸 보니 시뮬레이션 중인가 보다.
그래도 져줄 수는 없다.
박종혁과 나는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운동장으로 나갔다.
운동장으로 나가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뭐 이렇게 많이 따라오는 거야.”
“재미있을 거 같잖아.”
같은 반 녀석 중 2/3가 따라 나오고 있었다. 급식당번이나 다른 볼일이 있는 애들을 제외하면 거의 전원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반 애들끼리 얘기하는 걸 봐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한 반의 절반 이상이 우르르 움직이니 시선이 모였다.
“너희들 어디 가니?”
지나가던 선생님이 물어보기까지 했다.
할 일 없는 다른 반 녀석들이나 여자반 애들도 하나둘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가 축구 골대 앞에 서자. 구경꾼은 수십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