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8화
송현준과 박종혁이 떠났다. 구경꾼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윤태상만은 골대 옆에 가만히 선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윤태상 주변에는 축구부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종혁이가 질 줄은 몰랐는데.”
“역시 송현준이네.”
윤태상의 머릿속에선 송현준이 때린 슛의 궤적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윤태상은 그 슛을 이상하게도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
윤태상이 고개를 돌려 동갑내기 축구부원에게 물었다.
“송현준이 그렇게 대단한 애야?”
“모르냐? 아아, 넌 모를 수도 있겠구나.”
같은 2학년인 동갑내기 축구부원, 박범철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축구부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윤태상은 이럴 때마다 자신이 동떨어진 존재라고 느꼈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고, 동갑내기 축구부원들이나 선배들 또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감독이 자신을 감싸고 돌기도 하고, 여러 문제가 있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대접받는 건 오직 실력 덕분이었다.
“송현준 쟤 초등학생 때는 괴물이었어. 야, 너도 상대해 봤다고 하지 않았냐?”
“응. 우리 팀에서는 송현준을 마라도나라고 부를 정도였어. 진짜 악몽이라니까. 덩치는 작은데 밀어도 넘어지지도 않고, 공은 발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전국에서도 유명했었지.”
“근데 왜…….”
윤태상의 의문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 그래서 박범철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소문으론 2년 전에 전국대회도 아닌 대회에서 주전으로 못 나갔다고 감독이랑 싸우고 그만뒀다던데?”
박범철은 가볍게 말했고, 다른 축구부원들도 얼마나 자존심이 세면 그러냐는 둥 왠지 뒷담화하는 것처럼 말했다.
“…….”
윤태상은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윤태상은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송현준이 훈련하는 모습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건 윤태상도 가진 것이었기에, 그는 송현준에게 동질감을 느꼈었다.
자신감?
그런 건 윤태상에게 없었고 송현준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고 윤태상은 확신에 어린 짐작을 했다.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자존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윤태상? 무슨 생각하냐. 축구 안 해?”
“응. 오늘은 쉴게.”
고상한 척하긴. 이라는 혼잣말이 아주 작게 들렸지만 윤태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는 운동장 구석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송현준의 모습을 보며, 아까 본 송현준의 슛을 떠올렸다.
그 슛은 다시 생각해 봐도 아름다웠다.
* * *
다음 날의 일과도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새벽에 공부 중인 형과 인사한다. 그리고 바로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해서 인터벌 훈련을 한다.
“안녕, 부지런하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상하게도 윤태상이 먼저 인사를 걸어와서 나도 꾸벅 허리를 숙였다. 2020년대라면 좀 풀어지겠지만, 이 시기에 규율과 예의는 중요하다.
중간에 짬을 낸 건지 박종혁도 다가왔다.
“볼 때마다 겁나게 열심히 하네. ……나도 일찍 나와서 같이 할까?”
“안 돼. 너 못 버텨. 그리고 훈련 준비해야지. 1학년 주제에.”
“지도 1학년이면서.”
“난 아직 축구부 아니거든.”
유치한 대화 끝에 박종혁은 킥킥 웃었다.
“아오. 한마디를 안 지네. 아무튼, 이따 보자.”
“오케. 고생해.”
박종혁은 훈련 장비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내 훈련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어제 오후에는 진 충격 때문인지 가끔 멍해 보였는데, 아주 좋은 징조다.
인터벌 훈련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대충 새벽 여섯 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평소대로 장비를 깔고, 코디네이션 훈련을 준비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40분 정도 전력으로 해도 그럴듯하게 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부터 심화 과정에 들어가기로 했다. 프로선수처럼 체력 관리를 할 필요가 없는 지금은 몸을 가혹하게 굴려야 할 때였다.
저절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훈련 장비를 평소와 다르게 놓았다.
스텝 레더, 칼라콘 대용 딱풀, 직접 그린 원, 시소, 그리고 씨름장에도 새로 만들어온 스텝 레더를 놓았다.
훈련 장비는 직사각형 모양이 되었다. 얼마나 힘들지 알았기에 나는 욕지기를 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따로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한 번에 연결해서 하는 것이다.
스텝도 기본적인 건 당연히 하면서 스텝의 형태를 훨씬 더 다변화했고 점프 또한 두 발과 한 발을 번갈아 뛰기도 하고 옆이나 뒤, 대각선으로 점프하는 새로운 형태도 시도했다.
그리고 난 40분 동안 지옥을 봤다.
“하…… 하악, X, 바, 진짜, 개 힘드네…….”
아무도 듣지 않을 혼잣말이라고 생각하며 누워서 중얼거렸다.
아직 한 종목이 남아 있었다. 철봉과 나를 자전거 고무 튜브로 묶고 전력 질주를 반복해야 했다. 순발력은 물론, 폭발적으로 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주 좋은 훈련이다.
상상만 해도 하기 싫었다.
“저기, 방금 뭐 한 거야? 훈련 같은데.”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을 가리며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소리도 못 냈다.
귀밑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가 내 머리맡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중력 때문에 내려오는 머리를 귀 뒤로 정리했다.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에 걸린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그녀는 품이 큰 녹색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녹색이 너무 좋아서 아이스크림도 녹차 맛만 먹는다고 했었다.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무슨 취미를 가졌는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만날 줄은 몰랐다.
-야, 송현준!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는…… 적어도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주면 안 돼?
그녀는 열 번의 전생 중 나와 세 번이나 결혼했던 여인이었다. 세 번은 모르는 사이로 나머지 세 번은 친구로 지냈다. 한 번은 아예 만난 적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눈가와 입매가 찌푸려져서 일부러 무표정으로 관리하며 상체만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바로 대답을 안 하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방해한 거면…….”
“너무 힘들어서 말이 안 나왔어요. 근데 내가 무슨 훈련을 하는지 왜 궁금해요?”
그녀가 왜 내게 관심을 보였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회귀를 여러 번 하다 보면 가끔 대화를 건너뛰어 상대에게 의심을 사는 경우가 있었기에 대화는 늘 단계를 밟으려고 한다.
“나도…… 축구를 하거든. 11대 11은 아니고 5대 5 정도로. 풋살이라고 하는데.”
“그렇구나…… 그런데 왜 반말하세요?”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후, 상식적으로 궁금한 걸 물어봤다.
보통 그녀와는 학교에서 만나기에 같은 학년인 걸 알고 말을 텄었다.
근데 지금은 처음 만나는 거고, 나는 학교 체육복도 아닌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같은 학년이잖아. 어제……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너랑 박종혁이랑 운동장에서 내기하는 걸 구경했는데…… 내가 중간에 공도 던져줬었고.”
“아.”
긴장과 회귀 정신병이라는 먹구름 때문에 흐려졌었던 기억이 되돌아왔다. 맞다. 그때 한 여자애가 공을 던져줬었다.
박종혁은 중학교 1학년인데도 벌써 키가 180㎝가 넘어서 눈에 띄었고, 활발하기도 해서 학교에서 꽤 유명했기에 학년을 알아보는 것도 말이 됐다. 뭣보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름표도 달고 있으니까 이름을 알아낸 것도 납득했다.
“그렇구나. 그럼 나도 반말한다?”
“좋아.”
“풋살 한다고?”
“응. 오빠랑, 오빠 친구들이랑 거의 매주 해.”
“그래서 무슨 훈련하는지 궁금하다고?”
“맞아. 몇 가지는 오빠가 하는 걸 본 적도 있고 해본 적도 있는데, 너는 엄청 다양하고 이상한 동작까지 하는 것 같아서…… 너무 궁금해서 못 참았어.”
김채아가 쪼그려 앉았다. 호기심 가득한 두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의식중에 눈길이 가서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장비를 가리켰다.
“축구를 할 때 늘 앞으로 뛰는 건 아니잖아? 옆으로 뛰어야 할 때도 있고 뒤로 갑자기 몸을 돌아야 할 때도 있고, 점프해야 할 때도 있잖아?”
“아!”
끝까지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김채아는 내가 깔아놓은 장비들의 모양과 내가 훈련하던 모습을 합쳐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해해서 기쁜 건지 그녀는 입가를 꿈틀대며 내 조잡한 훈련 장비들을 재미있다는 듯 보기 시작했다.
김채아는 운동을 몹시 좋아하는 만능 스포츠인이었고, 처음 보는 운동이나 훈련을 배우고 원리를 깨우치는 걸 정말 좋아했다.
지금 키는 나보다 더 큰 171㎝, 근육도 상당한 편이었기에 아직 성장기가 제대로 오지 않은 남자애들을 신체 능력만으로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기도 해서 어느 운동이든 만능으로 잘한다.
‘어떻게 한다…….’
그녀가 생각에 빠진 걸 기회로 나 또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김채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만날까? 말까? 하는 오만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김채아와 아예 만나지 않는 게 그녀에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다.
행복한 경험도 있었지만, 불행한 경험도 있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그냥 둬도 그녀는 잘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너 되게 똑똑하다! 그렇게 훈련하면 효과가 엄청 좋을 거 같은데!”
생각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김채아는 벌써 생각에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외국 훈련법을 찾아서 흉내 낸 거야.”
“찾은 게 대단한 거지! 나 잠깐 해봐도 돼?”
“응.”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면, 실제 경기에서…… 와. 진짜 대박이네.”
의도적으로 피하지만 않으면 그녀는 좋은 친구이자 개인 훈련 파트너가 된다. 원래라면 여름방학 동안 축구부에서 자리를 잡고 2학기에 처음 만날 기회가 생긴다.
근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된다니…… 예상치 못한 만남에 머리가 복잡해지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날려 버렸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김채아와 1학기에 만난 건 처음이었다. 지금의 만남이 김채아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한낱 인간인 나는 예상할 수 없었다. 나비효과라는 건 참 무서운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당장 내가 컨트롤할 수 있도록 김채아와 접점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김채아는 대개 다른 종목의 운동선수가 되지만, 나와 연인이 되든 친구로 남든 적극적으로 날 지지해 주는 지인이었으니까.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에 내 편이 될 사람은 하나라도 많은 게 좋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엉덩이의 모래를 탈탈 털었다.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내가 그려놓은 원 앞에서 고민하는 그녀에게 어디서 점프해서 어디로 떨어지는 걸 목적으로 해야 하는지 설명해 줬다.
“공을 던져줘서 헤딩이나 트래핑으로 연결할 수도 있고, 온갖 상황에서의 패스도 연습할 수 있어. 코디네이션 훈련이라는 건 정말 다양하거든. 아, 근데 혼자서 내가 설명한 걸 다 하긴 어려워.”
김채아가 내가 원하는 말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말마다 풋살을 하거든?”
김채아는 예상대로 떡밥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그리고 나도 아침마다 운동을 해.”
그렇지. 근데 보통 공원에서 하니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고. 원래는 2학기에 내가 공원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김채아는 막상 얘기를 꺼내려니 쑥스러운지 머뭇대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운동을 좋아하는 마음이 부끄러움을 이긴 것이다.
“네가 하는 훈련…… 같이 하면 안 될까? 나 풋살 더 잘하고 싶은데.”
그녀는 운동 센스가 정말 좋다. 얼마나 좋냐고 하면 다른 스포츠의 국가대표까지 올라갈 정도다.
개인 훈련 파트너든 그녀에게 새 길을 찾아주든 다시 연인이 되든.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면 일단 내일 나와 볼래? 해보고 정하는 게 좋잖아.”
“정말? 그래도 돼?”
“응, 같이할 사람이 있으면 더 다양한 훈련을 할 수 있거든.”
김채아가 바닥에서 아주 살짝 뛰었다. 기쁘다는 몸짓이다. 그 모습을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채아와 내일 새벽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 고무 튜브로 하려고 했던 운동은 저녁에 벌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