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0화
정미영 선생님은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 1분 전에 교실을 떠났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선생님이 서 있었던 교단에 올라갔다.
돌발적인 행동에 반 친구들은 전부 날 쳐다보게 되었다.
일부러 교단을 양 손바닥으로 내려쳐 소리를 냈다.
시선이 한층 더 집중됐다.
전생의 데이터를 종합해서 가장 잘 먹혔던 말부터 꺼냈다.
“얘들아,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은근히 눈치 받으시는 거 알아?”
“뭐?”
“우리가 중간고사 꼴찌 했다고 다른 선생님들이 눈치 많이 주더라.”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하지만, 우리, 1학년 2반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장실이 급해 보이는 발짓을 하는 몇 명이 있었지만, 미안하다. 무시하기로 했다.
“요즘 내가 교무실에 자주 가잖아. 거기서 다른 선생님이 비꼬는 걸 자주 봤어. 그 선생님들은 농담이라고 하겠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별로 안 좋으시더라. 늘 그렇듯이 웃으시긴 했지만.”
친구들의 심기가 불편해진 게 보였다. 우리 반의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미영 선생님을 좋아했다.
열심히 하고, 장난도 잘 받아주고, 수업도 재미있고, 우리를 신경 써주는 게 느껴지는 선생님이었으니까.
반장 김현호를 비롯한 몇몇도 한마디씩 했다.
“나도 교무실 갔다가 본 적 있어.”
“나도.”
“난 저번에 화장실 앞에서 들었어.”
나는 없는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신참인 선생님에게 다른 선생님들이 훈수라고 몇 마디 하는 걸 실제로 듣기도 했다. 전생들도 많다 보니 잘 알았다.
동기부여를 위한 충분한 이유가 반 친구들에게 알려졌다.
그래서 난 본론을 꺼냈다.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우리 학교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보다 체육대회를 더 중요하게 본대.”
아는 선배나 형 누나가 있는 친구들이 또 동조해 줬다.
분위기가 또 한 번 단단하게 만들어졌고, 나는 이어서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일 얘길 꺼냈다.
“난 지난달에 선생님이 축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 그래서 이번 체육대회 때 열심히 하려고 해. 다 같이 열심히 하자는 얘길 하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 너희들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한두 명씩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한국사 자격증 따 보라고 알려주셨어.”
한국사를 좋아하는 지상준에게는 한국사를 더 깊게 공부할 수 있도록 자격증을 따 보라고 안내했고,
“책 목록 추천받았어.”
철학에 관심 있는 친구에게는 대학교 인맥을 통해 전국 도서관에서 쉽게 찾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들을 알려 줬다고 했다.
“난…… 정보 영재 다니고 있어…….”
컴퓨터를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이 시절 유행했던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영재 교육을 제안했다.
그 외에도 선생님에게 조언이나 도움을 받은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애들이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가 나와서 다행이었다.
다 선생님이 해온 행동 덕에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거였다.
전생의 선생님이 말했다.
더 깊게 공부하고 싶으면 그럴 수 있는 방향을 알려주고, 새로운 걸 찾고 싶으면 박람회 같은 데를 데려갈 거라고. 관심이 생긴 분야가 있다면 그걸 접할 수 있게 도움을 주겠다고.
자기는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했다. 거절해도 괜찮으니까 이런 방향이 있다는 건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수업을 가르치는 것보다 인생에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선생님이라고 했다.
나도 그런 도움을 받았던 제자였다.
마치 간증회 같은 친구들의 말들이 잦아들었고, 나는 말을 계속했다.
“내가 감독을 하겠다고 한 건, 우리 반이 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서야. 축구 나가는 애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할게.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도 열심히 알려줄 거야.”
축구에 나가는 친구들이 기대된다는 얼굴을 하거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나게 생겼다.
“다른 종목 나가는 애들도 다 열심히 하자고. 그냥 그 말을 해야겠다 싶어서 급발진했네…… 갑자기 부끄럽다. X발…….”
나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너무 나댔지.”
“맞아 맞아.”
“빨리 들어와!”
“말끝났으면나이제화장실가도되냐?심각한데.”
친구들의 장난스러운 말들과 화장실이 급한 박종혁의 말에 모두 웃었다.
적당히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아.”
깜빡하고 못 한 말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교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일어나던 박종혁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승하면 반 전체가 고기 회식할 수 있게 상금 준다더라. 잘해보자고.”
“고기? 진짜? 리얼로? 구라 아니지?”
“엉. 꼭 고기가 아니어도 치킨이나 피자 회식도 가능하겠지.”
“치킨?”
“피자?”
“탕수육은?”
“그것도 되겠지?”
내가 전에 했던 감동적인 말들보다 방금 말에 반 친구들이 더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선생님보다 잿밥에 더 관심 많아 보였지만, 상관없을 것이다. 체육대회만 의욕 가지고 잘해 주면 되니까.
“고기!”
“치킨!”
“피자!”
“탕수육!”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런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중학생의 광기는 어마어마했다. 다음 쉬는 시간에도 그다음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반응이 어이가 없었다. 물론, 반 친구들이 저럴 때마다 피식거렸다.
* * *
수업 시작종이 울리는데도 정미영은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그녀는 교실이 아닌 교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 모처럼 수업이 없는 시간이었다. 정미영은 이 여유시간을 어떻게 쓸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교무실 문을 열었다.
“오, 정 선생님.”
회의용 탁자에서 정미영을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수업 없어요? 같이 커피나 마실래요?”
“너무 좋아요!”
김은주 선생님.
50대의 가정과목 선생님으로 어린 선생님들에게도 늘 존댓말을 해줘서 정미영을 비롯한 젊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어, 제가…….”
“내가 타 줄 테니까 앉아요. 커피? 아니면 홍차?”
“그럼 커피로요…….”
김은주는 존댓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어린 선생님들을 같은 선생님으로서 존중해 준다.
다른 나이 든 선생님들이 젊은 선생들을 막 대하는 걸 보거나 경험해 본 정미영으로서는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인연도 있어서 정미영이 가장 의존하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김은주가 커피를 내왔다. 정미영은 양손으로 공손히 커피를 받아서 자기 앞에 놓았다.
“정 선생님 반은 체육대회 종목별로 다 뽑았어요? 나 담임할 때는 애들이 안 하려고 해서 골치 아팠었는데.”
“다행히 다들 정말 적극적이라서 아침에 뽑았어요.”
“정말요? 기분 좋겠네요. 애들이 열심이면 일할 맛 나죠.”
“맞아요. 특히…….”
“특히?”
“현준이라고 기억하세요?”
김은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얘는 축구 그만둔 게 너무 아쉽다고 정 선생님이 걔가 다니던 초등학교까지 찾아갔었잖아요.”
“맞아요, 맞아.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어요.”
정미영은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던 송현준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어땠는데요?”
“축구부에 다시 들어가진 않았지만, 저번에 애들 얘기 들어보니 종혁이랑 축구로 내기도 했다고 하고, 혼자 연습도 한다고 하고…… 점심시간마다 종혁이랑 운동한다고 하고…… 참 열심인 것 같아요.”
정미영은 송현준이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송현준은 그녀에게 꽤 특별한 제자였다. 그녀는 송현준이 열심히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옛 생각이 많이 나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어리니까 얼마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잖아요?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요. 근데 현준이는 제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잘 해내고 있어요. 정말 뿌듯해요.”
“그래요?”
“솔직히 좀 걱정이었거든요. 담당해야 할 학생은 너무 많고, 저는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린 어른일 뿐이니까…… 제가 어수룩하게 해서 학생이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걱정 많이 했는데 현준이가 확 변해주니까 자신감이 막 생겨요.”
“어린 어른이라…… 그렇죠. 맞는 말이죠. 그래도 말이에요.”
김은주는 양 팔꿈치를 책상에 올려 손깍지를 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었네요. 정 선생님이 학생일 때는 참 귀여웠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는.”
“아유, 선생님!”
정미영은 약 10년 전에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
김은주는 정미영이 중학교 1학년 때 어땠는지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은주가 교직 생활을 하며 본 학생 중 가장 극적으로 변했던 케이스였기 때문이었다.
김은주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툭하면 눈에 멍이 들어 있질 않나, 창문을 깨질 않나, 친구들이랑 장난친다고 소화기를 뿌리질 않나, 등교 거부하고 학교에 안 나오려고 하질 않나…….”
“아악! 제가 잘못했어요. 선생님. 그만하세요…….”
“싸움닭이었죠. 싸움닭. 정 선생님이 1학년 때 내가 담임으로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안다니까요. 그만 좀 놀리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호호.”
김은주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학생들의 변화, 그것도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교사라는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었다. 그렇기에 정미영은 김은주에게 있어 최고의 제자였다.
“부끄럽네요. 차 선생님과 김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그랬을 거예요.”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어머니는 도박중독자. 정미영의 어린 시절은 방황으로 점철돼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불량배들과 함께 놀았고, 어른들을 골탕 먹이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른이었고, 정미영은 어른이 싫었으니까.
학교에서는 학교의 어른들인 선생님들을 놀려 먹기 위해 애썼었다.
“차 선생님이 다 했죠.”
“김 선생님은 시간 내서 공부도 알려주시고 문제집도 챙겨주셨고 제 생활도 도와주시고…… 두 분 다 고마운데 어떻게 급을 나눠요~.”
김은주는 피식 웃고 말했다.
“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아무튼, 정미영 선생 요즘 하는 거 보면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보람을 느낀다니까요. 호호.”
“……예에에.”
정미영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회식에서는 별말 없어서 아쉬워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뿌듯함도 같이 느꼈다.
“차 선생님한테도 얘기해 줘야겠어요.”
“아, 안 돼요.”
“에이, 이런 건 비밀로 하기 아깝죠.”
“……제가 직접 할 거예요.”
“아이고 귀여워라.”
정미영은 차 선생님을 떠올렸다.
차 선생님은 친동생과 함께 사업을 한다고 교직을 그만두고 다른 지역에 가 있었다.
정미영이 선생님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밥 한 끼 먹기로 했지만, 올 한 해는 해외 출장이 잦다고 해서 어려울 것 같았다.
차 선생님은 그 당시 선도부 담당으로 땡땡이를 치거나 놀러 다니는 정미영을 지독하게 쫓아다니며 갱생시키겠다고 외쳤었다. 심지어 주말에도 쫓아오고, 집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집안 사정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차 선생님은 김은주와 함께 기초학력이 떨어지는 정미영을 비롯한 불량배들을 붙들어놓고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
일부는 다시 일탈했지만, 정미영은 생각보다 공부에 적성이 맞았다. 일탈하려고 할 때마다 집안 사정을 본 차 선생님과 김 선생님이 거의 반강제로 붙잡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래서 정미영은 2학년 때는 교내 최고의 모범생이 되었고, 3학년부터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선생님이 되었다.
정미영은 과거의 기억을 쭉 떠올리다가 빠져나왔다. 옛날 일을 떠올리는 건 좋았지만, 지금은 김은주랑 얘기 중이었으니까.
“우리 반 애들은 활기차서 재미있어요. 저처럼 사고 치는 애도 없고.”
“2반 애들이 재미있긴 하죠. 수업할 때 반응이 참 좋다니까요.”
“근데 중간고사 성적이…… 아우.”
얘기하다 보니 이런 주제까지 나왔다. 담임으로 맡은 반이 전교 꼴찌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는데 정미영은 그걸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딱히 눈에 보이는 불이익은 없었다.
-정 선생, 좀 더 열심히 해 봐. 처음이니까 이것저것 시도해 봐도 좋겠고.
교감한테 분발하라는 소릴 수시로 들었고.
-기합을 한 번 주면 성적이 좋아지던데.
-50점 밑으로는 보충수업 시켜~.
툭하면 훈수도 들었었다.
“기말고사 때는 잘하겠죠. 정 선생님은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남은 건 학생들을 믿는 일뿐이에요~.”
그리고 지금처럼 응원을 들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전부 묘하게 기분이 우울해졌다.
자신이 맡은 애들이, 좋아하는 애들이 꼴찌를 했다는 게 기분 나빴다.
공부라.
그러고 보면 현준이가 요즘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
여러모로 눈이 가는 학생이었다. 발로 뛰어서 계기를 만든 첫 제자기도 했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눈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운동하느라 힘들 텐데도 수업 태도가 아주 좋다고 다른 선생님들까지 칭찬해 오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두 일을 양립하는 건 정말 어려운데, 생각할수록 대단한 제자였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교무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