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5화
‘진짜 병인가 봐.’
김채아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송현준의 목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런 거로 사과하지 마. 귀여웠어.
소리 지르면서 발버둥 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이런 말을 들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귀여웠어.
-귀여웠어.
-귀여웠어.
머릿속을 맴돈다. 자꾸.
“채아야? 채아야? 내 말 듣고 있어?”
“아, 미안,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정말? 머리 아픈 거야? 오늘 자꾸 멍했잖아.”
“새벽에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이지혜와 김혜진이 김채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정은영은 조용히 미소만 지은 채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늘 이렇게 넷이 같이 다녔다.
“…….”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이 원인이긴 했다. 의표를 찔린 탓인지 김채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정을 모르는 이지혜는 김채아의 얼굴을 살폈고, 김혜진은 김채아의 손을 만지면서 말했다.
“차갑진 않은 거 보면 체한 건 아닌 거 같은데…….”
“괜찮아. 네 말대로 오늘 새벽 운동 때 너무 무리한 거 같아.”
“그럼 우리 오늘은 걷지 말고 여기 앉자.”
김혜진은 그대로 김채아의 손을 잡고 스탠드에 앉았다.
지금은 점심시간, 학생들은 경찰과 도둑 같은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뛰어다니거나 축구나 농구를 하거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채아의 무리도 수다를 떨며 산책하기 위해 스탠드 위를 걷고 있었던 참이었다.
김채아와 친구들은 운동장에서 여러 스포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채아야, 좀 나아?”
김혜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더 괜찮아진 거 같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다행이다.”
이지혜가 김채아의 안색을 다시 한번 살핀 후에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후, 이지혜가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마 채아야……. 너 체육 시간 때 하는 거 보면 진짜 멋있긴 한데 다칠까 봐 조마조마해.”
“하하…….”
김채아는 뒤통수를 살살 긁었다.
김혜진이 이지혜의 말에 공감했다.
“솔직히 완전 멋있긴 해. 남자애들보다 공이 훨씬 빠르고 자세도 막, 선수들처럼 우아하고.”
이지혜가 관심을 보였다.
“남자애들보다?”
“응. 교회에서 남자애들이랑 같이 피구 해봐서 아는데 비교도 안 돼. 채아가 피구 예선전 때 하는 거 보면 너무 멋있어서 비명이 절로 나온다니까. 채아가 짱이야. 채아가 제일 세.”
“채아는 어떻게 그렇게 운동을 잘해? 저번에 배구 수행평가 때도 체육 선생님이 놀라서 말도 더듬었잖아.”
김채아는 말없이 웃었다. 조용히 있던 정은영도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 다음엔 채아한테 운동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할까? 배드민턴 같은 건 우리끼리도 할 수 있잖아.”
김채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이지혜와 김혜진의 이어지는 말에 열리려던 입술이 다물렸다.
“싫어~ 모래랑 먼지 묻잖아.”
“뛰면 땀나고 힘들기도 하고.”
“그렇지.”
김채아는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빠랑 오빠 친구들이랑 주말에 운동하는 거로도 충분해.”
“그래?”
정은영이 김채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김채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김채아는 언제나 그랬다. 방금 정은영의 제안에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관심이 있었지만, 주변 분위기에 맞춰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채아는 우리랑 뭔가 다른 거 같아. 그래서 멋있지만.”
“맞아. 채아는 아이돌 같은 데도 관심 없고 귀여니 소설도 오글거린다면서 안 읽었잖아. 다른 로맨스 소설도 안 읽어주고.”
김채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얼마나 재미있는데.”
“진짜 진짜. 아쉬워 죽겠어. 같이 얘기하면 좋을 텐데…….”
둘은 그렇게 말하며 금세 방금의 화제는 잊고 요즘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 얘기로 빠져들었다.
김채아는 조용히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김채아를 빤히 바라보던 정은영도 로맨스 소설 얘기를 거들기 시작했다.
로맨스 소설에서 어느덧 이야기는 선생님들 몰래 쓰기 시작한 화장품 얘기로 바뀌었다.
김채아는 이야기가 몹시 지루해 운동장을 계속 바라보았다. 골을 넣고 기뻐하는 학생이 보였다. 저기 끼면 재미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채아 너는 화장품 쓰거나 비법이라도 있어? 피부가 무슨 도자기 같다니까?”
“……비법 있지. 우리 엄마 비법.”
그렇다고 대화에 못 어울리지는 않았다.
“물을 평소보다 두 배로 마시는 거야. 그러면 피부에 안 좋은 노폐물이 배출돼서 피부가 깨끗해진대.”
“정말?”
“응, 나도 맨날 물 많이 마셔. 우리 집은 화장품 쓰는 것보다 물 먹는 게 좋다고 할머니 때부터 그랬거든.”
“어머니나 할머니도 피부가 좋으셔?”
“응.”
“와아!”
김채아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화두로 재잘거리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다시 딴생각에 잠겼다.
마음 편하게 이야기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어려웠다. 이럴 때마다 김채아는 소외감을 느꼈다.
예쁜 옷을 사고, 화장품이나 향수에 관심을 가지고, 로맨스 소설책을 보며 연애를 상상하거나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보이 그룹을 따라다니고 응원하는 모든 문화가 잘 맞지 않았다.
김채아는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고, 남자들이 주로 즐기는 취미가 재미있었다.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여러 운동을 하며 자라서 그런 거라기에는 자기가 오빠를 끌고 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기에 타고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주변 신경 안 쓰고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온갖 운동을 즐겼다. 그 친구들은 대부분 남학생이었다. 저학년 때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어울려 놀아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학년이 점점 올라갈수록 달라졌다.
미묘한 분위기가 생겼다. 남녀 함께 어울려 다니는 무리도 있었지만 그건 소위 말하는 ‘일진’ 같은 부류였고, 김채아는 그쪽 친구들과도 잘 지냈지만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보통의 학생들은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놀곤 했다. 그리고 다른 성별과 대화하는 모습만 보여도 진지하게 놀리는 경우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김채아는 여자 무리와 남자 무리 둘 다와 친했지만, 여자 무리 쪽이 더 좋았기에 남자 무리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학교에서 운동을 하는 경우도 점차 없어졌다.
운동 얘기를 꺼내면 다들 어색하게 웃었기에 그런 얘기도 잘 꺼내지 않게 되었다.
같이 운동해 줄 오빠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그냥 주변에 자기를 맞추면서 살고 있었다. 가끔 반에서 말뚝박기 같은 걸 하면 재밌게 하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구조적으로 체육 시간 외에는 운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녀가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은 아침에 혼자 공원에서 공을 차거나 달리기를 하고, 주말에 오빠의 친구들과 함께 풋살을 할 때뿐이었다.
예전에는 야구도 하고 배구도 했었는데 2002년 월드컵 이후로는 언제나 풋살이었다.
김채아는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주변 눈치를 보면 가짜 친구밖에 안 생겨. 자연스럽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해.
송현준이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나쁘지 않다는 건 엄연히 말하면 좋은 것과 달랐다.
난 지금 괜찮은 게 맞는 건가? 그런 의문이 수시로 떠올랐다.
송현준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그날 김채아는 공원에 가려고 했는데, 동네에서 유명한 정신이 이상한 할아버지가 공원 입구에 있었다.
괜히 찝찝해진 김채아는 기분전환 삼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새벽 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변덕이었다.
이상한 훈련을 하고 있는 남자애를 만났으니까.
그날 말을 걸길 잘했다고 요즘 자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동갑내기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동갑내기…… 맞나?’
사실 송현준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냥 축구를 좋아하는 애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유명한 박종혁을 이겨 버리질 않나, 신기한 훈련법을 많이 알고 있질 않나, 오늘 아침에는 그런 말을 해주질 않나.
‘아으…….’
모르겠다. 어렵다.
다행히 정은영이 학교 끝나고 상담해 주기로 했다.
정은영은 이 중에 가장 어른스러운 애였고, 가끔은 속을 들여다보는 거 같아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였다.
“예비 종이다. 이제 들어가야겠는데.”
“응.”
정은영의 말에 김채아는 가장 먼 저 일어나서 엉덩이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교실로 향하기 위해 뒤를 돌았다.
“어?”
“어?”
방금까지 생각하던 송현준이 마침 김채아와 친구들의 뒤를 지나가고 있었다. 송현준의 친구들과 함께.
“뭐야, 아는 사이야?”
송현준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남자애가 송현준에게 물었다. 송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김채아에게 인사했다.
“안녕. 뭐 하고 있었어?”
“어, 안녕…… 그냥 친구들이랑 얘기하고 있었어.”
김채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방금까지 생각하던 남자애가 눈앞에 있으니 사고회로가 전부 얽혀 버린 것이다.
“그래? 우리는 축구 예선 마지막 경기 있어서 미리 나왔어.”
“아! 너희들이 1학년 2반에서 축구 나오는 애들이구나! 어제 경기 잘 봤어! 잘하더라!”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울 때 관심 있고, 아는 내용이 나오면 목소리가 높아진다. 김채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현상을 겪고, 행동한 후,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송현준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친구나 송현준의 친구들은 칭찬을 받아서 좋은지 헤벌쭉해서 고맙다고 말했다.
김채아는 너무 송구스러워서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면서 오늘 경기 잘하라고 말해줬다.
송현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김채아. 너무 칭찬하지 마. 얘네 거만해진다고.”
“예예, 감독님. 감독님 말씀 명심하고 침착하게 잘하겠습니다~.”
송현준의 친구들이 그 말에 호응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김채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김채아의 친구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며 김채아와 송현준을 번갈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송현준은 그 모습을 쭉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수업 들어가야지. 우리는 가볼게.”
“어, 응.”
“잘 들어가~.”
“응, 너도 잘해…….”
송현준과 친구들이 사라졌다. 김채아는 질문 세례가 두려워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김채아의 친구들은 그녀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걔 누구야?”
모두의 눈빛을 보니 어중간한 거짓말로는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채아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나랑 같이 가끔 축구 하는 애야.”
“괜찮게 생겼던데.”
“채아가 남자애한테도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어.”
김채아는 순간 이지혜와 김혜진이 무슨 얘길 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얼굴이 새빨개져서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뭐?! 무슨 소리야! 아니야!”
“뭐야~ 반응 너무 재밌잖아.”
“수, 수업 가야지!”
김채아는 목소리를 높이며 더 빠르게 걸었다. 이지혜와 김혜진은 총총걸음으로 김채아를 쫓았다. 그리고 정은영은 가장 뒤에서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중얼거렸다.
“아하. 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