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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17화 (17/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7화

[아아, 이사장입니다. 오늘은 기다리던 체육대회 날입니다.]

“왠지 이사장님이 기다리던 체육대회 같다는 말 같지 않냐?”

내 말에 박종혁과 주변 친구들이 큭큭 하고 웃었다.

“조용히!”

“네!”

선생님의 지적에 자세를 고쳐 앉고 방송에 집중했다.

[체육대회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여러분의 안전입니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언제나 안전을 신경 써야 합니다.]

조기축구회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한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사장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스탠드 중앙 본부 앞에 양호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치면 바로 와서 치료를 받으세요. 혹시 친구가 움직이지 못한다면 부축해서 데려와야 합니다. 친구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죠?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양인이니까요.]

이사장의 연설은 길지 않았다.

[그럼 이사장의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운동장으로 나와서,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을 마치면 저와 교장 선생님의 지겨운 연설 없이 바로 체육대회를 시작할 겁니다.]

“오오오오!”

반 친구들이 책상을 두들기며 환호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생님의 입가에도 미소가 얹어져 있었다.

[그럼, 차례를 지켜 운동장으로 나와주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예!!!”

반 친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선생님이 맨 앞에 앉은 반장 김현호를 불렀다.

“현호야. 우리 자리 알려줬지?”

“네!”

“그럼 나가자, 우리 반이 가장 먼저 나가야 해. 다들 일어나!”

우리 학교 학생은 전국에서도 엄청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운동장으로 나갈 때는 선생님들끼리 순서를 정해서 운동장에 나갔다.

우리는 일어나서 우르르 나갔다.

반별로 개성 있는 복장을 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축제 느낌이 났다. 축제 맞긴 하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전부 들떠 보였다.

운동장에 도착했다.

전교생이 나오니 운동장이 꽉 찼다. 특히 준비운동을 위해 다 같이 거리를 벌리고 서니 빈틈없이 가득 찼다.

다 같이 국민체조를 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자, 체육대회를 시작합니다. 1학년 줄다리기 선수들은 나오고, 2, 3학년 학생들은 스탠드에 앉으세요.]

수많은 학생이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은근히 장관이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1학년 줄다리기 선수들은 나오세요. 2학년 씨름 선수들도 준비하고요.]

우리 반에서 한 덩치 하는 친구들이 모였다.

“잘해라.”

나는 그중 나와 박종혁, 지상준과 특별히 친한 송시환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들겨줬다.

“오늘만큼은 네가 그냥 돼지가 아니라 근육 돼지라는 걸 보여줘.”

“후후, 나만 믿어.”

이때만큼은 그저 많이 먹는 돼지가 아닌 듬직한 장군처럼 보였다.

줄다리기를 잘하는 방법도 2020년대에 나올 드라마에서 보긴 했는데 딱히 안 알려줬다.

그렇게 하나둘 손대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사실을 전생들에서 배웠거든.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내 종목인 계주와 닭싸움에서 우승하고, 축구 애들이 잘해주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줄다리기하는 친구들을 응원하기 위해 정미영 선생님과 반장 김현호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치킨! 피자!”

반 애들이 줄을 당길 때마다 특이한 기합으로 응원을 시작했다.

몸을 튕겨 줄을 당기는 타이밍이 멈추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피자아아앗! 힘내라!”

나는 배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아 크게 소리쳤다. 다른 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열한 번째 체육대회이자 마지막 체육대회다.

나는, 우리는 체육대회를 전력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 * *

여러 종목을 하루 안에 치러야 한다는 특성상 체육대회는 여러 종목을 동시에 진행한다.

그래서 나는 축구 준결승 경기가 시작하고 후반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최고! 다들 수고 많았어!”

정미영 선생님이 우리에게 양 엄지를 내밀었다. 박종혁, 나, 그리고 두 명은 방금 계주 예선전을 치르고 오는 길이었다.

“마지막에 들어갈 때 못 봤는데 어떻게 됐니? 예선 통과한 건 알아.”

선생님의 질문을 들은 박종혁이 양손을 허리에 짚으며 가슴을 폈다.

“당연히 1등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박종혁은 팔팔했고, 계주 2, 3번 주자인 친구들은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적당히 땀이 나서 기분 좋은 상태였다.

“역시 우리 종혁이! 동주도, 민국이도, 현준이도 잘했어!”

“감사합니다. 경기는…… 이기고 있네요.”

멀리서 볼 때 경기력도 괜찮아서 크게 걱정은 안 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이기고 있는 걸 보니 안심됐다.

3-0으로 우리 반이 이기고 있었다.

“오, 송 감독님 오셨다.”

농담을 하면서 장난칠 여유도 있어 보였다.

나는 골키퍼를 보고 있는 지상준의 뒤편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다들 헛소리하지 말고 집중이나 하라고 해. 무리하다가 다치지 말고. 결승전 남았으니까.”

“전달해?”

“응. 상대 팀 자극하지 않게 부드럽게 말 바꿔서.”

“아니, 지금 정신없어. 그냥 네가 부드럽게 말해봐. 그대로 전해줄 테니까.”

“아 놔, 심호흡 다섯 번씩만 하라고 해줘.”

“간단하고 좋네. 너희들!!! 송 감독님께서 심호흡 다섯 번씩만 하래!!!”

지상준은 중앙 맨 뒤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김현호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내 말을 전달했고, 4연승 즈음부터 내 말을 신봉하는 친구들은 전부 조심스럽게 경기하기 시작했다.

축구를 하지 않는 반 친구들과 구경꾼들이 지루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전, 후반 20분씩이라지만 하루에 두 번 경기를 해야 하는 거라 체력 관리는 중요했다.

나는 선생님의 옆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우리가 느릿하게 움직이더라도 열정적인 응원을 멈추지 않았다.

결승전도 이대로 순조롭게 가면 좋을 텐데.

4강전에서 2학년 5반을 만날 수도 있었지만, 결승에서 만난다. 이번에는 운이 좋다.

지난번 마지막 예선 경기에 배영호와 지상철이 우릴 염탐하고 간 걸 봤다. 전생에서 세 번 이랬던 적이 있었다.

4강에서 만나든 결승에서 만나든, 배영호와 2학년 5반은 우리와 만났을 때 귀찮은 상대였다.

두 번은 경기를 거칠게 해서 우리 팀 선수를 다치게 했고, 한 번은 이사장에게 후반전에 축구부를 투입하는 건 어떻냐는 제안을 했었다.

저쪽 팀은 축구부 선배인 박범철이, 우리 팀은 계주를 뛰지 않은 박종혁의 짝꿍이자 축구부인 엄태영이 출전하곤 했었다. 그렇게 해도 우리가 늘 이겼다.

무슨 상황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 있게 이 주 동안 예비 명단 친구들도 함께 훈련해 왔기에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또 다른 변수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대처할 거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이미 4강에서 승리하고 결승전에 올라간 2학년 5반의 담임, 배영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배영호가 박범철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 * *

“우리보다 쟤네가 잘하는 거 같지 않아?”

“에이, 선생님. 해봐야 아는 거죠.”

배영호의 투덜거림에 박범철이 답했다. 배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쟤넨 1학년인데도 지금 4-0 된 데다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있잖아.”

“에이, 우리랑 하면 모르죠.”

배영호는 대답 없이 1학년 2반의 경기를 노려보았다. 박범철은 그 옆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친구들이랑 잘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르더니 투덜거리고 앉아 있다. 귀찮았다.

배영호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배영호는 좋게 말하면 자기가 인정한 학생은 대접해 주는 선생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학생은 무시로 일관하기에, 나쁘게 말하면 차별하는 선생님이었다.

박범철은 축구부였고, 배영호가 대접해 주는 학생 무리에 있었다.

박범철은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다.

“얘들아! 천천히 하자!”

마침 송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반 친구들에게 얘길 들은 적은 있었다. 송현준이 1학년 2반의 감독을 맡아서 축구를 가르치고 있다고. 물론,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잊고 있었다.

박범철은 초등학교 시절 자기와 경기를 뛴 적도 있는 송현준이 저러고 있는 게 신기했다.

“쟤는 뭐 저런 걸 하고 있대.”

배영호가 반응을 보였다.

“송현준 알어?”

“당연하죠. 초등학교 때 엄청 잘했었어요.”

“너보다 훨씬?”

“…….”

순간, 박범철이 입을 다물었다. 배영호는 박범철이라는 학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반과 담임이 유지되는 이 사립 중학교의 시스템 덕분이었다.

2년째 봐 오기 때문에 박범철의 자존심이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재능이 뛰어난 윤태상 같은 학생한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지상철에게 들어보니 송현준도 초등학교 때 한 축구 했었던 모양이었다. 배영호는 그걸 건드려 보기로 했다.

“박범철아.”

“네?”

“너는 우리 애들 축구 가르쳐서 저렇게 만들 수 있냐? 하루 만에.”

박범철은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는지 굳은 표정을 풀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힘들 거 같은데요.”

“송현준이는 했다던데? 첫 경기부터 저 특이한 전술을 썼대.”

배영호는 이미 축구에 나갈 선수들에게 결승전 때는 거칠게 경기하도록 유도했다.

1학년 2반 애들이 너희들을 무시했다. 어린 애들이라 몸으로 좀만 세게 밀어도 기가 죽을 거다.

학생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건 참 쉬웠다. 중학생들이란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시기이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험은 많은 게 좋았다.

어제 지상철에게 후반전 정도는 축구부 선수가 나와도 별말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에 배영호는 박범철에게 밑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면 다르게 물어보자. 감독 말고, 선수로 뛴다면 네가 송현준보다 잘할 수 있냐? 1학년 2반이랑 우리 반이랑 붙을 때, 너희 둘이 껴서 한다면 말이다.”

박범철은 기분이 나빠져서 쏘듯이 답했다.

“당연히 제가 이기죠. 쟤는 2년 쉬었고, 저는 2년 동안 굴렀다고요.”

비교할 게 아니라고 박범철은 생각했다. 물론, 배영호도 마찬가지였다.

지상철을 통해 축구부 훈련이 얼마나 가혹한 건지 알기 때문에 송현준이 박범철을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말을 유도하기 위해 한 말일 뿐이었다.

“엄태영이나 박종혁은?”

“박종혁은…….”

“박종혁한테는 어렵냐?”

“전혀요. 제가 선밴데요. 같이 뛰는 친구들도 다르고요.”

배영호는 박범철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박종혁은 어차피 계주 마지막 주자라 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1학년 2반의 남은 축구부원은 엄태영밖에 없게 된다. 엄태영도 주전이긴 하지만 존재감이 큰 축구부원은 아니었다.

엄태영과 박범철 구도가 된다면 배영호는 이길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말이다. 만약에 그럴 기회가 있으면 네가 나가줄 수 있겠냐? 우리 반을 위해서 말이다.”

“당연하죠.”

“기특하구만.”

배영호의 목소리에는 어느 순간부터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박범철은 눈치채지 못했다.

왜냐면 1학년 2반의 경기를, 송현준에 시선을 빼앗겼으니까.

박범철은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1학년 2반의 경기를 노려보았다.

배영호는 그 모습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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