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8화
박종혁의 젓가락이 내 도시락에서 무언가 낚아채 갔다.
“갈비찜 가져간다.”
“야 이 미친놈아! 그럼 치킨 내놔.”
어차피 뺏긴 거, 나도 젓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박종혁의 도시락에서 양념치킨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교환해서 먹은 셈이었기에 우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도시락을 계속 먹었다.
박종혁이 중얼거렸다.
“너희 어머니는 손재주가 정말 좋으시구나. 갈비찜 너무 맛있다. 근데 너는 왜 그러냐.”
“시비 거냐, 지금.”
“아니, 상준아. 네가 얘기했었잖아.”
지상준이 김밥을 문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얘가 전술 설명해 주는 그림 못 알아보겠다고.”
지상준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동그라미까지는 괜찮은데 화살표 같은 거 들어가는 순간부터 진짜 개 못 그려.”
지상준이 김밥을 다 삼키고 그렇게 말했고, 다른 친구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 쟤랑 지난주에 같이 미술 과제 한 거 수행평가 망했어.”
“필기한 거 보여달라니까 공책에서 지렁이가 춤추고 있더라.”
“…….”
집단공격에 어질어질해졌다. 이건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여러 전생을 거치면서 웬만한 건 다 잘하게 되면서도, 나는 글씨나 그림 같은 것만큼은 따로 연습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글씨도 못 쓰고 그림도 못 그리니 생애 첫 사인도 당연히 어수룩하고 조잡한 형태였는데, 그 사인을 받은 팬이 그걸 정말 좋아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인을 마지막까지 유지하기로 결심했고, 그 특유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손재주를 늘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름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진작 보통 사람 정도까진 올릴 수 있었는데 안 한 거다.
“똥손!”
하지만, 날 놀리면서 낄낄대는 친구들을 보니 열 받았다. 그래서 나는 내 도시락의 반찬만 빠르게 먹어 치운 후,
“어? 선생님!”
거짓말로 친구들의 시선을 돌리고 현란하고 속도감 있는 젓가락질로 반찬을 하나씩 훔쳐 내 도시락에 넣었다.
셋은 눈치 못 챘으나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치킨을 빼앗긴 박종혁이 내 도시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이 자식!”
나는 친구들이 날 붙잡기 전에 반찬들을 한 번에 입에 넣었다. 친구들은 질렸다는 표정을 했고, 난 꽉 찬 입만큼 큰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선생님 부른 거 아니었니?”
“선생님! 현준이가 저희 반찬 다 뺏어서 한입에 먹었어요.”
“뭐?”
애들을 낚으려고 선생님이라고 말한 거였는데 진짜 정미영 선생님이 와 있었다. 선생님은 반찬으로 꽉 찬 바람에 볼이 개구리처럼 불어나 있는 날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현준이도 지금 보니까 애는 애구나.”
그 말에 뭔가, 뭔가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럼 너희 치킨 좀 먹을래? 선생님들이 많이 안 드셔서 아직 포장도 안 뜯은 치킨이 몇 마리 있거든.”
“정말요?”
“응응, 잠깐만 기다려 봐. 다른 반에 얘기하면 안 된다? 경쟁자가 늘어나요~.”
“네~.”
날 뺀 친구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우리 선생님이 최고 아니냐.”
“우리 생각 많이 해주고, 수업도 재밌고.”
“간식도 자주 사주셨어.”
“밝고 에너지도 넘치지.”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나는 그제야 꾸역꾸역 입에 넣은 반찬들을 다 넣고 입을 열었다.
“우리 선생님이 최고지. 아무튼 지상준, 넌 경기 뛰어야 하니까 치킨 한 조각만 먹어.”
“뭐? 농담이지?”
“진짠데.”
“난 골키펀데?”
“배 꽉 차면 집중력 떨어져. 멍청아.”
잠시 후, 지상준은 치킨 다리 하나만 먹으며 우릴 부러워했다. 축구뿐만 아니라 계주를 하는 박종혁도 두 조각만 먹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치킨을 열 마리나 들고 오셨고, 나머지 친구들은 후식으로 치킨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각 반의 서바이벌 닭싸움 참가자는 본부 앞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송현준! 송현준! 송현준!”
체육대회에서는 한 사람당 두 종목에 출전할 수 있다. 나는 축구만큼 점수가 높은 계주와 혼자서 참여할 수 있는 서바이벌 닭싸움에 참가했다.
그리고 나는 서바이벌 닭싸움에서 방금, 우승했다.
“으~~~~~ 아!”
“살살 던져!”
“으~~~~~~~ 아!”
나는 친구들에게 헹가래를 세 번 정도 받고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개쩔었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뛰어다니냐.”
“난 오래 서 있는 게 신기하던데.”
서바이벌 닭싸움은 정말 무식한 종목이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각 반에서 한 명씩을 차출해서 원형의 경기장 안에 밀어 넣고 끝까지 살아남은 학생이 우승하는 아주 단순하면서 확실한 룰이었다.
혼자서 우승할 수 있는 종목은 100m 계주 말고는 몇 가지 없었기에 난 내 운동 능력을 살릴 수 있는 닭싸움을 선택했고, 축구부 두 명을 이겨내며 우승하는 데 성공했다.
계주도 해야 하는데 상대가 생각보다 오래 버텨서 고생했다.
“난 2등이다 어떡하냐…… 우리 우승 못 하는 거 아니냐…….”
나와 같은 시간에 경기를 치른 박종혁이 우울해하고 있었다.
100m 달리기 1등은 윤태상이라는 모양이었다.
나는 박종혁을 위로했다.
“괜찮아. 계주랑 축구 우승하면 돼.”
“오, 그렇네. 계주 꼭 잘하자.”
“발라 버리자고.”
그리고 박종혁의 기운도 끌어올렸다. 박종혁과 의기투합하며 다른 종목을 응원하러 돌아다녔다.
승부 하고, 이기고, 환호받는다. 축구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체육대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재미있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두 종목만 남았다.
봄 체육대회 때는 축구와 계주가 마지막, 가을 체육대회 때는 피구와 계주가 마지막인 식이었다.
그래서 축구와 계주만 남아 있었다.
축구 전반전을 먼저 치르고, 쉬는 시간 동안 계주를 하고, 후반전을 치른 후 체육대회가 끝난다.
축구 결승팀에 올라간 두 반 학생들만 운동장에 내려와서 경기장 바로 옆에서 응원할 수 있고, 나머지 반 학생들은 스탠드에서 지켜본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경기였다.
웬만한 프로 축구 뺨치는 열정적인 분위기가 나온다.
체육 선생님들과 각 반 도우미들이 스탠드에서 다 같이 관람할 수 있도록 경기장 중앙에서 스텐드에 가깝게 경기장을 그렸다. 골대는 핸드볼 규격의 골대를 그대로 갖다 놓았다.
“나 너무 긴장된다.”
“하던 대로 하면 돼.”
“송 감독님 긴장 좀 풀어줘요.”
짝!
나는 지상준의 등을 손바닥으로 아주 맵게 때려줬다.
지상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다가 울상을 하며 날 노려봤다.
“긴장 풀렸지?”
어깨를 으쓱하자 다른 친구들이 웃었다. 지상준은 억울해 보였지만, 긴장은 풀린 모양이었다.
“다들 하던 대로만 하자. 그러면 이기니까. 나는 쉬는 시간에 지시 못 해주니까 알아서 잘 상의해서 열심히 하고.”
“예이!”
“그럼 2반!”
“파이팅!”
내 선창에 기운차게 구호를 외친 친구들이 경기장으로 나갔다.
* * *
햇빛은 부드러웠고, 하늘은 가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너무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쾌적한 날씨다.
그런데, 활기차고 뜨거워야 마땅한 운동장이 조용했다.
“…….”
내 옆에 선 정미영 선생님의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다.
처음에는 화끈한 우리 반의 연속 공격에 학생들이 즐거워했다.
그런데, 우리 반 학생들이 결승전 상대인 2학년 5반 학생들의 거친 몸싸움에 구르고 튕겨 나가는 모습들이 계속 나오자 상황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그런 광경에 흥분하던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게 계속되자 점차 침묵이 길어졌다.
그리고, 방금 이지성이 체육복을 붙잡혀 뒤로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운동장에 완벽한 침묵이 감돌았다.
연설대 위에서 경기를 보던 이사장의 얼굴이 몹시 심각했다. 옆에 있는 교장, 교감 선생님들에게 뭐라고 소리 지르는 게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너! 경고야!”
아까부터 좋게 좋게 말하던 체육 선생님이 폭발했다. 심판을 맡으신 체육 선생님은 정 선생님의 동기고, 쾌활하고 밝은 분인데 이런 얼굴을 보이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이건 승부가 걸린 경기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체육대회의 종목 중 하나일 뿐이었다.
체육대회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체육 선생님은 경기를 잠시 멈춰 둔 채로 반칙을 저지른 학생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의도적으로 더 거칠게 했다간 퇴장이야! 알겠어?”
그때, 2학년 5반 학생 중 몇이 배영호를 흘깃 보는 걸 봤다. 배영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 이후에야 경기는 정상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휴우…….”
정미영 선생님의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순해 보이시는 분이지만 화나면 장난 아니라는 걸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대로 진행됐다면 화내면서 경기장에 난입하셨겠지.
한두 번 그런 적도 있긴 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전생들에서 이 상황을 막아보기 위해 체육 선생님, 이사장, 다른 선생들, 저기 뛰고 있는 2학년 5반 학생들 등에게 경고하거나 이것저것 해 봤었다.
하지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한낱 학생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 회귀에는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고, 불합리를 받아들였다. 불합리하더라도 내가 아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최선의 결과를 만든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난 부족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체육대회를 포기한 적도 있었지만, 체육대회를 우승하는 게 우리 반과 선생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
모두에게 승리 경험이 생기면서 우승하지 못했을 때보다 객관적으로 더 행복해 보이는 전생들을 살게 된다.
회귀의 시점은 언제나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축구에 매진하게 되는 내게 있어 제대로 된 학창 시절이란 지금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 해야 했다.
친구들을 저런 상황에 방치하지는 않았다.
훈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길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일러뒀다.
덕분에 상대가 거칠게 나와도 더 격하게 구르거나 힘에 저항하지 않고 넘어지는 정도는 해내서 다들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런 과한 리액션은 헐리우드 액션이라고 비난을 받을 때도 있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아…….”
탄식이 나올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거칠었던 시간은 12분 정도. 이제 우리는 다시 페이스를 잡고 치고 나가야 했다. 전생들에선 대부분 그랬다.
이 12분 동안 실점하지 않도록 지상준에게 온갖 슈팅을 다 때려 박으며 훈련을 시켰던 거다.
지상준은 예상대로 잘 막아냈고, 이제 반격을 시작해서 이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우리 팀의 중심 김현호가 걷고 있었다. 뛰는 게 아니라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이상했다. 말짱해 보이려는 척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난 알았다.
난 수많은 부상을 보고, 경험했다. 저건 발목 부상을 감추려고 할 때의 걸음걸이다.
김현호는 언제나 침착하기에 그동안의 전생에서 단 한 번도 부상을 입은 적이 없었다.
김현호가 부상이 입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 정도는 해 봤지만, 진지하게 대비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못 했다.
경기장에서 침착할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재능이다. 그걸 할 수 있는 건 축구부에서도 일부뿐이었다. 프로 선수 중에서 그걸 못하는 선수도 많을 정도니까.
망설이는 동안 3분가량이 흘러갔다.
우리 팀의 뇌인 김현호의 활동량이 점점 적어졌고, 경기는 소강세로 흘러갔다.
김현호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현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