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22화
알람 소리에 눈이 떠졌다.
사흘 전에 체육대회 우승을 했던 게 꿈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월요일 새벽은 평소처럼 찾아왔다.
컨디션은 솔직히 별로였다.
금요일에 고기 회식을 한다고 저녁 훈련을 걸렀고, 토요일에는 금요일에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몸이 무거운 상태로 훈련했다.
일요일 조기축구회에서는 평소 하지 않던 사소한 실수도 했다.
나도 사람이다.
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에게 격렬한 환호를 받으면 들뜬다. 축구 결승전의 강렬한 기억은 내 머릿속에 남았다. 그렇다 보니 주말 내내 머리가 붕 떠 있는 느낌으로 지냈다.
이럴 땐 훈련을 하긴 했다는 점에 중점을 둬야 한다.
더 누워 있고 싶어 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불을 개고 훈련 장비를 챙겼다.
오늘은 신체 리듬을 되돌리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훈련할 계획이었다.
“다녀올게~.”
“응, 열심히 해라.”
새벽 공부를 하고 있는 형에게 인사하고 집을 떠났다.
새벽 공기의 차가움에 기분이 좋아져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운동장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리고.
“야, 네가 송현준 맞지?”
생각지 못한 만남으로 계획이 깨져 버렸다.
더벅머리에 졸음이 가득한 눈,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20대의 남자가 중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마자 날 불렀다.
그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축구부 코치, 김진호다.
“미안한데 앞으로는 여기서 하지 마라.”
“네? 뭘요?”
“새벽마다 뛰는 거 있잖아. 너 때문에 운동장이 망가진다는 얘기가 있거든.”
김진호는 특별히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이 나이대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로베르토가 들어온 후에도 코치로 남아 잡일을 도맡곤 했었다.
근데 그 평범한 사람이 내 일과를 방해하고 있었다. 짜증을 잠시 눌러두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김진호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어라? 근데 내 눈을 피한다.
“이 운동장은 축구부가 우선이거든. 축구부원한테 불만이 나오면 어쩔 수가 없어.”
아.
축구부원의 불만은 무슨.
상황을 이해했다.
무조건 축구부 감독 지상철의 지시다. 김진호는 자기 말이 당당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눈을 못 마주치는 거다.
-X발, 분위기 개박살 났어.
지난주에 연습 경기를 치르고 돌아온 박종혁이 푸념했었다.
-축구부에 사람이 없어서 힘든데 도와줄 수 있을까?
윤태상도 새벽 운동을 하는 내게 다가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었다.
퍼즐이 맞춰진다.
지상철은 연습 경기를 치러보며 슬슬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숫자만’ 본다면 축구부원은 충분히 채웠다.
하지만 임시로 채운 축구부원들이 제 몫을 할 리가 없다. 얼마나 급하면 축구가 아닌 다른 운동을 하던 학생마저 꼬드겨서 데려갔다는 얘길 박종혁에게 들었다.
전생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상철의 심정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선수들을 평소보다 더 굴리고 있는데 성적은 안 나올 것 같고. 지난 전국대회에서 성적도 별로였고 사고도 일어났었으니 이번에 성적을 못 내면 잘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거겠지.
얼마나 초조할까?
근데 그 와중에 내가 체육대회에서 실력을 보여줘 버렸다. 기량도 출중해 보이고, 친구인 배영호에게 엿도 먹였으니 이런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훈련할 장소 중 이만큼 넓은 곳은 별로 없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축구부에 들어갈까 보냐.
“알겠습니다. 여기 안 올게요.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죄송할 것까진 없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지금은 덤덤하게 넘길 거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 가자마자 이사장한테 이를 거다.
당장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라도 계획대로 새벽 운동을 해야 했다. 일주일의 시작을 이딴 조잡한 술수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하는 기색의 김진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어디가?”
그리고 막 학교에 도착한 박종혁을 교문에서 만났다.
“코치님이 여기서 운동하지 말라고 하셔서.”
“뭐? 그런 게 어딨어. 우리는 여섯 시부터 시작인데.”
“몰라, 빠따가 시킨 거 같은데 일단 물러나고 이따가 이사장님한테 일러야지.”
박종혁은 내가 조기축구회에서 이사장과 같이 공을 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 인맥을 쓴다 이거냐.”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니겠냐.”
“크크.”
박종혁은 재미있겠다는 듯 웃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꼭 부탁한다. 요즘 빠따 새끼 너무 짜증 나 죽겠어. 이사장님한테라도 혼 좀 나서 기 좀 죽었으면.”
“그래그래. 그럼 가볼게.”
“엉, 열심히 해라.”
이사장에게 혼날 지상철을 상상하며 들뜨던 기분이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지상철이 잘릴 때까지, 그러니까 여름방학 직전까지 고생할 박종혁, 윤태상을 비롯한 축구부원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여러 전생에서도 일관된 사람이 있는데 지상철과 로베르토가 꼭 그랬다.
지상철로 계속 간다면 우리 축구부에서 프로로 갈 수 있는 재능들이 다 꽃피지 못한다. 프로 선수가 될 재능이 없는 부원들도 나쁜 추억을 갖게 되고 몸의 어느 한 곳이 망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로베르토가 반드시 선임 되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좋은 방향으로 흐른다.
오늘부터 박종혁의 몸 상태에 더 신경을 써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난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 * *
“어?”
이곳에서도 의외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기분 나쁜 만남이 아니다.
김채아였다. 김채아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초등학생용 그네를 서서 타고 있었기에 꽉 차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눈에 더 띄었다.
내가 늦잠이라도 잔 건가 해서 학교 건물 꼭대기에 달려 있는 대형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다섯 시 십 분.
오늘은 더 훈련할 생각으로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그러니까 시간은 정확했다.
그런데 여섯 시쯤에 와야 할 김채아가 지금 왜 여기 있는가.
의문을 가지며 김채아에게 다가가는데 그녀는 날 눈치채지 못한 채로 계속 그네를 탔다.
김채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허공에 멍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네는 리듬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터벌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인사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만 그네를 타는 도중에 갑자기 부르면 다칠지도 모르니 난 김채아의 정면으로 걸어가서 김채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 어어?”
다행히 김채아는 금세 날 알아보고 그네를 멈췄다.
안심하고 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어…… 그냥 일찍 눈이 떠졌어! 일부러 일찍 나온 건 아니야!”
“그래?”
어색한 대답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채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 너. 체육대회 때 대단하더라! 우리 반 애들 비명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아아, 당연히 봤겠구나. 하하…….”
쑥스러워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김채아는 묘하게 안절부절못했다. 역시 이런 모습을 보면 김채아답지 못하다고 느낀다.
“하고 싶은 말 있어?”
“나…… 나도, 멍하니…… 봤어. 너 정말 잘하더라…….”
김채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푹 익어서 고개를 숙였다. 아주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적응이 안 갔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신선한 면도 있었다.
입가에 자연스럽게 지어지려는 미소를 억지로 참으면서 말했다.
“그래? 정말 고마워. 기분 좋다.”
김채아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눈은 동그랗게 뜬 채였다.
“그, 근데 왜 오늘은 일찍 왔어?”
어색한 분위기에서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게 느껴졌기에 받아주기로 했다.
“아, 그게…….”
방금 중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얘기했다.
잠시 후, 사정을 다 들은 김채아가 소리를 질렀다.
“진짜 나쁘다! 운동장이 자기들 것도 아니고!”
김채아가 화난 모습을 보니 기분이 풀어졌다. 덤덤하게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새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인터벌부터 하려고.”
“인터벌? 그 빨리 뛰었다 천천히 뛰었다 하는 거?”
“아는구나.”
“응, 오빠가 체력 기르는 데 좋다고 알려줬었어. 몇 번 해본 적도 있어.”
“그럼 같이해 볼래?”
“그럴까?”
김채아가 잘 따라올까 싶었지만 혼자 하는 훈련보다 같이하는 훈련이 더 즐겁고, 대화의 흐름도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히익, 힉, 헥.”
그리고 김채아는 처음에는 잘 따라오다가 점점 퍼지다가 마지막에는 간신히 버티다가 내가 끝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뻗었다.
“미안…….”
“아, 아니. 아니. 이걸, 매, 매일…… 헥, 헥.”
“천천히 말해도 돼. 물은 호흡이 돌아오고 나서 마시고.”
“으, 응. 헤, 헤엑.”
김채아는 기진맥진해서 대자로 누웠다. 나는 그동안 훈련 장비를 깔고 코디네이션 훈련을 시작했다.
김채아는 훈련을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같이하자고 얘기할 엄두는 안 나는 모양이었다.
1/3 정도를 마치고 김채아를 살피러 다가갔다.
“괜찮아?”
“너 진짜 괴물이구나…… 매일 이런 걸 하고 와서 나랑 또 훈련을 한 거야?”
할 말이 없어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존경스럽네…… 나는 따라가지도 못하겠어…….”
김채아가 시무룩해졌다.
“이 정도는 너도 며칠만 고생하면 따라올 수 있어. 나도 처음에는 너보다 힘들어했어.”
“에이, 거짓말…….”
김채아의 목소리가 점점 쪼그라들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있어.”
“그, 그렇구나.”
“응. 틀림없이 할 수 있어.”
김채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를 반쯤 돌렸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불안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렇게 대단한데…… 나랑 같이 훈련하는 거 오히려 방해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을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김채아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너, 내가 박종혁이랑 대결하는 거나 체육대회에서 경기하는 거 보고 무슨 생각 들었어?”
“응? 갑자기?”
“말해봐.”
재촉하자 김채아는 어리둥절하다가 금세 내 말에 따라줬다.
“음…… 엄청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 깔끔했는데? 뭐가 깔끔했는데?”
재촉하는 내 모습에 김채아는 얼떨떨해 보였다. 나는 진지한 얼굴을 유지했다. 김채아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얘기한다.
“갑자기 물어보니까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아, 하나 생각났다. 네 슈팅 말이야. 작년에 월드컵 결승전에서 뛴 브라질 공격수 있잖아. 머리에 김 붙인 거 같은 머리 한 사람…… 맞다! 호나우두! 그 사람이랑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
상황은 다르지만, 전생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답변을 받았다.
그렇다. 이게 김채아의 재능이었다.
김채아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잘했다. 김채아의 주변인들은 아마 김채아의 성장이 빠르고 운동 신경이 좋아서 운동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물론, 키도 171㎝이고 운동 신경도 좋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김채아의 진짜 재능은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