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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25화 (25/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25화

-와, 그게 할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 내가 아직 면목이 없어서 사과를 못 하겠어. 사과할 자격도 없는 거 같아서 결과를 좀 더 내면…….

-난 충분한 거 같은데. 너 열심히 하고 있잖아!

그 말이 뭘 건드렸는지 내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김채아는 욕을 하면서도 날 안아줬다. 김채아의 배가 조금 불러 있는 게 느껴졌다.

김채아는 내가 재활 훈련 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봤다고 했다. 얼마나 힘든지 같은 운동선수라 알았기에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풀렸다고 말했다.

-내가 너보다는 여유가 있어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니까. 너도 내가 좌절할 때 버리면 안 돼.

-당연하지.

-그리고…… 나한테 말 못 한 거 있지?

-응…….

-기다릴게.

이날 회귀에 대한 얘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남편으로서 당당해진 후에.

재활 과정에서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첫 번째 전생에서 나의 첫 프로감독이셨던 분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포지션을 바꿔도 프로 레벨에서 먹힌다는 걸 재활과 훈련 과정에서 깨달았다.

나는 중앙 수비수로 성공적으로 복귀했고, 리그 베스트에까지 들어가는 영광을 거머쥐었다.

아이도 태어나고, 몇 년 동안 행복하게 잘 살게 되면서 나는 김채아에게 내 비밀을 얘기하기로 했다.

-기다린다고 했었지?

-응? 뭐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김채아는 소파에서 아이를 안은 채로 날 보고 있었다. 아이도 날 보고 있었다.

-말 못 한 게 뭐냐고 했었잖아.

-아, 이제야 말할 생각이 든 거야? 말해봐. 들어줄게.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게, 나는 좀 특별해.

-특별하다고? 중2병이 늦게 온 거야?

-농담하지 말고! 진짜야!

-심각하네. 그럼 뭔데? 석규야~ 아빠한테 말해달라고 하자.

-우음…….

아이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귀여운지 김채아는 웃었다. 나도 따라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인생이 두 번째야.

-두 번째?

-응.

그때, 내 주변이 일그러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인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27살까지 살다가 죽었고, 중학생 때로 돌아와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어.

주변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정말? 와!

…….

그게 두 번째 전생의 김채아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너무나도 허무하게, 아이와 김채아를 남겨 두고 두 번째 세계에서 쫓겨났다.

이어서 나는 어둠 속에서

<9>

라는 숫자를 본 후, 중학교 1학년으로 돌아왔다. 정미영 선생님이 내게 축구를 다시 시작해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미영 선생님과 다시 만난 것보다는 사라진 김채아와 아이 때문이었다.

나는 패닉에 빠져 버려 헛소리를 하다가 도망쳤고, 한 번 겪어본 일이었기에 상황을 이해하다가도, 나는 웃다가 울다가 며칠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나는 이날부터 회귀가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이날 이후 나는 김채아와 다시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도 않기도 했다.

하지만 김채아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늘 지켜봤다.

그냥 그렇게 하게 되었다.

꽤 오래전 일이었다.

회상을 마친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회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꿈속에서 나는 두 번째 전생의 김채아와 첫 번째 아들 석규를 만날 수 있었다.

* * *

이사장실의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계세요?”

“현준이구나. 들어와라.”

이사장실에는 아주 넓은 책상이 있었고, 그 뒤에 이사장이 앉아 있었다.

50대인데도 40대 초반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이사장은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운동과 염색의 힘이다.

“거기 앉고.”

“예.”

이사장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도자기 주전자를 들고 내가 앉은 손님 접대용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 놓인 잔들에 차를 따랐다. 주전자를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은 후 이사장은 내 앞에 앉았다.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 불편해할 건 없다.”

“아니요. 뭐,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그럴 거 있나요.”

이사장은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씩 웃었다.

그렇다. 내가 이사장을 찾아온 게 아니라 이사장이 나를 불렀다.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사장을 어떻게 만나야 하나 고민하면서 등교했는데, 조회가 끝나고 정미영 선생님이 날 따로 불렀다.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사장님이 부르는데…… 이사장실로 가면 돼. 근데 무슨 일 있었니?

-아뇨. 근데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주말에 하는 조기축구회에서 이사장님이랑 같이 밥도 먹고 그러거든요.

-아, 그래?

선생님의 얼굴에 끼었던 걱정의 구름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릴 궁금증이 채웠다.

-근데 왜 부르시는 걸까?

-그러게요?

나도 잘 몰랐다. 이 타이밍에 이사장이 호출하는 건 드물었기 때문이다. 아마 체육대회 결승전에 출전한 여파이지 않을까 짐작만 하고 있었다.

“현준아, 내가 금요일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잘한다 잘한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어요.”

“나이도 잊고 벌떡 서서 소리를 질렀다니까? 이게 운만으로 되는 일일까? 현준이는 내 생각보다 더 천재적이더구나.”

슬슬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이 갔다.

“현준이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축구부가 지금 위기야. 내가 볼 때 현준이는 지금도 태상이 정도는 하는 것 같던데, 어떻게, 안 되려나? 체육대회 때 뛰는 걸 보니까 몸이 많이 올라온 것…… 같던데.”

역시나였다. 이사장은 축구부에 애정이 많다. 그러니까 지상철이 머지않은 미래에 성적 부진으로 해고당하는 거다.

문제는 그만큼 축구부 성적에 민감하고 간섭도 있다는 것이다.

“어…….”

뜸을 들이며 잠시 생각했다.

지상철이 잘릴 때까지 들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김채아를 일찍 만나면서 새로운 계획도 세웠다.

그러니까 무조건 안 된다. 정중하게 잘 풀어서 말해보자.

“솔직히 말하면 볼을 다루는 감각 자체는 많이 올라온 게 맞아요.”

“그러면…….”

“하지만, 체력이 아직 한참 부족해요. 조기축구회에서는 살살 뛰니까 조절이 되는 건데, 체육대회 때는 전력으로 20분 뛰었다고 온몸이 후들거리고 밤에 잠도 잘 못 잤어요. 토요일, 일요일에도 엉망이어서 훈련도 제대로 못 했고요…….”

거짓말도 적당히 섞어서.

“이사장님, 아니, 박영대 아저씨. 저는 축구부를 한 번 그만뒀던 사람이에요. 그렇다 보니 이번 도전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싶어요.”

내 친근한 표현에 이사장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지금은 좀 괜찮고?”

“네.”

“다행이구나.”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에 친구랑 같이 풋살 대회에 나가보려고요.”

“풋살 대회?”

“예. 혼자서 끌어올릴 수 있는 체력이랑 경기를 뛰면서 끌어올릴 수 있는 체력은 미묘하게 다르거든요. 그걸 채워오고 싶어요.”

“축구부에서는 어려울까?”

“경기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사람이 체력 끌어올린다고 섞여 있으면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사장에게 되물으며 확실하게 했다.

“저는 완벽하게 복귀하고 싶어요. 백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구십 퍼센트까지는 끌어올린 후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흐음…….”

논리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괜찮은 얘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이사장이 혹할 떡밥도 던져줘야지.

“기왕 도전할 거라면, 전국대회 우승을 목표로 하고 싶거든요.”

“전국대회…… 우승?”

“당연하죠. 기왕 축구부에 들어가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십 대다. 청춘이다. 꿈이 가득한 시기다.

그리고 내 나이대의 운동 하는 학생이 꿀 수 있는 보편적인 꿈은 전국대회 우승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낭만을 자극하는 멋진 단어라고. 괜히 슬램덩크, 메이저 같은 만화가 유행했을까.

가슴이 설레지는 않았다. 선택받은 자들, 운 좋은 자들만 올라갈 수 있는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전국대회 4강이다. 4강 이하의 탈락자들은 고등학교 입학이 어려워지는 잔혹한 뒷면도 있고 별의별 나쁜 점도 가득하다.

하지만, 좋은 점만 보기에도 인생은 바쁘니까 일부러라도 그런 면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적어도 내가 들어간 후의 축구부는 그런 일을 겪지 않고 낭만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테니까.

내 앞의 이사장은 그런 나쁜 점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고, 글자와 소문으로만 그런 일이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낭만에 자극받는다. 나이가 든다고 낭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그리워한다.

이사장의 표정이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우승이라, 말만 들어도 좋구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기대하마. 현준이가 그렇게 말하니 특히 기대가 되네.”

“기대하셔도 좋아요.”

“자신만만하구나. 좋네. 그래야지.”

이사장은 차를 쭉 들이켰다. 축구부에 관련된 대화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이사장은 한층 편한 자세로 내게 물었다.

“근데 풋살은 누구랑 같이하고?”

“1학년 9반 김채아라는 애랑 걔 오빠랑 오빠 친구들이랑요.”

아직 만나지는 않았지만, 무조건 들어갈 생각이었다.

“김채아? 이번 계주에서 1등 한 여자애?”

“네. 걔도 운동 신경이 장난 아니거든요. 우리 학교에 여자 운동부가 있었으면 무조건 에이스였을 거예요.”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니?”

“네.”

“재미있구나. 여자애랑 같이 대회에 나간다라.”

“이것도 좋은 성적 가져올게요. 학교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잖아요?”

“위상이라니, 너는 가끔 쓸데없이 어른 같을 때가 있어.”

이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체력이나 잘 끌어올리고, 대회는 재밌게 즐기고 오는 것만 생각하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수업 들어가 보고.”

“네.”

이사장과는 계속 좋은 사이로 있는 게 좋다. 축구부에 들어가자마자 부탁할 것도 있었으니까.

아, 부탁하니까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저기, 그런데.”

“뭐 할 말 있니?”

“네, 어제 새벽에요…….”

전날 새벽에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이사장의 미간 주름이 하나, 둘, 다섯까지 늘어났다.

“그건…… 내가 조치하마. 아무리 축구부라고 해도 훈련 외 시간에 다른 학생들이 운동장을 못 쓰게 할 권한은 없는데 말이야.”

내일부터는 무사히 중학교 운동장을 쓸 수 있겠다. 기분이 좋아졌다.

임무를 다 마친 나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저희 어머니가 직접 오셔서 수육 만들어 주신다는데 조기축구회에 꼭 오세요?”

“오오, 그거 기대되는구나. 저번에도 참 맛있었는데. 이번 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마.”

친근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이사장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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