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26화
“…….”
교실 뒷문을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열었다.
1교시 수업 중인 가정 선생님이 내 얼굴을 흘깃 보더니 별말 없이 수업에 집중하셨다.
가정 선생님은 정미영 선생님과 친하다. 아마 내가 이사장실에 다녀온다는 얘기를 구체적으로 들었겠지.
“집중!”
오히려 수업 중간에 들어온 날 보며 산만해지는 반 애들을 조용히 시킬 뿐이었다.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박종혁과 엄태영은 수업 시작한 지 20분밖에 안 지났는데도 쿨쿨 자고 있었다. 운동부의 특권이라는 건가.
박종혁이 자는 건 왠지 모르게 꼬았기에 툭 쳤다.
박종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날 보고는
“왔냐.”
하고 다시 잠들었다. 여기가 집이냐.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입꼬리만 올려 웃은 후, 수업에 집중했다.
1교시가 끝난 후 쉬는 시간이 되자 친구들이 다가와 어디 다녀왔냐고 물었다.
나는 이사장이 불렀던 거고, 그냥 차나 한잔 마시고 왔다고 했다. 조기축구회에서 가끔 보는 사이라서.
친구들한테 조기축구에 나올 생각 있냐고 물어보니까 다들 일요일 새벽에는 일어나기 귀찮다고 거절했다.
그렇게 이사장실에 다녀온 건 조용히 넘어갔다.
“하아…….”
피곤하다.
어제 새벽에는 훈련 방해를 당하고, 일찍 온 김채아를 위해 새로 계획을 짜느라 오후에 하드 훈련을 했다.
거기에 밤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전생을 떠올리니 울적해지고, 수업 시간에 이사장이 부르는 바람에 수업 내용도 따로 살펴봐야 했다.
등교 전과 하교 후에는 훈련을 해야 했기에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말고는 공부할 틈이 없었다.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전생에 배웠던 걸 떠올려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데.
“후우…….”
한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김현호에게 다가가서 가정 시간에 뭘 배웠는지 물어봤다.
* * *
오늘 새벽은 평소처럼 중학교 운동장에서 무사히 인터벌 훈련을 마쳤다.
방해가 들어오지 않아서 오늘은 평안하겠거니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운동장에 전생에서 만난 적 있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김채아의 옆에, 근엄한 척하면서.
“우리 오빠야……. 미안…….”
“…….”
까무잡잡한 피부, 짧은 스포츠 머리, 떫은 표정, 굳게 낀 팔짱, 185㎝ 정도의 체구도 큰 남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170㎝도 되지 않는 나는 꽤 올려다봐야 하는 키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송현준이라고 합니다.”
“…….”
누군지는 잘 안다.
김채아의 오빠, 김지혁.
몇몇 전생에서는 내 형님으로서 인생 상담도 해주시고, 부부 동반으로 같이 놀러도 다니고, 김채아를 고생시킨 회차에는 나를 개처럼 패신 분이다.
대체로 좋은 사이었다. 맞은 건 내가 잘못했던 거고.
왜 이렇게 맞았던 기억이 많지.
아무튼, 지금은 처음 보는 사이다. 토요일에 풋살팀에 들어가면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새벽에 찾아올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말없이 날 노려보고 있을 김지혁의 시점으로 생각해 봤다.
김채아는 아마 내가 풋살 팀에 들어가고 싶다는 얘길 하며 내 얘길 했을 것이다.
김지혁의 입장으로 보면 나는 이름도 처음 듣고 생김새도 모르는 놈이다.
그런 놈팡이가 자기 동생이랑 새벽마다 운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거다. 김지혁은.
음…… 걱정되겠다. 화나겠다. 궁금하겠다.
그러니까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내가 어떤 놈인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금세 차분해졌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허리를 숙인 채로 김지혁이 대답해 줄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김지혁은 초등학교 때 축구부를 했고 지금은 야구부다. 2000년대 초반 운동부에 소속돼 있다면 과도한 예의는 오히려 좋다.
“저기? 송현준? 이제 일어나도 되지 않아?”
“…….”
김채아의 말에 대답도 행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김지혁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일종의 기싸움이자 기선제압이다. 당해주자.
다만, 3자인 김채아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오빠! 오빠가 인사 안 받아주니까 그런 거잖아!”
“……어, 어어? 그래. 안녕.”
“예.”
일어나니 눈썹이 V자가 된 김채아가 보였다. 김지혁은 곤란해하다가 시선을 옮겨 날 노려봤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네가 송현준이구나…….”
“송현준은 자기 이름 얘기했는데 오빠는 뭐해?”
“나는, 김지혁이다…….”
김채아의 재촉에 김지혁은 이상한 자기소개를 해버렸다. 순간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물론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김지혁은 내게 근엄하고 무섭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평소와 다르게 날이 선 김채아 때문에 대화 흐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역시 이번 인생의 김채아도 가족 옆에 있으니 텐션이 달라지는구나.
“크흠, 그래. 채아랑 같은 학교 다닌다고?”
“네.”
“내가 너희 학교 축구부 주장이랑 친한데…….”
흔한 레퍼토리다.
나에게 알아서 처신 잘하라고 협박 비슷하게 하는 거다. 김채아가 앞에 있으니 직접 말하긴 뭐해서 우리 학교 선배들을 언급해서 빙빙 돌려 말하는 거겠지.
“왜 이렇게 말이 길어? 우리 이제 연습해도 되지?”
“……그래.”
김지혁의 얼굴은 어두웠다. 내게 제대로 경고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중에 귀찮아질 수도 있고, 여동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나는 김채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채아. 잠시만.”
“응?”
나도 내 여동생 현지가 매일 새벽에 남자 놈이랑 만나서 운동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불안하잖아.
나는 김지혁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배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버디버디 아이디 적어주시면 친구 추가도 하고 전화번호도 알려 드릴게요. 필요하다면 저희 집 주소도요.”
“……그래?”
이 시절 유행하던 메신저 아이디를 달라고 했다. 이것저것 말하니 김지혁이 당황한다.
그 모습도 재미있었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자, 우리 자랑스러운 송 서방, 한 잔 받아. 채아가 집에서 자넬 얼마나 자랑 했는 줄 알아? 얼마나 종알거리던지 귀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흐하하!
전생에서 김지혁과 나눴던 즐거운 술자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어수룩한 모습이 그저 유쾌했다.
김지혁은 내가 가지고 다니는 메모장에 자신의 아이디를 적고는 왠지 모르게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빨리하자. 우리 이따 학교 가야 한다고. 오빠도 학교는 가야 할 거 아냐.”
김채아의 재촉 덕분에 우리는 평소 하던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만 오늘 훈련은 진행이 더뎠다.
“그건 뭐 하는 거냐?”
“이건 말이죠…….”
김지혁은 순수하게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훈련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운동 방식과 효과를 세세하게 설명해 줬고, 김지혁은 점점 더 관심을 가졌다. 초등학교 때 축구부였고, 취미로 풋살을 할 정도니 축구에 애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평소보다 훨씬 더 싹싹한 태도를 보이자 김채아는 김지혁이 잠시 딴짓을 하는 동안 내게 다가와서 작게 물었다.
“오빠 눈치 그렇게 안 봐도 돼. 혹시 오빠가 무서워서 그래?”
“그런 건 아닌데.”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김채아의 얼굴이 굳어졌고, 진지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그냥 가라고 할게. 가끔 이상하게 저런다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가 걱정되셔서 저러시는 거야. 이럴 때는 전부 솔직하게 얘기해 주는 게 맞아. 가족을 걱정시키면 안 되지.”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김채아가 잠시 멈췄다.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못 해봤다는 얼굴이다.
“……어, 음. ……알겠어.”
더듬거리며 대답한 김채아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훈련은 무사히 끝났다. 뛰어가면 아침 식사에도 아슬아슬하게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김지혁이 다가왔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토요일에도 축구화 잘 챙겨 오고, 늦지 말고.”
“예.”
아까보다 훨씬 더 후련한 얼굴이었다. 이제 안심이다.
풋살 팀에도 무사히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다.
“갑자기 구경 올 수도 있으니까 채아랑 딴짓하면 안 된다.”
“예.”
“뭔 구경이야. 다신 오지 마. 오빠 때문에 얘한테 미안해 죽겠어.”
“아니…….”
김채아의 날카로운 말에 김지혁은 잠깐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가족이랑 있으니 김채아의 본모습이 나온다. 그 모습이 오히려 익숙했다.
난 곤란해하는 김지혁에게 웃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대신 다음에 오실 때는 같이 뛰어요. 풋살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예요.”
김지혁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가,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간 채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채아야, 가자. 너도, 토요일에 보자.”
김지혁은 그렇게 말하고 운동장을 먼저 나섰다. 김채아는 김지혁을 따라가는 듯하다가 내게 다가와서 작게 말했다.
“오늘 오빠가 귀찮게 해서 정말 미안해. 다음에 음료수라도 살게.”
“아니야.”
김채아는 머뭇대다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 고마워.”
미묘한 분위기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내일 보자.”
“응!”
김채아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내게 손을 크게 흔들며 운동장에서 먼저 나갔다.
* * *
“김말이 네 개, 계란 두 개, 오징어튀김 두 개, 순대 1인분인데 부속 많이…… 그중에서 허파 많이 주시고요. 떡볶이 1인분에 소스 많이 주세요!”
“걱정 마, 학생~ 많이 줄테니까~.”
“감사합니다!”
대영 중학교 앞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김순옥 여사는 기분이 좋았다.
학생 손님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예의가 바르고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있지도 않은 딸이랑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여학생 둘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두 여학생은 여기 올 때마다 풋풋한 이야기를 한다.
“채아야. 폐가 그렇게 좋아?”
“응, 쫄깃해서 떡볶이 소스 찍어 먹으면 맛있어. 찹쌀순대보다 더.”
“그렇구나…… 맨날 똑같이 시키길래 궁금해서.”
“어어…… 다른 거 더 시켜도 되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왜 좋아하나 궁금해서. 나도 네가 시킨 것들 다 좋아해. 특히 오징어 튀김이랑 김말이!”
“그렇구나, 다행이다.”
성씨는 잘 모르고 이름은 채아와 은영이라는 이름의 학생들이었다. 지금이 세 번째 방문이다.
둘은 송현준이라는 이름의 남자애 얘기를 하는데, 채아가 은영이에게 관심 있는 남자 얘기를 하고 은영이는 조용히 듣다가 자기 생각을 차분하게 말해준다.
둘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자. 학생들 맛있게 먹어.”
“와! 너무 많이 주신 거 아녜요?”
“호호, 딸 같아서 좀 더 줬어. 다른 학생들한테는 비밀인 거 알지?”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채아와 은영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김순옥 여사는 음식 정리를 하는 척하며 그녀들의 얘기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송현준이 무슨 말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