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28화
“채아 치사해…….”
남자반 복도에서 여자반 복도로 오자마자, 이지혜가 뚱한 얼굴로 투덜댔다.
“…….”
김채아는 멍해져서 반응이 없었다. 김혜진이 김채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채아야?”
“어? 응?! 뭐가!?”
김채아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정은영은 살짝 떨어져 그녀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지혜는 약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한 태도로 본격적으로 투덜댔다.
“쟤 나한테 소개해 달라고 할 때마다 자꾸 말 피하더니…… 자기가 관심 있었던 거였어! 그러면 말을 하지!”
“뭐? 뭐머머? 머머머뭐?”
“송현준이 괜찮긴 하지만…… 우리 채아면 안 밀리지. 인정!”
“아니야!”
이지혜는 송현준에게 관심이 있었기에 진심으로 불평했고, 반쯤 장난이었던 김혜진은 김채아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이지혜에게 동조하며 김채아를 놀렸다.
김채아의 반응은 누가 봐도 재미있었다. 키가 크다 보니 얼굴이 빨개진 거나 부끄러워하는 거나 아주 잘 보였다.
이지혜는 여전히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김혜진과 김채아 그리고 정은영의 눈치를 보더니 이윽고 김채아 놀리기에 동참했다.
“채아야~ 뭐야~ 그 분위기~.”
정은영도 말했다.
“내가 다 설레더라.”
“뭐, 뭐가! 아니야!”
김혜진과 이지혜는 평소보다 몇 톤 높은 하이 텐션으로 뭐야, 뭐야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김채아는 열심히 부정하며 교실로 돌아왔다.
김채아는 할 말이 없었는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점점 막혔다. 김채아 놀리기가 싫증 난 건지 김혜진이 말했다.
“얘들아, 화장실 갔다가 올래?”
김채아가 시계를 봤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교시 영어지? 나 오늘 당번이라 지금 교무실 가야 해.”
그 말과 동시에 5교시 수업까지 5분 남았다는 예비종이 울렸다.
이지혜가 김혜진의 팔짱을 꼈다.
“그럼 우리 둘이 갔다 올게.”
“응, 다녀와.”
김혜진과 이지혜가 교실을 떠났다. 정은영은 김채아를 따라 교무실로 출발했다.
복도에서 정은영은 작게 웃었다.
“후후, 내가 말한 대로 하길 잘했지?”
“뭐, 뭐가?”
“뭐 살까 고민하는데 네가 좋아하는 거 사라고 했잖아. 근데…… 둘이 취향이 똑같을 줄은 몰랐네.”
그렇다. 매점에서 김채아가 음료수와 쿠키를 골랐을 때, 김혜진과 이지혜는 반대했었다. 아저씨 취향 같다고.
김채아가 시무룩해지려고 할 때 정은영이 김채아가 좋아하는 걸 사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김채아도 거기에 마음이 동했는지 고른 음료수와 쿠키를 그대로 샀고,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아내는 성과까지 얻었다.
정은영은 뿌듯했다.
김채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거짓말한 건 아닐까? 내가 고른 게 맘에 안 드는데 그냥 기분 맞춰주려고…….”
“아닐걸? 반응이 무조건 진짜였는데.”
“그…… 런가?”
“아니면 뭐 어때, 송현준이 네 기분 신경 써준다는 얘기가 되는 건데.”
“……와, 그렇구나.”
김채아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했다.
정은영은 만족스러웠다. 김채아가 자기에게 진심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정은영은 송현준이 고마웠다. 송현준 덕분에 김채아가 어떤 아이인지 점점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채아는 정은영과 친구들에게 일부러 자신을 감춘 게 아니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한 친구일 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어릴 때 그렇게 변했는지 몰라도 그게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변하고 있었다. 좋은 쪽으로.
송현준이 없었다면 아마 자기가 김채아를 바꿔보겠다고 나댔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어제 김채아에게 당장 음료수를 사다가 주라고 제안한 건 오빠를 구실 삼아 송현준을 만날 기회를 만든 것 같길래 등을 떠밀어준 거였다.
그런데 이런 성과까지 얻다니.
정은영은 기분이 좋아져서 팔꿈치로 김채아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취향이 똑같았으면 좋겠지? 응? 그치?”
“……몰라. 교무실 다 왔어.”
김채아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 * *
오늘 김채아가 찾아오는 신선한 이벤트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후 일과가 바뀌는 건 아니다.
나는 방과 후에 개인 운동을 하고, 오늘은 아버지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니 저녁에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아 킥 연습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샤워를 마쳤다.
내일은 풋살 팀에 처음 가는 날이니까 감각을 최대한 가다듬어 놔야 했다.
내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TV를 보며 잠시 쉬려고.
근데 부엌을 지나가다가 놀라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엄마, 오늘 왜 이렇게 화려해요?”
“오늘은 손님이 오기로 했거든.”
“손님이요?”
“응, 로베르토 형 알지?”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전생마다 매번 달라서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맘때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오늘 저녁 훈련은 아버지가 아니라 로베르토와 하게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며 쉬었다.
여동생 현지는 아까 동네 친구 집에서 놀다가 저녁도 먹고 온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퇴근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는 로베르토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역시 상진 형님 부인답게 미인이시네요.”
“어머, 정말요?”
현관에서 이탈리아인 특유의 능글맞은 칭찬이 들리고, 로베르토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일어나서 로베르토에게 꾸벅 인사했다.
“잘 있었냐?”
“네. 운동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로베르토, 얘 새벽부터 자기 전까지 운동하는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로베르토는 나를 잠시 기특한 표정으로 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도 어리고 운동을 쉰 지도 오래됐으니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 선수들도 프리 시즌 때는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강하게 훈련하거든요.”
“그래요…….”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앞으로는 신경 좀 더 써드려야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가 봐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고, 정말 고마워요.”
어머니는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셨다. 로베르토는 왜 그러시냐며 어머니를 만류했고, 우리는 금방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저녁상을 제대로 차려놨다.
“와…… 너무 맛있겠네요.”
“그이한테 로베르토가 한식도 잘 먹는다는 걸 들어서…… 힘 좀 줘봤어요.”
닭볶음탕에 갈비찜에 수육에 잡채에. 누가 보면 잔칫상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로베르토는 어머니의 음식 모양과 냄새에 대한 아낌없는 예찬을 쏟아낸 후, 닭볶음탕의 가슴살을 한 입 베어 물고 맛있다고 극찬했다.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로베르토가 내게 말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얘기했던 게 잘 풀렸어. 오늘부터는 잔디밭에서 훈련하자.”
“정말요?”
나는 오오, 라고 추임새까지 내며 감탄했다. 로베르토는 뿌듯해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훈련도 틈틈이 봐줄게.”
“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자자, 로베르토. 이거 직접 만든 식혜인데…….”
“아이고 어머니. 너무 맛있겠네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로베르토에게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이려고 했다. 로베르토는 곤란해하며 내게 지원을 부탁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외면했다.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다른 전생의 로베르토나 부모님에게 들어 이때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로베르토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내 훈련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고, 훈련장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무료로.
로베르토가 공부하는 코칭법을 내게 적용해 보고 싶다는 이유였지만, 엄연히 자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로베르토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고, 로베르토를 따로 만나 코칭비를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베르토가 받지 않았다. 이거 주면 안 도와주겠다고 엄포를 놨다.
지금은 코칭 공부와 유망주(나)의 변화에 집중하고 싶은데 돈 같은 걸 받으면 순수하게 몰입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마 이번 생에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렇게 잔칫상을 차렸겠지.
앞으로 저녁도 가능하면 매일 먹으러 오라는 게 어머니의 타협점일 테고 로베르토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에 운동복을 챙겨입고 로베르토를 따라 집을 나섰다.
“잔디 운동장은 너희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더라. 이 정돈 괜찮지?”
“네. 자전거 타면 돼요. 그런데 바쁘시지 않으세요?”
“난 통역 일이 있을 때만 일하는 계약직이거든. 회사에서 부를 때가 아니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로워. 평소에는 백수랑 다를 바 없지.”
로베르토는 그렇게 말하더니 혼자 쿡쿡 웃었다.
“코칭까지 해주신다고…….”
“상진 형님한테 들었지?”
“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어. 윈-윈이야. 내가 평소에는 스포츠과학이랑 코칭법 관련 논문 찾아보면서 공부하고 있거든. 널 도와주면서 실습도 해보고. 뭐 그런 거지.”
“와아.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당장 생각나는 건 없네. 오늘은 테스트 정도만 해보자.”
“네!”
그렇게 좀 걷다가 내가 말했다.
“한국말 진짜 잘하네요.”
“반은 한국인이니까. 엄마가 한국인이거든.”
“정말요?”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 대화를 건너뛰면 안 된다.
로베르토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우리 외할머니는 심지어 국밥집 하셔. 나중에 데려가 줄게. 좀 놀랄 수도 있지만…… 다 왔다.”
드디어 왔다.
열한 번의 인생 중 대부분, 이 시기에는 이곳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스포츠 의류업체 ARD,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르드라고 불리는 친근한 기업의 공장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무려 풋살장 규모의 잔디밭이 있었다. 잔디밭은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거 봐.”
심지어 밤에 운동할 수 있게 불도 켤 수 있었다. 이 시절에는 훌륭한 시설이었다. 그렇기에 불을 켠 로베르토는 어깨를 으쓱대고 있었고 나 또한 그를 위해 정말 놀랐다는 리액션을 해내고 있었다.
아직 해가 남아 있어서 조명의 효과는 적었지만, 로베르토가 좋아하면 그걸로 됐다.
“진짜 대박이에요!”
“좋지? ……어?”
뿌듯해하던 로베르토의 표정이 굳어졌다. 로베르토가 잔디밭을 제대로 보자마자였다.
잔디의 1/3 정도가 마치 태풍에 쓰러진 갈대처럼 쓰러져 있었다. 한 곳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곳이 중구난방으로 그랬다.
“잔디가 왜 이런데…….”
로베르토가 가장 가까이 있는 잔디들을 세워보려고 했다. 물론 전문가도 아니니 당연히 실패했다.
“왜요? 그래도 잔디밭이잖아요.”
“음…… 그래. 테스트나 하자.”
“네! 그런데 왜 공장에 이런 곳이 있는 거예요?”
“이 회사 사장님 취미야. 운동을 워낙 좋아하셔서 이런 공간을 만들었대. 여기서 골프 연습도 하고, 가볍게 축구 할 수도 있고, 직원들이랑 족구도 하고……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셔.”
“아하.”
로베르토는 운동장 구석에 자리 잡은 창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장비들이 있어.”
“그렇군요. 그러면 앞으로 여길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예요?”
“사장님이 없을 때는 마음껏 써도 좋대. 대신 잔디 뽑거나 스파이크로 찍어서 훼손하지만 말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는 로베르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따 구경 한번 오시기로 했어. 괜찮지?”
“당연하죠. 감사하다고 인사해야겠네요.”
“그래그래. 그거면 돼.”
이런 훌륭한 공간을 막 빌려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순진한 중학생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뒷사정은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