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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29화 (134/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29화

아르드의 사장은 스포츠 매니아고, 2002년 월드컵 이후부터 축구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회사 통역으로 고용한 로베르토의 경력을 알자마자 먼저 축구를 배워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로베르토는 통역 업무 외의 시간에는 논문 등으로 학술 쪽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돈을 번 후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코치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일을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

근데 나 때문에 코칭 제안을 수락했다. 그 대가로 이 훌륭한 운동장을 빌렸다.

전생들에서 이 뒷사정을 듣고 로베르토를 어린 선수만 좋아하는 로리콘이라고 놀려댔지만,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번 인생에서 로베르토는 나 때문에 피오렌티나의 유소년 총괄 감독까지 오르는 실크로드를 걷진 못한다.

그러니까 그것보다 더 좋은 길을 그에게 마련해 줘야만 한다.

“일단, 몸부터 풀까?”

“네.”

아침에는 체력 향상을 위해 무식하게 뛰었지만, 지금은 프로 축구를 경험한 좋은 파트너가 눈앞에 있었다.

좋은 훈련이란 어떤 것일까?

뭐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시대별로 큰 성과를 낸 훈련법은 존재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훈련법이 하나 있었다.

전술 주기화라고 불리는 단순하게 말하면 모든 훈련을 공을 가지고 실전처럼 하는 거다. 원래는 80년대의 훈련법인데 재발굴해서 최신화했다고 알고 있다.

“패스를 여러 방향으로 뿌릴 테니까 잘 받아봐.”

“네!”

조세 무리뉴는 하루 훈련 시간을 딱 90분으로 맞출 정도로 전술 주기화를 중시했고 메이저 리그가 아닌 포르투갈 리그 팀, FC포르투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현대 축구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업적을 이룰 것이다. 내년에.

그리고 로베르토는 이 이론이 대세가 될 것을 예감하고 이 이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훈련 방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단계였다.

로베르토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로베르토는 전술 주기화 훈련법을 시험해 보는 동시에 내 여러 능력치를 점검해 보고 있었다.

패스를 주고받으며 몸을 풀었고, 로베르토와 일대일로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했으며 슈팅이나 크로스를 여러 번 보여주며 내 개인 기량을 뽐냈다.

한 시간 뒤, 내 실력을 제대로 확인한 로베르토는 거의 십 초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 조기축구회에서는 적당히 한 거였구나.”

“…….”

“너, 진짜 천재였구나…….”

“에이, 천재라니요.”

“천재야. 확신해. 내가 비록 성공은 못 했지만, 지금 세리에A에서 유명해진 선수들이랑 직접 뛰어보기도 한 사람이야. 근데 너 정도는 한 번도 못 봤어.”

“……감사합니다.”

“혹시, 피오렌티나 유소년 팀에 갈 생각 있니? 이탈리아에 있는 팀인데 세리에에서 가장 강한 일곱 팀 중 하나야. 지금은 좀 휘청거리고 있지만.”

로베르토는 자신의 부족한 인맥을 써서라도 날 큰 무대에 데려가 주고 싶어 했다.

저 말을 수락하면 다섯 번째 전생처럼 흘러갈 테지만, 이번에는 한국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곤란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잘 생각해 봐. 결심만 하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테니까.”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게 보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걸 하려는 거야.”

로베르토는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었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잔디밭을 둘러싼 철망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탄탄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로베르토에게 인사했다.

“로비, 저녁은 먹었어?”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저녁도 먹었고 마침 쉬고 있었어요.”

“그래? 얘가 네가 말한…….”

사장의 외모는 30대 정도로 보이지만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다. 실제로는 40대 중반이었다.

스포츠 의류기업 아르드의 사장, 신정우.

아르드는 지금 국내에서 꽤 인기 있는 정도의 브랜드이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세계적인 브랜드로 탈바꿈한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이 남자가 있었다.

신정우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나는 신정우를 통해 아르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후원을 받을 생각이었다.

테니스의 나달이 기아와 맺은 계약처럼 아주 오랫동안 기업 차원의 지원도 받고, 맞춤 훈련 장비나 맞춤 축구화를 요구할 것이다.

* * *

“송현준이라고 합니다.”

“예의 바르구나? 아저씨는 신정우라고 해.”

신정우가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이런 좋은 시설도 쓰게 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월드컵 경기장이나 큰 공원 말고 이렇게 잔디가 깔린 곳은 처음 봐요. 공까지 찰 수 있다니!”

그렇게 말하며 난 한껏 감동한 표정을 연출했다.

“그러니?”

그러자 신정우는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저씨가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열심히 가꿨지. 전문가랑 계약해서 수시로 관리해 주는 소중한 공간이란다.”

“그렇군요…… 무슨 운동을 좋아하시나요?”

“이쪽에서는 골프 스윙 연습을 하지.”

신정우가 모서리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 모서리에서 수직으로 쭉 뻗으면 닿는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저쪽에 그물이 있는 거군요. 골프공은 작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이쪽에서는…….”

스포츠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신정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이 하는 운동들을 설명해 줬다. 나는 신정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는 축구에 관심을 갖고 있단다. 작년에 정말 대단했잖아? 그러다 보니 아저씨도 축구를 하고 싶어져서 말이다.”

“저도 작년에 정말 열심히 응원했어요. 나중에 꼭 다시 보고 싶어요.”

“그럴 수 있으려나…… 아무튼, 아저씨가 너무 길게 얘기했구나.”

신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잔디 운동장을 둘러보았다. 잔디가 누운 곳을 보며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세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내게 말했다.

“로베르토가 네 재능이 범상치 않다면서 여길 잠깐만 빌려달라고 하던데. 로베르토의 정성에 보답하려면 열심히 연습해야겠지?”

“네, 그리고 사장님께도 보답하려면 그래야 해요.”

“오오, 고맙구나. 아무튼, 여기 잔디만 망가뜨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것만 지키면 내가 쓸 때가 아니면 얼마든지 써도 돼.”

“명심할게요. 감사합니다.”

로베르토는 나와 신정우가 대화하는 내내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괜히 말실수할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대화가 마무리되어가니 점점 안심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저질러줬다.

“그런데 하나 짚고 가도 될까요?”

“짚고 간다고?”

“네. 지금 잔디가 몇 군데 누워 있는데 나중에 저걸 제 책임으로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뭐?”

“자, 잠깐만…….”

로베르토가 날 중재하려고 손을 뻗으며 다가왔지만, 신정우는 로베르토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한 후 크게 웃었다.

“하하, 그래, 그렇지. 당연하지. 확실하게 할 건 해야지. 책임 소재는 중요하지.”

방금까지도 적당히만 웃던 신정우가 진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생에서 가끔 보았던 신정우가 정말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모습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로비, 똑 부러지는 애를 데려 왔구만?”

“예에…….”

로베르토의 곤란하다는 얼굴을 보며 나는 웃었다.

괜찮다.

직원 앞에서는 쿨한 척하다가 나중에 직원을 혼내는 사장들도 많지만, 신정우는 아니었다.

신정우는 젊은 시절부터 외국 활동도 자주 했고, 실패도 자주 겪었기에 나이에 따른 예의를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똑 부러지게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신정우가 말했다.

“잔디가 쓰러져 있는 것까지 고려해 두마.”

“감사합니다.”

“나도 이것 때문에 고민이 많은데 해결이 안 돼서 참 골치 아프단다.”

“잔디가 똑바로 서지 못하는 건가요?”

“그래. 이것저것 실험해 봤는데 잘 안 되네.”

이 타이밍이었다.

“그러면, 인조 잔디로 천연 잔디를 지지할 수 있게 섞으면 어떨까요?”

“뭐?”

로베르토가 왠지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날 봤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신정우와의 첫 만남에서 반드시 씨앗을 심어놔야 했다. 첫 만남에서 인상을 남기지 못하면 신정우를 스폰서로 끌어들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정우는 내 말에 관심을 보였다.

“더 자세히 얘기해 볼래?”

“제가 잔디 관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닌데요…….”

2010년대 이후의 축구장은 전부 천연잔디를 깔지 않는다. 건물을 지을 때 골조를 만드는 것처럼 인조 잔디로 골조를 만들고 나머지 부분을 천연잔디로 채운다.

이렇게 하면 더 튼튼하고 관리하기 쉬워진다고 한다. 천연잔디와 밟는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지지만 그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축구 선수의 능력이다.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가면 벼가 휘청거릴 때 줄로 묶어놓더라고요. 이 줄의 역할을 인조 잔디가 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러면 겉보기에도 그럴듯할 거고 잔디가 쓰러지는 일도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버지가 그랬어요. 한 분야에서 일어난 문제는 다른 분야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고.”

“흐음…….”

나는 전문가가 아니고, 신정우 또한 잔디 전문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신정우는 내 의견을 듣고 잔디 전문가에게 의뢰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다른 잔디밭에서 실험해 볼 것이다.

왜냐면 인조 잔디로 골조를 세운다는 말은 비전문가가 들어도 그럴듯하게 들리니까.

신정우는 역시나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좋은 아버지를 뒀구나. 그렇지. 아이디어는 다른 분야에서 얻을 수도 있지.”

지금은 선수 생활 황혼기를 보내고 있고 나중에는 세계에서 손꼽는 명장이 되는 펩 과르디올라가 핸드볼 선수 출신 코치를 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똑똑하구나…….”

신정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네 말대로 해보자.”

“어…….”

“괜찮아, 괜찮아. 너한테 책임을 물리지 않을 거니까. 이건 내 선택이야. 대신.”

10번째 전생과 같은 흐름으로 진행되는 대화였다.

“만약에 네 말대로 잘 된다면 말이다.”

“네.”

“아이디어값으로 부탁 하나를 들어주마.”

“감사합니다.”

그래서 난 마지막에 웃었다. 내 미소가 기꺼웠는지 신정우도 마주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정우는 로베르토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나에게 다음에 보자고 인사하고 떠났다.

“어휴…….”

로베르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을 가장해서 로베르토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자식아.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냐?”

-여기가 이탈리아도 아니고 한국 어른들은 애들이 의견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사장님이 화낼 줄 알고 마음 졸였다 이놈아.

어떤 전생의 로베르토가 했던 말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난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이다.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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