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30화
“됐다. 됐어. 밤이 어두웠으니 돌아가자.”
로베르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내 어깨를 감정을 실어 팍팍 두들겼다.
“여기 열쇠도 받아라. 내가 못 오는 날은 혼자서 할 수 있지? 불 켜는 법은 지금 알려줄게.”
“네.”
신정우는 로베르토에게 자기가 대화를 한 후에 괜찮다고 하면 복사한 열쇠를 주라고 했다고 말했었다.
나는 로베르토에게 야간 조명등 키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로베르토는 나를 집 근처까지 배웅해 줬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왔구나~.”
티비를 보고 계셨는지 어머니가 현관까지 나왔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실에서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 동생은 자는 모양이었다.
“어땠니?”
“재미있었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요…….”
신발을 벗으며 어머니에게 로베르토와 훈련을 했고, 잔디 운동장을 빌려주신 사장님과 얘기를 나눴다는 얘기를 적당히 풀어서 하면서 짐을 풀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학교 끝나고랑…… 저녁마다 꾸준히 갈 생각이에요……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내 얘길 들으며 생글거리던 어머니가 이제는 히죽 웃었다.
“요즘 현준이가 다정해진 것 같아서 참 좋거든.”
“에이, 저 씻으러 갈게요.”
“그래~. 엄마는 자러 갈게.”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의 말에 부끄러워졌다. 의식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아무래도 민망한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마지막 인생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특히 중요했다.
어머니는 나와 얘기하는 걸 좋아했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걸 보면 나도 기쁘니까 사소한 것도 최대한 열심히 얘기하려고 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뜨는 걸 느끼며 꼼꼼하게 샤워하고, 가볍게 스트레칭한 후 바로 잠들었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 * *
“안녕. 오빠들.”
“안녕하세요. 송현준입니다.”
김채아가 손을 흔들었고,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우리 앞에는 김지혁과 친구들이 있었다.
전생에서 김채아의 결혼식 때마다 봤던 얼굴들이라 익숙했다.
“그래, 네가 채아 친구냐?”
김지혁의 친구 중 키가 가장 큰 선배가 내게 다가와 내려다봤다. 거의 190㎝은 되는 것 같다. 기선제압이라도 하려고 하는 건가.
“예.”
인사하고 적당히 눈을 피해 줬다. 눈을 빤히 바라보는 건 시비나 다름없는 나이다.
“그래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지혁이가 너 예의 바르다고 그러던데.”
“내가 언제.”
“와, 이 새끼 부끄러워하냐 설마?”
김지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하자. 간만에 훈련 쉬는 날이라고.”
“그건 맞는 말이네.”
“저거 가져오면 되나요?”
이미 위치를 파악한 풋살용 미니 골대를 향해 뛰면서 물었다. 적극적인 내 태도가 기꺼웠는지 김지혁과 친구들도 따라와서 남은 한 개의 골대를 들고 내게 위치를 알려줬다.
“여기다 놓으면 돼.”
이곳은 김지혁이 다니는 가자 중학교의 운동장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김지혁과 친구들이 이 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김지혁이라는 운동부 3학년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을 쓰기 편해서 이 장소에서 주로 모인다고 했다.
가끔 용돈을 모아서 풋살장을 빌릴 때도 있다고 했다.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열 번의 전생을 살아오면서 이 풋살 팀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건 전생의 김채아와 김지혁을 통해 풋살 팀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은 정보뿐이다.
마침, 김지혁의 친구와 함께 나뭇가지로 라인을 간단하게 그린 김채아가 돌아왔다.
“이제 6명이 됐으니까 우리끼리 3:3도 할 수 있겠다!”
김채아의 밝은 목소리에 김지혁과 친구들의 얼굴이 풀어졌다.
“맞네. 무리해서 상대 팀 섭외 안 해도 돼서 좋긴 하네.”
“X나 귀찮았었는데.”
김지혁과 친구들이 투덜댔다.
그중 가장 덩치 큰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오늘부터 나오기로 한 이상 특별한 일이 있는 거 아니면 빠지면 안 된다.”
“당연하죠. 축구부에 다시 들어갈 때까지는 계속 나올게요.”
“축구부? 너 축구부에 들어가려고?”
김지혁의 친구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김지혁이 말했다.
“내가 얘기 안 했나? 얘 나 초딩 때 X나 유명했었어. 축구 다시 시작한다고 새벽마다 연습하는 거 같던데.”
“맞긴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저번에 날 처음 봤을 때 아는 티를 안 내길래 모르나 싶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까지 축구부에 있었다 보니 날 아는 모양이었다.
김지혁의 친구들이 날 달라진 시선으로 보았다.
“아니, 난 그냥 김채아 친구인 줄만 알았지.”
“우리 그럼 대회 같은 데 나가봐도 될 것 같은데? 그동안은 지혁이 운동부 활동 겹쳐서 못 나갔잖아.”
“쟤가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잖아. 운동 쉬면 실력 떨어지지 않냐?”
여러 얘기가 오고 가고 있었다. 이들의 대화가 사그라들길 기다리다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 저기, 안 그래도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그들이 바라보았다.
“뭔데?”
“다음 달에 열리는 전국중학풋살대회에 나가보는 건 어떨까요?”
* * *
미리 알아보고 왔다. 전국중학풋살대회의 주최사는 쿠거. 세계에서 세 번째 정도 되는 스포츠업체였다.
배구로 대성한 전생의 김채아들에게서 반복해서 얘길 들었다.
이 대회에서 인생의 방향을 바꿔준 사람, 그러니까 하나 여중의 배구팀 감독을 만났다고. 배구를 하는 김채아는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충실하다며 만족하면서 살았다.
전생의 김채아는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무조건 이 대회에 나갔다.
다만, 열 번 중에 딱 네 번만이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만남을 가지게 된다. 조건은 풋살대회 4강 안에 드는 것이었다. 배구팀 감독은 4강부터 직접 대회에 나타난다.
여섯 번은 그전에 떨어졌다. 8, 9, 10번째 전생에서 확실하게 확인한 내용이었다.
2학기에 김채아에게 접근해서 친해진 다음에 풋살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려줘서 2학기 때 4강에 들 확률을 높여줄 생각이었다.
물론, 일찍 만나 버린 지금은 직접 4강에 보내줄 생각이었다.
1학기에 4강에 가도 비슷한 만남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했다. 김채아와 운명의 만남을 가지게 될 그 운동부 감독은 이 대회 관계자와 친하고 축구 보는 것도 좋아해서 4강 이상의 경기에서는 반드시 나타나니까.
이것도 전생에서 확인했다. 원래는 2학기에 4강에 실패하면 2학년 때 재도전하기 위해 알아봤던 정보였다. 이렇게 일찍 쓸 줄은 몰랐지만 전화위복이다.
또, 이 풋살대회에서 성과를 내는 거로 아르드의 대표에 눈에 들어 볼 계획도 있었다. 겸사겸사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기도 좋을 거다. 우리나라도 나중에 바뀌지만, 유소년 시절에는 풋살 같은 소규모 단위의 축구가 경기력 향상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난 이 풋살 팀에서 일거양득, 아니, 일거삼득을 이뤄낼 것이다.
“목표가 있으면 풋살이 더 재밌어질 것 같아서요.”
“음…….”
“좋긴 한데.”
김지혁을 제외한 세 친구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불신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지혁이 빼면 축구부 출신은 없지만, 이 근처 중학교에서는 우리가 가장 잘하거든. 고등학교 형들이랑 해도 우리가 이겨.”
당연하다. 나 없을 때도 운만 따르면 전국에서 4강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팀이었으니까.
재능만큼은 상당히 괜찮다.
“길게 말할 필요 있을까요. 3:3으로 풋살 한판 하면 되죠.”
그래서 기대가 된다.
내 말에 김지혁과 김지혁의 친구들이 웃었다. 재미있다는 얼굴들이다.
“시원하네.”
“그러면 실력 좀 볼까?”
“팀은 어떻게 짜지?”
김지혁이 나섰다.
“나랑 너랑, 너. 이렇게 팀하고 김채아랑 송현준, 그리고 너랑 팀 해.”
키가 가장 큰 친구를 나와 김채아에게 붙여주고, 나머지가 한 팀을 먹었다. 김채아도 김지혁의 친구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잘하기에 팀을 나눈 것에 대해 아무도 불만이 없었다.
그저 내가 얼마나 할지 궁금해하는 시선만 느껴졌다.
“규칙은 골키퍼 없이 3:3. 골키퍼가 없으니까 중거리 슈팅은 금지고 골대 주변에 그린 원…… 그러니까 골라인 안에서만 슈팅 가능한 거로.”
“네.”
“나머지는 뭐, 축구랑 똑같은데…… 공 나가도 스로인은 없는 거 알지?”
“네. 코너킥처럼 발로 차는 거잖아요.”
“그렇지.”
“너희 포지션 안 정해?”
김지혁은 타이머를 꺼내 시간을 설정하며 물었다.
나와 김채아, 그리고 김지혁의 친구 중 가장 덩치가 큰 이승진이 모였다.
이승진이 말했다.
“나 원래 골키퍼 주로 보거든? 그러니까 내가 가운데 서서 수비도 볼게.”
“네, 채아 넌 어떻게 할래?”
“난 왼쪽이 편해.”
“그럼 난 오른쪽.”
포지션은 금세 정해졌다. 풋살은 수비도 공격도 다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포지션 때문에 큰 다툼 같은 건 없었다.
“전후반 20분씩이다?”
김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타이머를 밖에 놓고 왔다.
그리고 공을 들고 중앙에 놓고, 가위바위보를 한 후에 경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선공이었다.
* * *
‘와…….’
김채아는 송현준과 함께 경기를 뛴 게 처음이었다.
박종혁과의 대결과 함께 한 훈련, 체육대회 결승전에서의 활약 덕에 송현준이 비범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야, 기가 막히는데! 너희들도 좀 잘 해봐!”
실제로 뛰어보니 더 초월적이었다. 자신의 조잡한 패스를 간단한 움직임과 기본기를 통해 완벽한 플레이로 바꿔버렸고, 쉽게 골망을 흔들었다.
같은 팀인 이승진이 신나서 김지혁 팀을 도발할 정도로 대단했다.
또, 송현준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활짝 웃으며 김채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스 패스였어.”
“어…… 네가 다 했잖아…….”
“아니야, 패스가 좋았어.”
송현준은 그렇게 말하며 김채아 앞에서 손바닥을 내밀었고, 그녀는 하이파이브를 해줬다. 송현준은 이승진과도 하이파이브했다.
축구를 즐기는 게 느껴졌다.
김채아는 화난 얼굴로 공을 들고 중앙으로 걸어오는 자신의 오빠를 바라보았다.
열 받을 만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손쓸 틈도 없이 골을 먹혔으니까.
심지어 방금은 송현준에게 자기가 패스하는 게 읽혔는지 오빠를 포함해서 두 명이 순식간에 달라붙었다.
실수라고 생각하면서 수비하기 위해서 뒤로 뛰려는데 송현준의 움직임이 그걸 멈추게 했다.
일단 양팔을 뻗으며 자세를 낮춰 두 명을 동시에 등졌다.
그리고 공이 도착하기 직전, 밀어붙이는 김지혁 쪽 팔을 재빨리 빼서 중심을 흩뜨렸다. 이어서 소극적으로 몸싸움을 건 나머지 한 명을 마치 회전축처럼 이용해 공을 받으며 부드럽게 턴 해서 순식간에 두 명을 제쳐냈다.
그리고 달려드는 남은 한 명을 발바닥으로 공을 옆으로 굴리는 볼 롤로 가볍게 제치고 뛰어가서 툭 집어넣었다.
저런 건 우연이 아니다. 빛나는 재능을 오랜 연습으로 가다듬어서 만들어낸 보석 같은 플레이다.
그리고 저런 대단한 애가 지금 같은 팀이었다. 김채아는 오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오늘 새로운 걸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