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34화
“은영아, 은영아, 나 진짜 괜찮지?”
“작작 하고 그냥 가…… 좀…….”
정은영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적극적이었던 정은영도 김채아의 반복되는 질문에 지쳐 버렸다.
“이제 몰라, 알아서 해.”
정은영은 김채아를 교문 쪽으로 떠밀려고 했지만, 그녀의 약한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김채아는 정은영에게서 빌린 거울로 또 한 번 자기 머리가 삐져나오지는 않았나, 뭐가 묻지는 않았나 살폈다.
아까부터 교문에서 기다리던 송현준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보였다. 김채아가 굳게 결심한 얼굴을 하며 정은영에게 거울을 돌려줬다.
“그럼 진짜 가볼게.”
“그래…… 난 후문으로 갈 테니까 알아서 잘해봐…….”
“고마워!”
김채아의 표현에 정은영은 마음이 풀린 건지 힘없이 웃었다.
“그래, 힘내.”
그리고 그녀는 후문으로 떠났다. 김채아는 학교 출입문의 유리에 비치는 자신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송현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인사했다.
“안녕! 늦었지.”
“아니야. 우리 반이 일찍 끝나서 먼저 나와 있었어.”
“그렇구나…….”
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송현준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새 체육복 산 거야?”
김채아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해 버렸다.
“원래 사려고 했어!”
흐름에 맞지 않는 괴상한 대답이었다. 김채아는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았다.
그때, 송현준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딱 맞아서 잘 어울리네. 지난번에 본 건 너무 커 보였거든.”
“……그래? 그거는 엄마가 내 키가 더 클 수도 있다고 하셔서 그냥 여유 있게 사자고 해서…….”
생각보다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송현준은 일단 점심부터 먹자면서 벤치로 따라오라고 말했다.
김채아는 송현준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체육복 얘기를 했고, 금세 운동장 구석에 있는 벤치에 도착했다.
“먼저 앉아.”
김채아는 체력장이라고 책가방을 안 메고 왔지만, 송현준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송현준은 가방 속에서 도시락통을 꺼냈다.
“괜찮아. 금방 해.”
김채아가 도시락통을 정리하는 걸 도와주려고 했지만, 송현준은 점잖게 제지하며 도시락통을 금방 꺼내서 벤치 위에 놓았다.
도시락통 안에는 랩으로 꼼꼼하게 포장된 샌드위치들과 방울토마토들이 들어 있었다.
“와…….”
“엄마가 싸주신 거야.”
“정말?”
“점심도 사주고 싶었는데 버스 시간에 늦을 거 같아서 집에서 싸 왔어. 미안.”
김채아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시락이라니, 정말 좋았다.
“아니야, 이게 더 좋아.”
“정말?”
김채아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닫고 부끄러워져서 고개만 끄덕였다.
송현준은 푸근하게 웃으며 김채아에게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이거랑 이거 먹으면 돼.”
“이거 다 계란이야?”
“응, 맛있어.”
김채아와 송현준은 둘 다 계란만 들어간 샌드위치를 먼저 집어 들었다. 잘게 썬 계란이 잔뜩 들어가서 몹시 두꺼웠다.
김채아는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계란의 흰자가 씹히는 느낌, 잘 배어든 노른자와 마요네즈, 신선한 식빵이 깔끔하게 조화된 샌드위치였다.
단순한 샌드위치였지만 고소하면서 달달해서 그런가 김채아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김채아는 송현준보다 빨리 먹어치우고 말했다.
“너무 맛있다…….”
송현준이 푸근하게 웃었다.
“우리 엄마 비장의 무기거든. 예전에 일본 여행 가서 먹어본 거 따라 해보신 거래.”
“비장의 무기라고 할 만하다! 맛있었다고 전해줄 수 있어?”
“당연하지. 엄마가 좋아하시겠네.”
송현준은 그렇게 말하며 남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김채아는 새 샌드위치를 꺼내 들며 생각했다.
이렇게 사소한 대화를 하는 건 처음 아닌가? 그것도 단둘이서.
조금 쑥스러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좋았다. 기뻤다.
생물 선생님이 수업 때 말했다. 운동장에 서 있는 나무들의 이름은 플라타너스라고.
잎도 크고 잘 자라기도 해서 공기를 맑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늘도 주는 고마운 나무라고 했었다.
그때는 잘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겠다.
이 나무는 멋진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랑스러운 나무다.
학교 건물에서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교문으로 향하고 있었고, 운동장에서는 남자애들이 축구, 농구도 하고 경찰과 도둑 놀이도 하면서 뛰어놀고 있었다.
김채아와 송현준처럼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여자애들도 보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김채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 정도로 좋아도 되나 싶을 만큼 좋았다. 올해 들어서, 아니, 인생에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 적이 있었나 생각할 정도로.
계란 샌드위치에 이어 햄 샌드위치도 다 먹어 치운 김채아에게 송현준이 샌드위치를 또 하나 내밀었다. 그리고 송현준은 도시락통 바닥에 있는 통 하나를 더 꺼내서 열었다.
푸른 채소들과 찐 닭가슴살이 보였다.
김채아가 빤히 바라보자 송현준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이건 맛없는 거라서, 따로 네 걸 준비하지는 않았는데. 방울토마토 먹는 게 더 맛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송현준은 방울토마토를 조금만 먹고 말았다. 샌드위치도 두 개만 먹고 대부분 김채아에게 주었다.
김채아는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맛없는 걸 왜 먹어?”
김채아는 맛없는 걸 먹지 않는다. 운동을 꾸준히 해서 그런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맛있는 걸 찾아다니는 게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받는 용돈을 전부 학교 앞 분식집과 점심시간에 매점 간식을 먹는 데에 쓸 정도였다.
송현준의 대답은 김채아에게 꽤 신선했다.
“몸 관리 때문에. 세끼 다 얼마나 먹어야 할지 정해놔서 최대한 그것대로 맞춰서 먹으려고 하거든.”
“몸 관리?”
“응, 생물 시간에 탄수화물, 단백질 뭐 이런 거 배우잖아. 그거 비율 맞춰서 먹는 거야. 그러면 체중이나 컨디션 관리하기 좋거든.”
송현준은 정말 대단하구나, 김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덩달아 장난기도 동했다.
“키 크려고?”
송현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에는 내가 너보다 더 클걸.”
“그래, 힘내봐.”
송현준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김채아도 웃었다. 굳이 장난이라고 덧붙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장난다운 장난 같은 얘길 한 것 같았다.
아까도 생각해 봤지만, 송현준과 이런 잡담을 한 게 진짜 처음인 것 같아서 김채아는 잠시 충격을 받았다.
한 달을 넘게 봤는데 이런 얘기를 처음 하다니.
뭔가 억울하기도 했고, 기분은 계속 좋은 채였기에 김채아는 흐름을 타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축구는 언제 시작했어?”
평소와 같은 축구 얘기였지만 달랐다. 송현준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묻는 거였으니까. 목적이 다르면 같은 행동이 나와도 다르다. 김채아는 그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빠가 나 태어나기도 전부터 축구 마니아였거든. 그렇다 보니까 기억도 안 나는 아기 때부터 공 갖고 많이 놀았고…… 그러다 보니까 동네에서 축구도 잘했고……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된 거지.”
“그러면, 그러면, 오빠가 그랬는데 너 손백호 축구상도 받았다며. 어땠어?”
“그때는…….”
송현준은 김채아가 뭘 물어보든, 음식을 꼭꼭 씹고 삼킨 후에는 꼭 천천히 다 대답해 줬다.
김채아는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송현준이 음식을 다 먹자마자 도시락을 챙기면서 갈 시간이라고 말할 땐 깊은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점심은 너무 간단했지? 버스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저녁은 맛있는 거로 사줄게.”
“최고였는데?”
“최고였다고?”
“응…… 진짜로.”
송현준의 되물음에 김채아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피하진 않았다. 송현준도 김채아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김채아는 온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얼른 가자.”
그래서 김채아가 먼저 말했다. 송현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채아와 나란히 걸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줬다.
* * *
“쟤네 잘한다…….”
김채아가 멈춰 서서 운동장을 들여다봤다.
이민우가 다니는 대서 중학교는 테니스장 주변에 세워진 철망으로 운동장이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안이 보였다.
그래서 이민우와 친구들이 풋살을 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나 또한 김채아 옆에 섰다.
이민우의 팀원은 열 명이다. 오늘은 두 명이 결석했는지 4:4 경기를 하고 있었다. 어린 이민우가 뛰는 모습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소감은 그때와 같았다. 역시, 더럽게 잘한다.
회귀라는 치트키를 갖고 있음에도 실수하면 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그러니까 축구가 재미있는 거겠지.
나는 긍정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대서 중학교 건물에 걸린 대형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의 바늘이 이제 막 두 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김채아, 들어가자.”
“응.”
경비 아저씨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동네 주민이라고 생각했는지 우릴 보며 쩍 하고 하품만 했다.
나는 김채아와 함께 운동장 앞 스탠드의 맨 아래에 앉았다.
풋살 경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김채아는 옆에서 잘한다면서 감탄도 하고, 집중해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약 10분 정도가 지나니 경기가 끝났다.
경기 중에 봤던 건지 이민우가 곧장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이민우는 긴가민가한 기색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전생의 친구를 만나는 건 몹시 반가운 일이었다.
이민우의 카페 닉네임을 말했다.
“미누 님 맞죠?”
“그럼 당신은…… 주니 님?”
……이 시대에 맞게 닉네임을 지은 건데 역시나 더럽게 수치스럽다. 이민우도 내 입을 통해 자기 닉네임을 들어서 그런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와, 이거 존나 부끄럽네. 난 이민우야.”
“난 송현준.”
라틴계와 아시아계의 외모가 완벽하게 반반 섞인 이국적인 외형의 이민우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주니보다 훨씬 낫네. 송현준이라고 부를게.”
“민우가 미누보다도 나은 것 같고?”
내가 받아치자 이민우는 낄낄 웃었다. 그리고 주변에 다가온 자신의 풋살 팀원들이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온다고 했던 인터넷 친구야. 너희들끼리 경기하고 있어. 이따 합류할게.”
“엉~.”
“공 하나만 주고 가라.”
이민우의 친구가 이민우를 향해 대충 공을 찼다. 이민우는 우리 옆으로 지나가려는 공을 발등으로 가볍게 튕기고, 무릎으로 한 번 더 튕긴 후에 이마에 올렸다.
“우와…….”
김채아가 감탄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민우는 머리 위에서 공을 통통 튕기더니 고개를 틀어서 내 쪽으로 헤딩했다.
“오?”
물론 예상했다.
내 가슴팍으로 어중간하게 보낸 걸 보면 내 개인 기술을 테스트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상체를 살짝 숙여서 어깨에 공을 받는 동시에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공을 멈춰 버렸다.
그리고 어깨를 튕겨서 공을 머리 위에서 한 번, 반대쪽 어깨에 한 번 튀겼다.
다음은 가슴에 한 번, 양쪽 무릎에 한 번씩, 양쪽 발 등에 한 번씩 리프팅 한 후 공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딱 밟았다.
“와…….”
김채아의 진심 어린 감탄이 마음에 들었다. 역시 오늘 새벽 내내 로베르토와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이민우의 눈에 차오르던 흥미가 활화산이 터지듯 폭발했다. 눈이 이글이글하다.
“괜히 그런 메일을 보낸 게 아니었구나! 너! 진짜 마음에 든다! 나한테 공 줘봐.”
“나 아직 몸 안 풀렸으니까 살살 하자고.”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