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36화
“엥? 갑자기?”
갑작스러운 사과에 김채아는 당황했다. 이민우는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잘못한 건 빨리 사과해야지. 아무튼! 너도 꽤 하더라. 좀만 봐도 알지. 기본기도 수준급이고 팀플레이도 이해할 줄 알고, 몸도 안 사리고, 아주 대단해!”
“……고마워.”
“그래, 맞아. 아까는 기분 나빴다고.”
어느새 송현준이 와서 이민우에게 툴툴댔다. 친한 친구에게 하는 말 같아서 김채아는 신기했다.
이민우가 크게 웃었다.
“하하! 미안해! 내가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거였어. 근데, 너무 좋다! 축구 잘하는 여자애랑 경기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거든. 신선해서 너무 좋아! 민규야! 민규야!”
“시끄러, 우리 방금 골 먹혀서 동점이라고.”
“괜찮아, 괜찮아. 더 넣으면 되지.”
건방지다기보다는 자신감으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지면 뒤진다! 진짜다!”
“우리 홈에서 쪽팔리게.”
“아아! 당연히 안 지지! 내가 누군데!”
이민우의 친구들이 야유했고, 이민우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송현준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김채아는 뭔가 들뜬 것 같은 분위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6분 남았네. 남은 경기도 재미있게 해보자.”
이민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김채아에게 악수를 청했다. 김채아는 악수를 받아줬다. 그리고, 남은 6분 동안 송현준과 김채아의 팀은 두 골을 내리 먹히며 3-1로 졌다.
* * *
송현준이 기뻐하는 중인 이민우와 친구들에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친선경기는 어떡할 거야?”
“당연히 해야지. 너희도 좋지?”
이민우의 친구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경기에서 져서 그런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던 송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옅게 지어졌다.
“언제가 좋을까?”
“형들도 와야 하니까 메일…… 아니, 버디버디 아이디 있어?”
“당연히 있지!”
훈훈한 대화가 옆에서 이뤄지고 있었지만, 김채아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두 개의 장면이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얘네가 작정하고 하면 지금 숫자로는 못 막아. 상심할 필요 없어.’
첫 번째 장면은 송현준이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해 줬었다. 풋살 특유의 파라 패스를 활용한 전술로 김채아는 농락당했다.
김채아도 풋살을 꽤 했다. 그렇다 보니 파라 패스를 할 줄도 알았고 파라 패스를 활용한 전술 같은 것도 오빠에게 배우고 자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전국대회 1위 팀이자 송현준과 비슷한 급의 선수가 펼치는 파라 전술의 속도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민우가 김채아가 막고 있는 오민규에게 패스했고, 오민규가 파라로 김채아의 뒤로 오는 이민우에게 찔러줬고 이민우는 어중간하게 날아오는 공을 논스톱 발뒤꿈치로 어느새 달리기 시작한 오민규에게 넘겨주고.
무슨 서커스 묘기를 보는 것 같은 패스워크와 움직임이어서 김채아는 한 박자 늦게 오민규의 뒤만 쫓아갔고 당연히 골을 먹혔다.
그래, 이건 팀 적인 호흡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자.
하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김채아는 송현준의 조언대로 오민규가 오른발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도록 오민규의 오른발 쪽으로 수비적인 움직임을 가져갔다.
아주 정석적이고 훌륭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오민규는 오른발밖에 못 쓴다는 자신의 단점을 채울 수 있는 필살기를 갖고 있었다.
오른발 하나만으로 공을 순식간에 좌우로 보낼 수 있는 플립플랩이라는 개인기였다.
오민규는 김채아와의 1:1에서 오른발을 이용해서 오른쪽으로 공을 치고 나가는 척하다가 김채아가 일부러 비워둔 왼쪽으로 볼을 보내는 플립플랩을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빼앗긴 김채아가 뒤늦게 쫓아가려고 했지만 김채아에 눈에 보인 건 이미 자기의 수비 범위를 빠져나간 오민규의 등뿐이었다.
김채아는 어떻게든 막으려고 몸과 발을 뻗어봤지만, 오민규는 한 템포는 빠른 속도로 슝 하고 빠져나가 버렸다.
김채아는 허공에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졌고, 첫 골 때의 김채아처럼 이민우가 송현준의 움직임을 막는 동안 오민규는 쉽게 골을 넣었다.
키가 작고 무게중심이 낮으니까 순발력이 더 뛰어날 수 있다. 먼저 공격하는 주도적이 입장이니까 반 템포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안다.
하지만, 오민규가 쉽게 골을 넣고 송현준이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은 김채아의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았다.
왼쪽을 비워뒀으니 왼쪽으로 나갈 수도 있는 건 당연한 건데, 왼쪽을 아예 배제했던 게 패인이었다.
발기술이 그렇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10분 내내 계속 반 템포에서 한 템포 정도 오민규가 빨랐다.
오민규는 자기 무기를 전부 사용할 줄 안다는 느낌이었고 김채아는 아니었다.
송현준은 안 부족한데 자기가 부족해서 밀린다는 그 느낌.
자기가 폐를 끼쳐서 경기를 졌다는 그 사실에 김채아는 좌절했다.
“수고했어. 친선경기 때도 기대할게.”
“그래…….”
이민우와 오민규가 차례로 악수를 건넸고, 김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받았다.
하지만 기분이 딱히 좋지는 않았다. 계속 머릿속에 아까 그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툭.
“……?”
누군가 시무룩한 김채아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김채아는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가 송현준의 얼굴을 보고 풀렸다. 방금 경기에서 자기 때문에 진 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이어서 들었다.
김채아는 이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김채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지, 송현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 때문에 수고 많았어. 밥 먹으러 가자.”
* * *
김채아는 승부욕이 몹시 강하다.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특히, 세계적인 선수가 될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승부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전생을 많이 거치면서 평범한 상황에서는 승부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지만, 나도 가끔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의 승부욕에 휩싸일 때가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승부욕을 표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폭력성을 드러내는 또라이 같은 스타일도 있고, 박종혁처럼 잠깐은 흥분하다가 애써 웃으면서 승부욕을 억누르는 타입도 있다.
그리고 김채아는 꽤 정석적인 방법으로 승부욕을 풀곤 했다.
김채아는 게임에서 져서 화가 나면, 말이 없어지고, 시무룩해진다. 그리고 혼자서 왜 졌는지 생각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훈련하며 땀을 흘리면서 기분을 풀었다. 가끔 지나칠 때는 훈련하다가 다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의 김채아는 자기가 그런 방식으로 승부욕을 풀 수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단 전생의 경험대로 김채아의 기분부터 풀어줄 생각이었다.
김채아는 패배 후의 훈련을 하기 전에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다. 시즌 중이라면 몸 관리를 위해 칼로리나 염분을 생각해서인지 두세 조각만 집어 먹는데…… 아무튼, 집어 먹었다. 구단 몰래 먹는 거라며,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내게 경고했던 게 떠오른다.
지금은 프로도 아니고 몸 관리할 필요도 없으니 잔뜩 먹어도 된다.
“다 왔어. 여기야.”
대서 중학교에서 걸어서 30분.
김채아는 말없이 내가 가자는 대로만 따라왔고, 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복떡복떡]
김채아가 모든 전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집에 왔으니까.
어느 전생에서는 김채아가 너무 좋아한 나머지 대전에 들를 때마다 먹는다고 방송을 타서 전국지부를 둔 프랜차이즈 업체로까지 성장할 정도였다.
물론, 내게도 맛있는 집이었다. 무슨 소스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맛이 정말 깊었다.
“…….”
김채아는 외관도 제대로 보지 않고 날 따라서 가게에 들어왔다.
달짝지근하고 매콤한 냄새가 가게를 채우고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럴 만했다.
“이모님~ 떡볶이 1인분에 소스 많이 주시고요.”
“아이고, 1인분에 소스 많이라니, 그냥 2인분 시켜.”
“에이~ 다른 것도 먹으려고 그래요. 계란 두 개랑요. 김말이 네 개랑, 오징어 튀김 두 개랑 순대도 1인분 주세요. 순대는 순대보다 부속 많이 주세요. 특히 폐 많이 주시고요.”
물 흐르듯 주문하자 가게 이모님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김채아는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승부욕과 좌절감은 한 끗 차이다.
김채아는 지금 좌절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혼란스럽기도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수치스러울 정도로 당했다. 오민규 녀석 좀 살살하지…….
뭐,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김채아가 좋아하는 걸 주문했으니까.
“자, 마셔.”
“……고마워.”
김채아에게 시원함 물을 한 잔 따라줬고, 이어서 수저를 깔았다.
김채아는 물을 한 모금 홀짝거리고 다시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드디어 날 바라보았다.
“미안…… 나 때문에 졌어.”
어렵게 눈을 보나 했는데 김채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그런 빠른 템포에 처음부터 적응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리고 다섯 명이 뛰면 다를 거야.”
“그래도…….”
“진짜 괜찮아. 난 너 포함한 우리 풋살 팀원들이 한 달이면 걔네를 이길 수 있을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해.”
그쪽은 다 중학교 1학년들이고 이쪽은 중학교 3학년이 다수라 피지컬에서 확실한 차이가 났다. 그쪽은 이민우와 오민규를 제외하면 대단한 실력을 가진 친구는 없었다.
친선경기로 최고 수준의 템포가 어떤지 맛보고, 우리의 장점에 맞는 훈련을 하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다. 확신한다.
강원도에 있는 또 다른 팀은 이민우의 팀을 이길 정도가 되면 자연스럽게 상대할 수 있을 거다.
김채아에게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김채아가 허탈한 듯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송현준…… 네가 너무 자신만만하니까 기운 빠져…….”
“뭐가?”
“혼자 우울해한 게 바보 같잖아.”
투정하는 김채아를 보니 두 번째 전생의 김채아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경기 졌다고 집에서 짜증 내면 죽을 줄 알아. 짜증 낼 기운이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야. 그 기운까지 짜내서 훈련하든 연구하든 해야지.
리그에서 5연패를 하고 집에서 계속 짜증을 부렸다가 혼이 났었지. 두 번째 전생의 김채아는 저 말대로 집에서는 경기적인 문제로 짜증을 부리거나 하지 않았기에 나는 반박할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사과했었다.
그리고 이 말은 그 이후 모든 전생에서 지금까지 내 습관이 되었다.
“바보 같은 거 맞지. 생각만 하면 뭐 해. 행동을 해야지.”
-그렇게 열심히 한 다음이면 집에서 기운 없이 뻗어 있어도 괜찮아. 그때는 내가 극진하게 위로해 줄게.
두 번째 김채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 지금의 김채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서 했다.
“내가 아는 사람한테 배웠는데, 운동에서 졌으면 화내거나 기운 없는 티 낼 힘으로 운동을 하든 연구를 하든 하래. 위로는 그다음에 힘 다 빠진 채로 받는 거고.”
“……너무해.”
김채아는 뚱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댔다. 자세히 보면 볼이 살짝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자기의 심정에 공감해 주는 게 아니라 해결 방법을 말해서 화가 난 걸지도 모르겠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있는 건 두 번째 전생의 김채아가 아닌데.
실수를 하면 만회해야 한다. 다행히도 지금의 내겐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