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39화
“형들도 잘하던데요? 한 판 비기셨잖아요. 우리 이래 봬도 가장 최근에 열린 전국대회 우승팀이라고요.”
“솔직히 덩치빨이었지.”
“그것도 실력이죠.”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짜장면을 시키고 오니 김지혁과 이승진, 이민우와 친구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경기나 치러서 사이가 좋아 보였다.
김채아는 이게 두 번째라 그런지 이번에는 크게 좌절하지 않고, 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오늘도 짜장면 먹으면 기분이 풀릴 거다.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중간 두 경기는 둘이 같이 안 뛰었어요? 완전 다른 팀이던데.”
이민우가 김지혁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혁이 형은 야구부라서 다음 달에 열릴 대회에서 전부 출전 못 할 수도 있거든.”
“아…… 아쉽다. 지혁이 형 진짜 잘하던데.”
김지혁은 축구부 때도 꽤 잘했다. 아니, 상당히 잘했다. 야구선수로도 괜찮게 성공했지만 분명 축구선수 쪽으로 쭉 나갔어도 괜찮았을 거다.
그만큼 김지혁과 내가 같이 뛰면 팀의 퀄리티가 한 단계 올라간다.
“고맙다. 이민우라고 했지? 정말 재미있었다. 그리고 너 정말 잘하더라. 송현준 같은 놈이 하나 더 있었네.”
“에이, 뭘요. 송현준 쟤는 저보다 더 잘하는 거 같던데요. 그리고 저희도 재밌었어요. 그렇지?”
이민우의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응!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음료수랑 아이스크림 사 왔다.”
“오오! 형님들!”
이민우가 넉살 좋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와 아이스크림 봉투를 들고 있는 건 배호영과 유호성, 김지혁의 풋살 팀 멤버 중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들이었다.
경기 끝나자마자 가위바위보를 하더니 아까 약속한 대로 음료수를 사러 갔다 온 거다.
우리는 이제 다 같이 모여 앉아서 음료수를 먹으며 방금 경기 얘기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철가방을 든 멋진 남자가 도착했다.
“짜장면 시키신 분~!!!”
다 같이 먹을 때는 쟁반짜장이 최고다.
우리는 경기장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서 쟁반짜장과 탕수육, 군만두를 즐겼다.
4명, 4명, 3명씩 모여 앉아서 먹었는데 나는 이민우, 김지혁, 김채아와 함께 앉게 되었다.
군만두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김채아를 보고 있는데, 이민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아리고 사키 알아?”
“당연히 알지. 압박 축구로 유럽을 제패해서 지금 축구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잖아. 지역방어라던가 압박이라던가, 그런 개념을 다들 알게 만든…… 뭐 그런 사람?”
“하, 진짜 좋다. 이런 얘기 할 사람이 없었거든.”
이민우는 그렇게 말하며 요한 크루이프 같은 옛 선수나 옛 감독들의 이름이나 지금 유명한 선수나 감독들의 이름을 꺼내면서 내게 이것저것 물어봤고, 나도 전부 아는 건 아니었기에 아는 선에서 대답해 줬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는지 이민우는 짜장면도 제대로 먹지 않고 계속 얘기할 정도였다.
“야야, 나중에 또 얘기해도 되니까 일단 먹자고. 탕수육 식으면 맛없어.”
“맞다.”
내가 나서서 대화를 멈춘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김채아가 먹는 걸 멈추고 우릴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채아는 이제는 깨작거리며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아까보다 느려진 게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이럴 때는 회귀가 아니라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갖고 싶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얘기 들어보니까 너희들은 축구 잘할 만하다.”
“네? 왜요?”
조용히 있던 김지혁의 말에 이민우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순수하게 물었다.
김지혁이 말했다.
“별의별 걸 다 알잖아. 그만큼 축구라는 종목에 깊게 파고드는 거고. 야구도 비슷하거든. 깊게 파고드는 애들이 잘하더라. 좋아서 그러든 재능이 있어서 그러든. 가끔 예외인 경우도 있지만, 뭐, 대체로 그렇다고.”
“아하.”
김채아가 이번에는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김지혁과 이민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너 그럼 요한 크루이프가 감독일 때…….”
이민우의 상대를 해줘야 했으니까. 나도 이민우와 얘기하는 걸 좋아하긴 한다.
* * *
“잘 가~.”
“다음 달에 경기장에서 만나자고.”
“너희랑은 만나기 싫거든.”
송현준의 퉁명스러운 말에 이민우가 히죽 웃으면서 대답 없이 손을 흔들고 떠났다.
김지혁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야구부에 이런 후배가 둘 있었으면 더 재밌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짜장면 그릇은 모두가 함께 치웠다.
김지혁과 친구들은 다들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송현준이 말했다.
“저기, 김채아, 형들. 잠깐 제 얘기 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뭔데?”
김지혁의 친구인 이승진, 배호영, 유호성은 벤치에 앉았고, 김지혁과 김채아, 송현준은 선 채로 벤치 하나에 모였다.
“빨리 얘기하고 끝낼게요.”
“천천히 해도 돼.”
“감사합니다. 제가 풋살대회에 나가자고 하고, 오늘 막 친선경기도 잡고 했는데 다들 좋게 봐주셔서…… 저는 정말 더 열심히, 진심으로 해볼 생각인데요.”
“그래?”
김지혁과 친구들은 그게 뭐? 하는 반응이었다. 기특하지만 굳이 이렇게 불러서 얘기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형들은 왜 풋살대회에 나가시려는 건가 해서요. 저는 그냥 경기를 많이 뛰고 싶어서 그런 거였거든요.”
“아아…… 별거 아니야.”
김지혁과 친구들은 시선을 나눴다. 김채아만이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김지혁이 친구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얘기했다.
“이승진, 이 새끼는 운동만 잘하고 공부는 못하는데 인문계를 간대.”
“이제 공부할 거거든.”
“배호영, 야한 그림을 존나게 잘 그리는 이 새끼는 예술 고등학교에 간대. 존나 웃기지 않냐?”
“야 이 미친놈아. 너희들이 그려달라고 해서 그려줬더니.”
“유호성, 이놈은 공부 싫다고 실업계에 간대. 그리고, 나는 같은 대전이긴 한데 저기 중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잠정 스카웃 돼서 그쪽으로 갈 거거든.”
송현준이 이해했다는 얼굴을 했다.
김지혁이 말했다.
“내년이면 다 흩어지는 거 확정이고, 채아도 우리 없으면 같이 풋살하기 어려울 테니까…… 올해 꼭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었거든.”
“그렇군요.”
“처음 알았어…… 다들 멀리 가는구나.”
김채아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채아가 아쉬워하자 형들이 그래도 가끔은 볼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 줬다.
김채아가 굳게 결심한 듯 말했다.
“나도 열심히 할게.”
김채아의 말에 김지혁은 피식 웃고 말했다.
“그래서 원래는 2학기 때 야구부 활동을 조금 등한시하더라도 전국대회든 지역대회든 억지로라도 나가볼 생각이었어. 나는 진작 고등학교도 결정됐고. 뭐, 분위기 때문에 빼기 쉽진 않지만…….”
김지혁은 송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송현준 덕분이었다.
자기가 전부 출전하지 못하는데도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이유였다. 갑자기 나타났지만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예의도 바르고. 김채아랑 이상한 분위기 풍길 때는 조금 걸릴 때도 있었지만, 저 녀석 정도면 괜찮지 않냐는 생각도 하는 김지혁이었다.
송현준이 입을 열었다.
“정말…… 진짜 중요한 이유가 있었네요. 저도 최선을 다해볼게요.”
송현준이 이어서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평일에도 모여서 연습하는 건 어떨까요?”
김지혁과 김채아, 그리고 이승진, 배호영, 유호성은 모두 찬성했다.
* * *
어제 풋살 친선경기를 뛰어서 꽤 힘들긴 했지만, 오늘도 일과를 마쳤다.
저녁 훈련이 끝났다.
“으~아. 죽겠다.”
로베르토가 구수하게 탄식하며 대자로 누웠다.
“그렇게 막 누우면 쓰쓰가무시 걸려요.”
“넌 왜 이렇게 쌩쌩하냐.”
로베르토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기 할 말만 했다.
“젊으니까요.”
“나도 젊거든.”
“십 대와 이십 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죠.”
“……십 대라서 좋겠다. 이 자식아.”
로베르토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볼을 잡고 쭉 늘렸다.
“아파요.”
“십 대니까 금방 회복할 거 아니냐.”
“와, 이십 대라 그런지 속도 좁네요.”
“이 자식 봐라.”
로베르토는 나를 쥐어박는 척만 하고, 멈춘 후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유럽이 유교 문화권이 아니라지만 나이나 경험이라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베르토는 그러지 않았다.
로베르토는 상대가 아무리 어려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는 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언제나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꼭 좋은 인생을 살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에서 챙겨온 보리차를 마시고 있는데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열심히 하는구만.”
훈련복을 입었는데도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흰 봉투를 든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사장님.”
로베르토가 그렇게 말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르드의 사장, 신정우는 손을 저었다.
“그대로 앉아 있어. 나도 앉을 거야.”
신정우가 철문을 열고 잔디 운동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운동장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시원하게 앉았다.
그러고 보면 신정우를 만나고 잔디관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준 지 이 주가량이 흘렀다. 생각보다 늦어졌지만 때가 됐다는 걸 알았다.
“마셔, 마셔.”
신정우가 내민 하얀 봉투 안에는 스포츠음료가 세 병이나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마시던 물을 얌전히 내려놓고 바로 스포츠음료를 까서 로베르토에게 넘겨줬다. 신정우의 등장에 머뭇거리던 로베르토는 음료수를 받아 얌전하게 마셨다.
나는 다른 음료를 열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우리의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신정우가 천천히 얘기했다.
“네가 말한 아이디어가 말이야, 아주 괜찮더라고.”
로베르토는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대화를 따라갈 수 있었다. 너무나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잔디 얘기다.
“정말요?”
“그래. 다른 운동장에서 실험해 봤는데 아주 괜찮아. 1~2년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상태로 자리 잡았어.”
실험도 해보느라고 늦은 거구나. 아이디어만 가지고 좋다고 말했던 평소와는 달랐다. 우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전개가 일어나는 경우도 꽤 있었기에 크게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그제야 로베르토는 우리가 잔디 얘기를 했던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로베르토는 아직도 누운 곳이 있는 이곳의 잔디를 보며 우리의 대화에 집중했다.
나는 신정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소원 들어준다고 하셨죠?”
“하하, 기억력이 좋네. 당연히 약속은 지켜야지.”
신정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보라는 듯 내 눈을 마주 바라봤다.
“그러면 말이죠. 저는 개인 스폰서 계약을 맺고 싶어요. 사장님이 계신 아르드 코리아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