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47화
“김채아!”
내 외침에 김채아는 한 줌의 의심도 없이 보지도 않고 바로 패스했다.
수비수의 시선은 뛰어나가는 김채아에게 쏠렸다.
나는 발 옆 날로 단숨에 김채아가 아닌 김지혁에게 패스했다.
김지혁은 매크로를 돌린 것처럼 아까와 똑같이 발바닥으로 공을 굴려놓고 바로 감아 찼다.
같은 패스, 같은 슈팅을 반복한 이유는 단순했다. 나에게서 김지혁으로 이어지는 패스는 우리 팀의 가장 위협적인 공격 패턴 중 하나였다.
“현준아! 나이스다!”
이번에는 슈팅이 더 잘 맞아서 골이 됐다.
김지혁은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면서 내게 엄지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김채아! 수비랑 시야 다 좋았어!”
“응!”
나는 김채아 칭찬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수비를 준비하려고 뒤로 물러나는데.
“여기까지 하자~ 우리 가봐야 해서.”
상대 팀 선수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들에게 김지혁은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소리쳤다.
“선배님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오늘 친선경기를 위해 초청한 상대 팀은 김지혁의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 선배들이었다.
이들은 피라미드에서 살아남은 근처 고등학교의 1학년 축구부원들이다. 김지혁은 축구부에서 나온 후에도 이들과 꾸준하게 친하게 지낸 덕에 친선경기를 부탁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른 선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도 한 수 배웠다.”
그 선배는 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들 정말 잘하는데…… 쟤는 특히 진짜…… 고등학교 축구부에 갖다 놔도 에이스 하겠는데. 프로급 아니냐.”
“송현준이 이상하긴 합니다. 축구부에 당장 들어가야 할 놈인데 우리 도와준다고 풋살하고 있습니다.”
김지혁이 그렇게 말하고 날 바라봤다.
나는 적당히 겸양을 떨었다.
“아닙니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냐. 여유 있어 보이던데.”
선배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게서 김지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혁이 너도 잘하더라. 계속 축구부 해도 괜찮았겠는데?”
“에이, 저 선배님들이랑 하면 주전자 됩니다. 제가 축구를 좋아하긴 하는데 야구 쪽이 적성에 더 맞습니다.”
김지혁과 김지혁의 선배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그냥 옆에 서 있었다.
선배들까지 데려온 거 보면 김지혁도 이 대회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민우를 데려온 그 날 이후로 친선경기를 내가 주도해서 잡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대회가 일주일 정도 남은 이 시점까지, 김지혁과 형들이 주변 고등학교 형들부터 잘한다는 중학생 팀, 심지어는 성인팀까지 불러와서 친선경기를 자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지혁과 형들이 이 대회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데려오냐고 물으니 사정을 설명하면 어지간하면 들어줬다고 했다. 친구들과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싶다. 도와달라. 꽤나 감성적인 말이니 마음이 혹할 만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도 나름대로 할 건 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에게 풋살대회에 나가는 데 도와달라고 했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축구를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과 축구 하는 걸 좋아했다.
풋살이라는 조금 다른 규칙이었지만, 다들 즐겁게 몇 번이나 도와줬다. 이민우와 친선경기를 치렀던 날을 제외하면 일요일 오전은 언제나 조기축구회에서 진행했다.
몇몇 형들은 대회가 끝난 후에도 조기축구회에 가끔 참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무튼, 수고해라.”
생각을 길게 하고 있으니 김지혁과 선배들의 대화가 끝났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나중에 꼭 보자.”
“너 이놈 지금 사인받아 놔야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우리보다 잘하잖아.”
“에이, 아닙니다~.”
장난기 많은 선배의 농담에 나도 적당히 손을 내저으며 받았다.
아쉽게도 저들 중에 프로 1부 리거로 남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날 도와준 사람들이니까 잘 됐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할 거다.
“지혁이랑 송현준이가 같이 뛰면 어지간하면 질 팀은 없어 보이는데?”
“그렇슴다. 근데, 다음 주 일정 나온 거 보니까 저는 일요일에 못 나갑니다.”
“어어? 그러면 어떡해.”
“현준이랑 애들이 잘할 거라고 믿고, 지금부터 또 연습할 겁니다.”
“연습?”
한 선배의 물음에 김지혁은 자신과 날 가리켰다.
“네, 현준이 팀이랑 제 팀으로 나눠서 공격 수비 바꿔가면서 선수 바꿔가면서 연습할 겁니다. 현준이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어서 여러 방식으로 해보고 있습니다. 쟤 골키퍼도 잘해요.”
“글쿠만. 좀 쉬다가 해라. 아무튼 우리는 간다~.”
선배들은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모처럼 훈련을 쉬는 날에 우릴 도와주러 온 거다. 모두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10분만 쉬자!”
“네.”
그리고 김지혁의 말대로 10분 쉬기로 했다.
나는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땀을 손으로 훑으며 수돗가로 향했다. 김지혁도 내 옆을 나란히 걸었다.
김지혁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휴, 덥네요.”
“진짜 개덥다.”
지금은 6월 말, 여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돗가에서 물을 틀고 머리를 감았다. 시원했다.
똑같이 머리를 물에 식히던 김지혁에 갑자기 말을 걸었다.
“야, 근데 요즘 채아한테 무슨 일 있지.”
“예? 잘 모르겠는데요.”
김지혁이 수도꼭지를 껐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새벽부터 밤까지 같이 있으면서. 요즘은 네가 더 가족 같거든.”
나도 수도꼭지를 껐다. 김지혁과는 그동안 꽤 친해져서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
“어어…… 무슨 일 있는지는 진짜 모르겠는데요. 요새 좀 초조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거 말이야. 그거.”
“아하.”
“아하? 아하?”
“물어볼까요?”
내 훈련을 따라오기로 결심한 김채아는 정말 열심이었다.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다만 요즘은 좀 초조해 보일 때가 있었다.
나도 알고 있긴 했지만, 대회가 다가오고 있기도 했고 체력적으로도 힘들 것 같아서 그러려니 했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말리기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탈진하지 않도록 관리해 주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다.
근데 피가 이어진 가족인 김지혁이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조금 걱정이 든다.
김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내가 물어보면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라면서 짜증 내는데 말을 못 걸겠다니까.”
“헐…… 알겠습니다.”
김지혁이 날 빤히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여동생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니까.”
* * *
김지혁과 형들과 함께했던 낮 훈련을 잘 마무리 짓고, 각자 저녁을 먹은 후 다시 잔디 운동장에서 김채아를 만났다.
오늘은 로베르토가 없어서 둘이 훈련하기로 했다.
“…….”
“…….”
요즘 우리는 사춘기의 남녀라기보단 훈련 파트너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관계로 지내고 있었다.
나는 김채아를 4강에 못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하고 있었고, 김채아는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건지 프로팀에서 뛸 때의 얼굴이 간혹 보일 정도로 열심히 했다.
훈련에 집중하다 보면 서로 필요한 말 말고는 잘 하지 않게 된다. 더럽게 힘들기도 했고.
다만, 김지혁과의 대화 이후부터 김채아를 더 자세히 관찰했다. 다양한 패스를 주고받으며 오늘의 마지막 훈련을 시작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김지혁의 말대로였다.
김채아의 얼굴에는 수시로 짜증이 올라왔다.
나는 김채아의 증세를 금방 알아봤다.
김채아는 패스의 힘 조절이나 방향 조절을 잘못할 때, 표정이 나빠졌다. 저건 스스로 답답할 때 부리는 짜증이었다.
조금만 관찰해도 알 수 있는 걸 왜 모르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김채아가 패스를 제대로 실수했다.
“아 씨…….”
이번 생의 김채아가 육성으로 짜증을 내는 건 처음이었다.
김채아도 자기 입을 막더니 내 눈치를 봤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피로가 너무 쌓이면 짜증 나는 것도 당연하잖아.”
“어음…… 민망하네.”
“뭘. 요새 좀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일주일 남았으니까 컨디션 관리도 해야 하기도 하니까…… 지금은 좀 쉬는 게 어때?”
나는 고집 센 김채아가 거절할 것까지 생각해서 대화를 이어 나갈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채아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그러지 뭐.”
그렇게 말한 김채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잠시 놀라다가, 김채아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훈련광이 웬일이래.”
“훈련광이라니. 누가 누구보고.”
나는 피식 웃으면서 김채아를 봤다. 김채아가 투덜거리는 걸 듣고, 웃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김채아의 얼굴을 정말 오랜만에 자세히 뜯어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채아의 입가가 경직돼 있었다. 초조해 보인다고 생각할 만한 얼굴이었다.
내 입가에서도 웃음기가 지워졌다.
“아하하…… 진짜 힘들어 죽겠어.”
김채아가 말했다.
“있지, 너한테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그런데, 푸념 좀 해도 될까?”
“얼마든지.”
나는 짧게 대답하고, 편하게 앉았다. 길게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김채아는 양 무릎을 팔로 끌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뭘.”
잠깐의 침묵 후에 김채아가 입을 열었다.
“나 있지. 네가 엄청 부러웠어.”
“부럽다고?”
“응. 처음 만났을 땐 그냥 실력이 대단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왜 그렇게 잘하는 건지 알겠더라고.”
나는 김채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채아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훈련하고 공부하고 노력해 왔던 거지?”
나는 순간 깜짝 놀라서 소리를 낼 뻔했다.
순간 회귀한 걸 들켰나 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이번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 버릴까 봐.
다행히도 아니었다.
내 움직임이 컸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채아가 날 보기 위해서 고개를 움직였다. 나는 동체 신경을 이용해서 얼굴을 돌렸다.
지금 김채아의 눈을 마주치면 감정이 흔들릴 것 같았다.
김채아는 다시 고개를 숙여 꼼지락거리기 시작한 자기의 손가락들을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랑 비슷하게 생활하니까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더라고.”
“대단하긴, 뭘.”
“대단한 거 맞지 뭐.”
김채아는 나랑 비슷하게 얘기하며 웃었다. 이번에는 좀 더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나는 정말 궁금했어. 너만큼 열심히 한 가지에 몰두해 보면, 무슨 기분일까? 체육대회나 풋살 경기할 때 너는 되게 즐거워 보였거든. 나도 너처럼 진심으로 웃어보고 싶었어.”
“…….”
“그래서 너한테 같이 훈련하자고 떼를 쓴 건데…… 요새 좀 벅찬 것 같아.”
“뭐가? 체력이?”
김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몸은 힘들어도 견딜 만했어. 오히려 컨디션도 좋아지고 실력도 좋아지는 게 느껴져.”
“그럼 뭐가 문제야?”
“무서워.”
나는 김채아를 기다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