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48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한다는 기분이 드는데,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대회에서…… 음…… 어떻게 될지 무서워. 요즘 걱정돼서 잠도 잘 안 와.”
노력한 만큼 결과에 대한 부담이 커진다.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겪기 힘든 일이었다.
그만큼 몰두할 수 있는 흥미 있는 일을 찾는 것도 어렵고, 몰두할 수 있는 재능이 있기도 어렵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너는 이런 훈련을 매일같이 하면서도 대결도 하고 체육대회도 나가고 이번에 풋살대회도 나가려고 하고…… 그렇게 축구를 계속해 나가는 게,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열심히 해온 건지 상상이 잘 안 가더라고.”
아까부터 가슴이 간질거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많은 전생을 살며 열심히 한다는 얘기는 수백 수천 번 들었지만, 전생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 같은 말은 난생처음 들었다.
“뭐…… 열심히 하긴 했지.”
“축구부나 팀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니 혼자 했을 거 아니야? 너 정말 대단한 거 같아.”
그녀의 상상과는 꽤 다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무수한 전생에서 수많은 경기를 앞두고 느꼈던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할 수 있는 한계까지 최선을 다했을 때만 두려운 감정이 따라온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래서, 김채아가 지금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무섭지…….”
김채아가 내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은 뗐지만 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서 김채아를 보고 있는데, 문득 열 번째 전생의 김채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 그런 표정 하면 섭섭하거든.
열 번째 전생의 김채아와 나는 그냥 친구였다. 두 번째 전생과 비슷하게 소개팅으로 만났지만, 그 이상 발전하지 않고 친구로 남는 길을 택했다.
-무슨 표정?
-네 특유의 지루해 보이는 무표정 있어. 넌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얼굴을 하냐?
-……에이, 지루하긴 무슨. 내가 무표정으로 있으면 유난히 무뚝뚝해 보여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미안! 한 잔 마실게!
어떤 술자리에서 열 번째 전생의 김채아는 내 심리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웃기게도 나는 여러 인생을 거치면서 김채아에 대한 감정이 점점 옅어졌다.
두 번째 전생의 김채아를 만났을 때의 행복을 되찾고 싶어서 세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친구가 되든 연인이 되든 했지만 언제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경험이 쌓이면서 김채아의 행동이 예상 가능해져서 감정이 점점 무뎌진 것이다.
행복했었던 두 번째 김채아와의 추억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 속의 명장면처럼, 자주 읽으면 지루하고 가끔 읽으면 그때보다는 옅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정도로 희석됐다.
나는 턱을 괴고 눈앞의 김채아를 바라보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전생을 칭찬해 준 김채아.
소심했지만, 전생처럼 감정에 솔직해지고 있는 김채아다.
눈앞의 김채아를 볼 때마다 복잡했다.
김채아가 전생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내심 변하지 않길 바랐다.
체육대회 때 생동감이 넘쳤던 김현호처럼 김채아에게서도 새로운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나 행동으로 두 번째 김채아처럼 당당해지길 유도했다.
참 웃기는 일이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김채아의 말에 나는 풋 하고 웃었다.
막상 김채아가 당당하게 변하니 생동감이 아예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좋은 사람 중에서도 유난히도 깊은 관계였던 그녀가 게임 속 NPC처럼 보일까 무서웠다.
동시에, 내가 아는 김채아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지금이 마지막 인생일 테니까.
아직도 겁이 난다.
하지만 무서워도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거야.”
“당연한 거라고?”
“네가 보고 감탄했다는 박종혁과의 승부나, 체육대회 결승전이나, 이민우와 대결할 때도 난 늘 열심히 준비했고, 너랑 똑같이 무서웠었어. 그것 말고도 무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거짓말. 나 위로해 주려고 그러는 거지?”
김채아의 기어들어 가는 물음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에 심통 난 얼굴을 한 김채아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체육대회 때는 잔뜩 긴장하고 들어간 건데, 운 좋게 처음 플레이가 잘 돼서 쭉 흐름을 탈 수 있었던 거고, 박종혁 때는 중간에 너무 긴장해서 슈팅이 아예 날아갔잖아. 그걸 네가 주워다 준 거고.”
“으음…….”
김채아는 내 공을 주워다 준 장본인이었다. 그때가 떠오르는 건지 김채아는 내 말을 반박 못 했다.
그때도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다. 김채아가 공을 주워다 줬는데도 못 알아보다니. 나도 참 많이 망가졌다.
“네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나도 똑같이 무섭다는 얘기야. 우리는 사람이잖아? 그럴 수밖에 없어. 국가대표 선수들도 또라이 같은 사람들 몇몇 빼면 똑같을걸? 장담할 수 있어.”
“……그럼 어떡해?”
“음…… 먼저 이것부터 생각해 볼래?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는데, 실패하게 된다면 그 뒤에는 뭐가 남을까?”
지금의 김채아는 모든 걸 바쳐서 노력했을 것이다.
내가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바라건 익숙해져서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든 말든 김채아는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었다.
-아마…… 다음 생, 그다음 생에도 똑같이 살지 않을까요?
술에 취해 꼬부라진 스페인어가 귓가에 들려왔다.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내려는 사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빛난다.
그리고 전생들을 살며 그런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 더 존중해 주자고 다짐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김채아는 내 의도에 유도당할지언정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전력을 다해서 살려고 하고 있었고, 이른 나이부터 그 방법을 깨닫고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존중해 주자. 믿어주자.
“……아무것도 안 남지 않을까?”
김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근데 생각하기 나름이야. 주변 환경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뭐가 나름인데? 뭐가 다른데?”
김채아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런 모습에 웃고, 가볍게 답했다.
“네가 열심히 하는 모습은 내가 전부 지켜봤으니까, 적어도 난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걸 기억하면 돼.”
“……그게 뭐야.”
잔뜩 기대했던 김채아가 김빠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하며 날 째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 무서워지는 방법은 나도 몰라. 경기든 승부든 그걸 위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그날 연습한 대로 잘할 수 있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밖에 모르거든. 세상은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꼼수가 통하지 않더라고.”
“…….”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 좀 낫더라고. 모순적이긴 한데, 그 사람들이 날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더 열심히 하게 돼서 좋은 성과가 나올 때도 많고.”
“…… 뭔가 경험이 엄청 많은 사람처럼 말하네. 같은 중학생이면서.”
“그런가.”
속이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앞의 김채아는 전생의 김채아가 아닌 그냥 김채아다.
“뭐, 아무튼 내가 본 너는 열심히 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니까, 마지막까지 열심히 해 봐. 결과는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까.”
“……그게 뭐야.”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평소보다 별이 안 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몇 개 안 되는 별이 더 눈에 띄었다.
“너는 이번 풋살대회 목표가 있어?”
“응, 4강.”
김채아의 대답에는 가볍게 대답해 줬다.
“알겠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볼게.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뭘.”
* * *
일요일 아침, 조기축구회에서 다시 만난 김채아의 표정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김지혁은 날 따로 불러서 적당히 접근하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
어느 정도 친근한 장난이 섞여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장난으로 ‘네 형님.’이라고 말했다가 김지혁의 정색하는 얼굴을 마주했다.
“형, 좋은 아침이에요.”
“이번 주가 마지막이라니 아쉽네.”
“그래도 형들 가끔 나오고 싶대요.”
“좋지. 총무 형님한테만 연락하고 나오면 돼~.”
나는 로베르토와 대화를 나누고 이어서 이사장에게 가려다가, 김채아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 즉시 방향을 바꿨다.
“아이구, 채아야. 우리 현준이가 신세 많이 지고 있지?”
“안녕하세요! 아니에요. 제가 더…….”
아버지는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잡았다.
“아빠?”
“현준아 언제 여기까지 왔니.”
“애 훈련하는 데 방해하지 마시고요.”
“나에게도 자유가 있어.”
“안 돼요.”
아버지는 매번 김채아에게 말을 걸려다가 나에게 제지당했다. 그리고 집에 가면서 자신에게도 말을 걸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묵살했다.
아버지는 가끔 푼수 같을 때가 있다. 김채아를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채아가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이사장이 다가왔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영대 형님.”
나, 김채아, 아버지가 차례로 인사했다. 이사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나와 김채아를 번갈아 봤다.
참고로 3주 전에 처음으로 조기축구회에 왔을 때 이사장은 김채아에게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진작 여자 축구부를 만들어볼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우리나라는 여자 축구 인프라가 부족했기에 당장 실행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고 지난주에 그랬다. 실제로 알아보기도 한 모양이었다.
이사장이 김채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다음 주라고 했지?”
“네.”
“재미있게 하고 와. 현준이도.”
“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 오겠습니다.”
“뭐? 하하. 그러지 말고 편하게 하고 오라니까.”
적당히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아저씨들과 함께 진지하게 공을 찼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비록 체력이 부족하거나 관절이 약하신 분들이 있었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이나 경험이 상당하신 분들이 많았기에 도움이 됐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현준이 넌 오늘 하루 종일 한다고 했지?”
“네, 저녁 먹을 때 집에 간다고 엄마한테 말해뒀어요.”
“열심히 해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당연하죠~.”
나는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운동장에 남았다.
“슬슬 하죠.”
나는 각자 친해진 아저씨들과 작별 인사를 마친 형들과 김채아에게 말했다. 이들은 내 근처로 모였다.
“뭐 할 거냐?”
로베르토는 조기축구가 끝난 후 시간이 남는다고 도움을 주겠다고 했고, 정말 고마웠다. 나중에 꼭 보답할 생각이었다.
“일단 론도부터 하죠.”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