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50화
나는 묵직한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목을 어른처럼 낮고 굵게 변조한다고 고생시켰다.
“콜록콜록, 켁켁.”
목이 걸걸해서 일부러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작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바뀐 건 없었다.
김채아의 인생을 바꿔줄 사람인 하나 여중의 배구부 감독도 이번 주 일요일에 풋살 경기장에 나타날 것이라는 걸 확인했다.
하나 여중의 배구부 감독은 김채아의 지인이었기 때문에 전생에서 몇 번 만난 적도 있었다.
감독은 풋살대회를 주최하는 쿠거 코리아의 사장과 친분이 있어서 늘 4강부터 구경하러 온다.
하나 여중의 감독이 특별하게 풋살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감독은 다른 종목 대회나 아마추어 대회에서 배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휴가를 내거나 팀의 일정에 여유가 생겼을 때 여러 종목을 구경하러 다닌다고 했다.
이번에는 온다고 하지만, 혹여나 감독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온다고 해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전생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쿠거 코리아의 사장이 감독에게 전해줘서 결국 김채아와 접촉했다.
그래서 4강에 가야 한다. 4강에 가면 경험상 김채아에게 선택의 기회가 생긴다.
더불어 나도 경기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을 테고. 이민우와의 대결이나 강원도 팀과의 대결도 기대된다. 상금도 달콤할 것이다.
아무튼 배구부 감독을 만난 김채아는 배구를 시작하는 게 늦긴 했지만, 오히려 어릴 때 다양한 운동을 경험해 본 덕인지 처음 일 년 정도만 고생하다가 금세 다른 선수들을 따라잡는다. 그리고 국내에서 손꼽는 선수가 된다.
이후에는 국가대표까지 거머쥐고 국내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이 길을 택하면 전학을 가게 된다. 그렇다고 얼굴을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니 좀 쓸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송현준! 뭐 해! 한참 찾았잖아!”
김채아가 높은 텐션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내 쪽으로 뛰어왔다.
나는 공중전화기 문을 열고 나왔다.
“아, 미안. 전화가 길어져서.”
“전화? 누구랑?”
“그…….”
김채아는 내 말을 기다리다가 못 참겠는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됐어! 오늘 점심 우리 아빠가 용돈 줘서 그걸로 오빠가 점심 산다고 했으니까 빨리 가야 해.”
왜 그렇게 급해 보이면서 기분도 좋아 보이나 했더니 먹을 것 때문이었나보다.
“교문에서 기다리기로 해놓고.”
“미안해. 일찍 끝난 김에 전화 좀 한 건데, 통화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네.”
“괜찮아! 근데 너 시험 잘 봤어?”
지금은 점심시간이었는데도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다 같이 하교하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기말고사 첫날이었다.
“가채점 해봤는데 평균 90은 넘을 거 같아.”
“……진짜 너무해.”
“뭐가 너무해?”
나는 김채아에게 장난을 치면서 함께 교문 앞을 지나 가자 중학교 방향으로 출발했다.
“아니, 축구도 잘하고 시험도 잘 보면 내가 뭐가 돼. 다른 애들은 또 뭐가 되고.”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지 뭐.”
“그건 그렇네…….”
“그럼 형들이랑은 식당에서 만나는 거야?”
“…….”
화제를 돌려보려고 했지만 김채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멋대로 다음 답을 내렸다.
“그만큼 열심히 했겠지.”
꽤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이어서 김채아가 말했다.
“응, 오빠들이랑 중국집에서 보기로 했어. 우리 올 시간에 맞춰서 시켜놓는다고 했으니까, 빨리 가야 해. 불면 어떡해.”
“뭐 그렇게 급하시대.”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
김채아의 말에 나는 수긍했다. 이번 주 토요일이 풋살대회였다.
가자 중학교도 시험 기간이라서 오늘부터 매일같이 낮에도 훈련하기로 했다.
문득 물어보지 않은 게 떠올랐다.
“근데 너는 시험 잘 봤어?”
“……가자! 오늘은 오빠가 아빠한테 용돈 받아서 저녁 사준다고 했어!”
김채아가 어색하게 웃더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아까도 들은 말인데?”
“시간이 없어!”
김채아의 재촉에 나는 어이없어서 웃으며 김채아의 뒤를 따랐다.
* * *
“얘들아!”
정미영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교실 문을 열었다.
쉬는 시간, 갑작스러운 등장이었기에 반 친구들은 잠시 모두 굳었다. 이어서 반 친구들의 시선이 선생님의 손으로 향했다.
선생님의 손에는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성적표 나왔어!”
선생님은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싱글싱글하면서 교실 게시판에 성적표를 붙이고 있으니, 반 친구들이 선생님에게로 몰려들었다.
“우리 반 이번에 꼴찌 아니야! 3등이라고!”
그렇게도 좋으실까. 기뻐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혼자 작게 웃었다.
개인정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대, 안 그래도 어제부터 과목별로 성적표가 붙곤 했었다.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종합 성적이 적힌 성적표를 들고 오셨다.
선생님은 나를 보며 활짝 웃고, 뭔가 말씀하려고 하시다가 은근슬쩍 성적표를 훔쳐보던 엄태영을 발견하고 칭찬했다.
“태영아아! 이번에 왜 이렇게 잘했어?”
“정말요……?”
엄태영은 무섭다고 가채점도 안 했었다. 먼저 공개된 몇 개 과목의 성적이 준수했기에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태영이 노력했구나!”
“와…….”
그제야 성적을 확인한 엄태영은 입을 헤 하고 벌렸다. 반 친구들에게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평균 80점 정도는 될 거다.
내 비법 노트를 보기도 했고, 엄태영은 귀찮아해서 그렇지 머리가 좋았으니까.
“현준이가 잘 알려준 덕이에요…….”
“역시!”
그리고 선생님은 또 날 보려다가 이번에는 엄태영 옆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박종혁을 발견했다.
“종혁아?”
“선생님 죄송해요!”
“응? 왜?”
“그…….”
아까까진 표정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곤란해하고 있다. 전생에서 몇 번 봤는데 같은 축구부인 엄태영이 시험을 너무 잘 봐서 상대적으로 민망해져서 그랬다고 했다.
“왜 눈치를 봐? 종혁아. 난 이 정도도 아주 좋아. 이번에는 안 찍었잖아?”
“크흑…… 선생님! 감동이에요!”
“그래그래. 곧 전국대회라고 했지? 축구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어…… 하하.”
선생님의 덕담에 박종혁은 어색한 웃음소리만 냈다.
그리고 이제야 선생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이번에는 전교 몇 등일까. 가채점해 보니까 생각보다 찍은 게 많이 맞았던데.
“그리고 현준아! 축하해!”
“네?”
“전교 5등이야! 열심히 하더니!”
“헐…….”
여태까지 중 가장 좋은 성적이라서 정말로 좀 놀랐다. 나는 막 기뻐하지는 않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이에요.”
“아니야, 아무튼 기분이 너무 좋다. 다음 주 내 수업 시간에 햄버거 쏠게! 얘들아!”
“오오!”
반 친구들의 함성이 가득 찼다. 나도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선생님은 다음 수업 때문에 아쉬워하며 교실을 나가셨다.
잠시 후 박종혁이 내 옆에, 엄태영이 그 옆자리에 앉았다.
박종혁이 투덜댔다.
“전교 5등이 뭐냐. 너 송현준 맞냐.”
“맞는데.”
“괴물 놈.”
“현준아 고마워…….”
“뭘.”
박종혁의 말은 무시하고 엄태영의 말에는 대답해 줬다.
“그건 그렇고 축구부는 어때? 다음 주에 전국대회 지역 예선하잖아.”
“아…….”
“엄…….”
박종혁과 엄태영의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짠 것처럼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어.”
“진짜로…….”
알고 있기도 했고, 짐작하기도 했던 내용이었지만 확실하게 들어야 했다. 나비효과라는 어디서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내 중학교 전국대회 데뷔가…… 전국은커녕 지역에서 망할 거 같아.”
“그 정도라고?”
“응. 태상 선배가 아무리 태상 선배라도 구멍만 네 명이 넘어.”
그렇게 말한 박종혁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나와 엄태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른 축구부원들 구멍이라고 했다고 소문내지 마라…….”
“그러겠냐.”
“당연히 안 그러지…….”
나와 엄태영이 차례로 말했다. 그제야 박종혁은 안도한 듯했다.
“진짜 짜증 나. 중간에 들어온 부원들은 축구 자체를 제대로 할 줄 모른다니까. 빠따도 급하다고 운동 좀 한다는 애들 데려와봤자…… 너도 알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축구 했는지. 태상이 형 같은 천재 아니면 금방 적응 못 하는 거 알잖아.”
“그치.”
엄태영도 말은 없었지만 박종혁의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나는 축구부 상태가 어떤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다행히 축구부의 큰 흐름은 내가 아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둘이 고생할 걸 알면서도 방치했다는 미안함이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전국대회는 꼭 같이 잘 준비해 보자.”
나는 내년 2월에는 반드시 이들에게 4강 이상의 성적을 안겨서 좋은 고등학교에 보내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축구부의 구멍을 메꿀 자신도 있었고, 축구부원들의 퀄리티를 끌어올려 줄 자신도 있었다.
박종혁과 엄태영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날 보고 오올…… 소리를 냈다.
박종혁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 내일 풋살대회 나간다며.”
“응.”
“그것도 빡센 거 아니냐?”
박종혁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려다가 갸웃했다.
“솔직히 전체적으로 보면 참가팀 수도 적고 이틀 만에 다 하니까 대단하지는 않은데…… 두 팀이 마음에 걸리긴 해. 그래도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내가 진지하게 얘기하자 박종혁과 엄태영도 진지하게 들어줬다.
“서로 힘내보자고.”
“응.”
* * *
“아, 맞다.”
내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각자 멈추고 날 바라봤다.
딸각딸각, 여동생은 내가 말하든 말든 밥을 냠냠 먹고 있었다.
“성적 나왔는데요.”
“그러니?”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숟가락을 다시 움직였고, 아버지도 고개를 주억이며 젓가락으로 시금치를 집었다.
그동안 부모님은 내 성적에 큰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운동부에 있다 보니까 학교 성적보다는 대회 성적이 중요했었고, 축구부에서 나온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을 때까지 알아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부모님은 날 걱정했다고 했다.
혹여나 잘못된 길로 빠질까 봐.
전생의 부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회귀자라는 게 참 좋았다.
부모님의 걱정을 한결 덜어드리고,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으니까. 두 분은 일부러 신경을 안 쓰시려고 노력할 뿐이지 당연히 내 성적에 관심이 있으시다.
“저 전교 5등했어요.”
“그래?”
“그렇구나.”
부모님은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시금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두 분은 곧 행동을 멈췄다.
“뭐라고?”
어머니가 먼저 물으셨다.
“55등?”
이어서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정확하게 말했다.
“아뇨, 5등이요. 반 5등이 아니라 전교 5등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