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마인드 축구천재-52화 (48/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52화

첫 경기가 끝나고 나는 관객석으로 향했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학생, 저는 선생님이 아닌데요.”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팬더 닮으신 게 우리 담임선생님 같은데…….”

“야! 현준아! 헉…….”

관중 사이에 있었던 정미영 선생님이었다. 약속대로 몰래 지켜보러 오셨다가 내게 들킨 것이다.

정미영 선생님은 마스크를 벗고,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면서 뚱한 눈으로 날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들켜 버렸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정체를 숨기는 걸 포기했는지 내 어깨를 토닥여줬다.

“현준이 잘하던데? 패스가 끝내주더라.”

“감사합니다. 혼자 오신 거예요?”

“응, 남자친구가 없어서 서럽네.”

“갑자기요? 그러면 이따가 저희랑 같이…….”

“아, 그럴 필요는 없어. 대학교 친구도 만날 겸 해서 온 거거든.”

거짓말은 아니라는 걸 안다. 선생님은 인서울 대학교 출신이라 서울에 친구가 많았다.

“저 뛰는 거 어땠어요?”

“패스가 끝내주던데? 여기서는 수비수를 하는 거니?”

“네, 지혁이 형이 잘해주거든요.”

웃으면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갑자기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녀 같은 목소리를 냈다.

“어머.”

뒤를 돌아봤다.

김채아가 뚱한 얼굴로 나와 선생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송현준, 뭐하냐.”

“응? 얘기하고 있었지.”

“……누군데.”

김채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져 있었다. 왜 저러나 잠시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질투하는구나.

나는 어이없어서 웃고, 선생님을 봤다. 선생님은 진작 눈치채셨는지 히죽거리고 있었다.

“정.미.영. 선생님…….”

“아, 현준아. 그러면 재미없잖아.”

“선생님?”

선생님은 선글라스를 완전히 벗고, 김채아에게 인사했다.

“안녕. 채아야.”

“헉, 영어 쌤!”

김채아는 언제 시무룩해졌냐는 듯 깜짝 놀라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서울에 사는 친구랑 저녁에 약속 잡았는데, 현준이랑 네가 대회 나간다는 게 생각나서 잠깐 들렀어.”

선생님은 여기 온 게 우연이라는 듯 길게 설명했다. 그리고 나와 김채아를 번갈아 보더니 또 한 번 히죽 웃으셨다.

“청춘이라…… 귀여운데 부럽다…….”

우리 둘의 관계가 재미있으신 모양이었다. 선생님도 충분히 청춘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었다.

“이따가도 구경할 테니까 열심히 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채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으시며 말했다.

“무엇보다 다치지 말고.”

“걱정 마세요. 천천히 경기할 거예요.”

나는 선생님을 안심시켜줬다.

* * *

정미영 선생님의 응원 덕분일까.

우리는 파죽지세로 4연승을 달리고 8강 진출권을 따냈다.

“아이고, 선생님. 같이 드시죠.”

“아니에요! 정말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 뵐게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의 부모님들과 함께 응원하고, 점심도 함께 드신 선생님은 그런 말을 남기시고 떠났다.

“현준아, 채아야. 오늘 최고였어!”

겸사겸사 우리 칭찬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아들딸 너무 잘했다~ 너희들도 최고였고.”

김채아의 어머니가 김지혁과 김채아의 양 팔짱을 낀 채로 말하셨다. 귀여우신 분이다.

“나도 팔짱 끼워줄까?”

“됐어요. 아빠.”

옆에 서 있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한 나는 이승진 아버지의 안내에 따라서 고깃집으로 향했다.

“얘들아! 오늘 수고 많았다. 빨리 고깃집 가자.”

“예이!”

* * *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고 볶음밥을 먹을 때가 되자 김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준아. 잘 부탁한다.”

“저만 믿으세요.”

“짜식, 그래.”

“현준이 우리 채아 잘 부탁한다.”

“네?”

이어지는 김채아의 어머니의 말에 난 당황했고, 아버지들은 뭐가 재밌는지 껄껄 웃었다.

김채아의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게 웃고 있는 김채아의 아버지에게 한마디 했다.

“술 좀 적당히 마시고요.”

“아하하, 형수님. 괜찮습니다. 저는 술 안 마시거든요.”

이승진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까 들으니 술을 끊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술 취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걸 보면 사교성 좋은 사람 같았다.

김지혁과 김지혁의 어머니가 그렇게 떠났다.

김지혁의 아버지가 자유라고 외쳤지만 못 본 체했다. 우리는 볶음밥이 탄내를 조금 내면서 익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들의 다 됐다는 말에 볶음밥을 긁어먹기 시작했다.

오늘의 전승이 좋은지 내 아버지와 김채아의 아버지는 술에 적당히 취한 채로 오늘 경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승진의 아버지는 그걸 잘 받아주고 있었다.

형들은 술 달라고 했다가 혼나서 사이다랑 콜라만 홀짝이는 중이었다.

김채아는 솥에 있는 볶음밥을 정성스럽게 긁어내고 있었다.

지금은 7월이었지만, 저녁이기도 했고 열대야가 심한 날이 아니었기에 선풍기 바람만으로 충분히 시원했다.

고깃집에 오기 전에 숙소에 들러 샤워도 해서 피부가 뽀송뽀송했고, 배는 든든했다.

기름진 고기와 볶음밥은 훌륭한 에너지원이 되었을 것이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들 예선전 4승 한 얘기를 즐겁게 나누고 있었다.

8강에서 끝나더라도 모두에게 좋은 추억이 됐을 것이다.

볼에 햄스터처럼 밥을 꽉 채운 김채아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웃었고, 김채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꼭꼭 씹어 먹었다.

하지만 나는 4강까지 김채아를 올려놔야 했다.

“형들, 몸 상태 어때요? 어디 아픈 데 없어요?”

“엉.”

“말짱한데.”

“에이, 그만 좀 해라. 아까 너 따라서 스트레칭도 다 하고 샤워도 찬물로 했는데.”

형들이 질색했고, 나는 능글맞게 웃어줬다.

“너는 어때?”

“나는 괜찮아.”

김채아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안색도 좋아 보였다. 다들 상태가 좋은 것 같아 안심이었다.

대회 전까지 철저하게 관리했고, 미미한 부상은 직접 조치해 줬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김지혁에게 부탁해서 후보선수를 구해놔 달라고 했는데 후보선수까지 필요하진 않아 보였다. 체육대회처럼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진짜 송현준 무슨 엄마 같다니까.”

“나이도 가장 어린 게.”

“그래도 저 녀석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슬프다…….”

“저 자식 축구 너무 잘해.”

형들이 그런 얘기를 했고 아버지가 조용히 들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도 네 덕이다.”

“뭐가요?”

이승진의 말에 되물었다.

“네가 온 덕에 대회 참가도 할 수 있었고, 친선경기도 대단한 팀이랑 붙어볼 수 있었고…… 걔네 팀 아까 하는 거 보니까 살벌하드라…….”

“맞아.”

이민우의 팀을 말하는 거였다.

나는 공감했다. 오민규를 비롯한 이민우의 팀은 실전에 들어오니 더 잘했다. 아무래도 경험이 있다 보니 무대 적응이 빨랐다.

“뭐, 그래도 이제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 현준이가 알려준 훈련들도 효과적이었고.”

다른 형의 말에 김채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 많이 컸네. 형들이 이렇게 칭찬하고.”

아버지가 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김채아의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현준이 정도면 우리 채아를 맡겨도 괜찮을지도…….”

“예?”

“아빠!”

벌게진 얼굴로 헛소리를 하셨다.

김채아가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김채아의 아버지는 히죽 웃으셨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아, 이분들 계속 들이켜다 보니 취하셨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내 앞에서 똑같이 고개를 젓고 있는 김채아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고, 한숨을 내쉬고, 다시 웃었다.

* * *

“코오오, 크어어어.”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코 고는 소리가 좀 크긴 했지만, 지금 잠을 못 자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8강에서 이민우 팀이나 강원도 팀을 만나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 때문이었다.

“읏차.”

어차피 잠이 안 오니까 일어나자.

잠을 자야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숙소 공용 휴게실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이라도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나와서 복도를 걸었다.

끼이익.

그 와중에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려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앞방 문이 열려 있었고 김채아가 내 쪽을 빼꼼 보고 있었다.

날 발견하더니 해맑게 웃더니 문에서 나와 내게 다가왔다.

“나도 잠이 안 와서.”

“그러면 같이 스트레칭이나 할래?”

자연스럽게 말하고 같이 이동했다.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편한 옷차림으로 스트레칭을 시작하면서 잡담을 나눴다.

“어때? 오늘 좀 시시했지.”

“아니야.”

김채아는 고개를 저었다.

“보람 있었어.”

“오올.”

“네 덕분에 이렇게 열심히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

부끄러운 말이어서 시선을 피했다. 김채아는 내 그런 모습에 피식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몰입해서 열심히 하면 같은 성과를 내도 더 기쁜 걸 알게 된 것 같아.”

“그래?”

과정도 중요하다는 걸 아는 좋은 깨달음이었다.

“내일도 열심히 할 거야.”

“그래.”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4강에 들면…….”

“들면?”

“비밀이야.”

“뭐야.”

“비밀은 비밀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김채아는 말을 돌렸다.

“아아, 오민규한테 복수하고 싶다.”

오민규는 이민우의 팀원이었다.

“기왕이면 4강에서 만나면 좋겠네.”

“너 은근히 소심하다니까.”

“신중하고 현실적이라고 해줄래?”

발끈한 나를 보며 김채아는 까르르 웃었다.

* * *

풋살대회 2일 차이자 8강, 준결승, 결승전이 열리는 오늘, 대회장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선생님이 아닌 또 다른 지인이었다.

어제 대회에 집중한다고 잠깐 잊고 있었던 남자, 아르드 코리아의 사장 신정우였다.

“어제 왜 안 오셨어요?”

내 물음에 신정우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네가 네 말을 지키려면 8강은 기본으로 올라와야지.”

“맞는 말이네요. 오늘도 기대하세요.”

솔직히 꽤 떨렸지만, 나는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신정우는 날 빤히 보다가 소리 내서 웃었다.

“아하핫, 너는 참 볼수록 재미있다니까.”

“저는 지금 재미없어요. 잘못하면 4강에도 못 가고 떨어지게 생겼어요.”

“자신만만한 애가 갑자기 왜 그러냐.”

“풋살이나 축구에 인생 바친 애들이랑 그동안 취미에 가까웠던 우리 팀과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묘하게 현실적이네. 그럼 우리 내기는 어쩌려고 하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더라도 8강 활약만 보시면 충분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사장님 안목이 약간 아쉬운 거죠. 뭐.”

신정우는 또 크게 웃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날 기다리고 있는 우리 팀원들과 아버지, 김채아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제 실력과 재능이요.”

“와우.”

“그리고 축구에 쏟은 제 시간이요.”

첫 대답은 가볍게 했지만, 두 번째 대답만큼은 진지했다. 신정우는 눈을 반짝였다.

“마지막 말은 좀 멋있는데? 나중에 광고 카피로 써도 될까?”

“절 모델로 쓴다면요.”

신정우는 또 재미있어했다.

그때였다.

“여어, 신 사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