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54화
“얘들아! 힘내라!”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이승진의 아버지가 외쳤다. 아버지의 응원에도 이승진은 쳐다보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반증이었다.
시작부터 골을 먹어서 그런가 팀원들의 기세가 많이 꺾인 것 같았다.
우리는 평소보다 기량이 덜 나오고 있었고, 기세를 탄 이민우와 이민우의 팀원들은 더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슬라이딩 태클, 드리블 유도, 슈팅각도 차단 등을 통해서 우리 팀의 뒷문을 걸어 잠갔고, 꽤 괜찮은 패스를 몇 번 쐈지만 득점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두 박자씩 우리 팀이 느렸다.
중간에 작전 타임을 이용해서 상대 팀의 흐름을 한 번 끊었는데도 이 정도였다.
그래도 한 골 차이면 하프 타임 때 잘 다스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전반전이 1분 남아 있었다.
측면에서 공을 몰던 오민규가 이민우에게 패스했다. 중앙에서 공을 잡은 공격수 이민우는 상대 팀의 수비수에게 공을 패스했고, 수비수는 공을 몰고 측면으로 움직였다. 유호성은 그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동시에 상대 팀의 양 윙이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오며 순간적으로 공격수가 두 명이 되었고, 우리 팀의 양 윙인 배호영과 김채아가 그들을 막기 위해 다급하게 쫓아왔다.
그때, 수비수가 중앙의 이민우에게 패스하니 이민우에게는 마크가 없어졌다.
“몸으로 막아!”
소리를 지르며 나는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오는 중인 오민규에게 다급하게 붙었다.
하지만 이민우는 씩 웃는 것과 동시에 내가 마크하고 있지 않은, 미처 우리 팀이 마크하지 못한 나머지 한 선수에게 패스했다.
그리고 그 선수는 공을 발바닥으로 멈춰두고, 바로 슈팅을 때렸다.
이승진이 손도 못 뻗어보고 골을 먹혔다.
“나이사!”
“이거지!”
완벽하게 연습 된 움직임이었다. 우리 팀의 기세를 꺾기에는 완벽한, 팀플레이로 만들어진 골이었다.
시작하자마자 먹히고, 한 골 차니까 후반전에 잘해보자고 하면서 기세를 올려보려고 했는데 끝나기 직전에 이런 골을 먹어버린 거다.
나는 골이 아파 오는 걸 느꼈다.
* * *
하프타임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쉬는 시간이었고, 전술을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다들 아무 말도 안 하고 몸도 풀지 않았다.
김지혁이 없을 때는 실질적인 주장 역할을 맡았던 이승진도 막막한지 말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소통 단절.
지고 있는 상황에서 흔히 나오는 반응 중 하나였다.
나는 김채아의 우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채아는 열심히 했고, 오민규를 상대로 몇 번 뚫리긴 했지만, 결정적인 찬스까지는 주지 않았다. 자기가 몇 번 뚫어내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짧게 회상했다.
김채아와 형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은 상당히 즐거웠다. 전생에서도 진작 이렇게 해볼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기회는 없다.
마지막이다.
그러니까 헛되이 날릴 수 없었고 나는 지금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형들, 김채아. 저 없어도 공격할 수 있죠?”
“그게 무슨 소리야?”
김채아가 물었다. 형들은 내게 시선만 보냈다.
나는 평소보다 씩씩하게 말했다.
“이래서는 지혁이 형한테 면목이 안 서니까요. 전술을 바꿔야겠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 입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해달라는 사람들처럼.
“내가 골키퍼를 설게요.”
공격이 원활해지지 않더라도 내가 모든 골을 다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승진의 경험으로는 이민우 팀의 수많은 경험으로 닦인 개성 넘치는 플레이와 이민우의 개인 기량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연습은 해봤잖아요?”
나는 여러 포지션으로 연습을 했었고, 골키퍼 역할로도 연습해 본 적도 있었다.
“그래도 갑자기…….”
“우리끼리…….”
나는 팀원들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승진도 필드 플레이어로 충분히 뛸 수 있었다. 함께 여러 번 연습해서 안다. 배호영이나 유호성 같은 다른 필드 플레이어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냥 골키퍼를 선호해서 골키퍼를 한 거였다.
“그리고 우리 잊어버린 거 같은데. 몸싸움을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쟤네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공이 돼야 해요. 우리 방식대로 축구 하게 만들어야죠.”
“아…… 그렇지.”
“근데 괜찮을까?”
여전히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일단 지금은 확신 어린 말을 하고,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게 나았다.
“할 수 있어요. 제가 골키퍼라고 패스를 안 할 것도 아니고. 뭣보다 골키퍼가 되면 손을 쓸 수 있거든요. 제가 골키퍼를 하면 최후방 미드필더가 하나 더 생기는 거나 다름없어요. 절 믿어봐요.”
“네 실력은 의심 안 하지. 미안하다. 내가 부족해서…….”
입을 다물고 있던 이승진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대단한 거예요.”
“건방지긴.”
이승진은 기분 풀린 척을 했다. 역시 가장 형다운 형이다.
“고풋살 팀 여러분. 준비하세요.”
“벌써?”
안내요원의 말에 김채아가 깜짝 놀랐다.
나도 놀랐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2분밖에 남지 않았다.
“어떡해 우리 전술도 못 짰는데.”
“연습하던 대로 하자. 깜짝 전술이 있으면 내가 말해줄게. 김채아. 일단 이리 와볼래?”
“응.”
“좀만 더 가까이.”
이민우 팀이 가까이 왔기에 김채아의 귀에 대고 전술 지시를 해야 했다.
김채아와 나는 좀 쑥스러웠지만, 둘 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 * *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날아온 슈팅 세례를 나는 전부 막아냈다.
슈팅 세 번.
전부 다 골대 구석을 노리는 날카로운 슈팅들이었다.
“와씨, 너 골키핑도 수준급인데? 진짜 미친놈 아니야?”
“누가 누굴 보고.”
이민우가 낄낄 웃었다. 그리고 내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하는 팀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열 개가 날아와도 다 막을 수 있으니까 기회 하나만 살려보자고요.”
축구를 포함한 팀 스포츠는 일종의 흐름이 있다.
아무리 강한 팀일지라도 일방적인 공격에는 한계가 있다. 어느 순간 상대 팀이 공격 기회를 반드시 잡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골을 계속 넣지 못하면 기세가 이어지지 못하고, 그 상황을 개인 기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포지션은 골키퍼뿐이었다.
좋은 골키퍼를 가진 팀은 경기력에서 밀릴지언정 우승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골키퍼 자리에 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선방 두 번을 하자 찾아왔다.
“와, 진짜 농담이 아니라 너 골키퍼도 이 대회에서 최고 아니냐?”
이민우의 태연하게 말을 걸어도 내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는 김채아가 보였다. 김채아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골 클리어런스 상황에서 눈이 마주치면 바로 패스할 테니까 뛸 준비 해.
아까 김채아와 나눴던 대화였다.
나는 공을 적당한 힘으로 제대로 잡고, 팔을 쭉 뻗은 후 디딤발을 내디뎠다.
-자, 공을 이렇게 잡고…… 이렇게 던지는 거야! 쉽지?
-……아니, 설명을 좀 제대로 해달라니까요.
나는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골키퍼 줄리우 세자르에게 골키퍼의 모든 것을 배웠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롱 스로인을 해냈다.
내 손을 떠난 공은 웬만한 패스만큼이나 빠르게 일직선으로 날아가 적 수비진과 우리 팀 선수들을 가로질렀다.
“오오오!”
“와아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우리 팀의 반격에 관중이 환호했다. 특히 아버지와 선생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공은 정확히 김채아의 인사이드에 떨어졌다.
저 녀석들의 첫 골처럼 풋살에서만 할 수 있는 허를 찌른 완벽한 패스였다.
나중에는 규칙으로 이런 롱 스로인을 막아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대회에서 그런 규칙은 없었다. 애초에 나처럼 발로 하는 패스 이상으로 공을 던질 수 있는 녀석은 없었을 테니까.
김채아는 깔끔한 트래핑으로 공을 잡아두고, 공을 차는 듯하다가 한 번 접었다. 상대 팀 골키퍼가 속았다. 김채아는 땅볼로 가볍게 골대 구석을 노렸다.
“나이스!”
“좋았어!”
김채아는 환하게 웃으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형들의 박수와 어깨 두드림을 받으며 나는 김채아와 하이파이브했다.
역전의 기미를 잡았을 때 일부러 더 오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들은 잘 지키고 있었다.
뭐, 그걸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기쁘기도 할 거다.
2:1
실마리가 보였다.
앞으로 모든 슈팅을 막고, 내가 빌드업을 주도하고, 팀원을 믿는다.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 * *
송현준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잘하는데도 팀원들이 부족한데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찾으려고 생각했고, 그걸 찾아냈기에 팀 분위기는 완벽하게 반전되었다.
‘나도 뭔가…….’
김채아는 그 모습이 멋지면서도 부러웠다.
김채아는 공을 잡고 있었다. 앞에는 오민규가 있었다. 송현준 앞에서 굴욕을 줬던 그 녀석이다.
무리해서 돌파를 해볼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하려고 했지만, 김채아는 쫓아냈다.
‘목적은 4강이야. 게임에서 이기는 거야.’
오민규를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렇기에 김채아는 중앙으로 패스했다. 한데 오민규는 이런 플레이도 예상한 건지 중앙에서 어중간하게 공을 받으려는 이승진을 쫓았다.
“승진 오빠”
“어, 어어!”
이승진이 공을 빼앗겼다. 김채아는 왠지 그럴 것 같았기에 다급하게 쫓아서 오민규의 앞을 막아설 수 있었다.
오민규가 김채아를 앞에 두고 오른발로 공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김채아는 데자뷔를 느꼈다.
그때의 굴욕적인 드리블이 온다.
오민규는 처음과 같은 방식으로 김채아를 제치려고 했다.
더 날이 선 것 같은 플립플랩은 실전에서도 똑같이 빛났다.
오민규의 발 등에 얹어진 공이 두 번 방향을 바꿨다. 그래도 이번은 저번처럼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었다.
하지만 김채아는 그동안 놀고 있지 않았다.
그때처럼 훈련했더라면 못 막았겠지만, 김채아는 송현준에게 부탁해서 더 대단한 플립플랩을 상대해 보고, 수비해 본 적이 있었다.
“어?”
오민규가 외마디를 내뱉었다. 김채아는 깔끔하게 공을 빼앗아냈다. 오민규가 다급하게 김채아에게 태클을 걸려 했다.
‘개인기 하기 가장 좋을 때는 상대가 조급해졌을 때야. 뛰어난 드리블러들은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 줄 알아.’
김채아에게 그 정도 능력은 없었지만, 지금이 개인기를 펼치기 가장 좋을 때라는 건 알았다.
김채아는 긴 다리를 활용해 공 위에서 오른발을 휘저으며 헛다리를 한 번 하고 왼발로 왼쪽 방향으로 치고 나갔다.
오민규가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잃었다.
해냈다는 생각보다는 다음에 뭘 할지 생각을, 아니,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오민규가 뚫릴 줄은 몰랐는지 이민우의 팀의 수비라인은 허술했다.
김채아는 그대로 공을 몰고 왼쪽에서 중앙으로 침투했다. 상대 수비수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김채아는 패스하는 척하면서 한 번 접었다.
역시 송현준의 말대로다.
상대 팀 선수는 네 명이고 그중 두 명을 제쳤다.
당연히 나온 일대일 찬스이고 한 번 접은 덕에 주발인 왼발로 찰 기회가 왔다.
차 놓은 걸 떠먹기만 하면 되는 이 상황에 김채아는 망설임 없이 발을 휘둘렀다.
“김채아아아!”
“채아 대박이야!”
“미쳤나 미쳤어!”
골망이 출렁였고, 오빠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아야 흐어어엉…….”
김채아의 아버지는 감동해서 울먹이고 있었다. 방금의 멋진 장면은 캠코더에 담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채아의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캠코더를 손에 들고 있었다.
김채아는 한 달 넘는 준비가 이 짧은 순간을 위한 거였구나, 그리고 이 순간은 상상 이상으로 기쁘구나.
스포츠에 진심이 되면 정말로 즐거운 순간이 있구나.
“정말 잘했어. 이제는 나한테 맡겨.”
기쁨을 만끽하던 김채아의 옆에 언제 왔는지 송현준이 서 있었다.
김채아는 ‘이제는’이라는 말에 문득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점수판 쪽을 바라보았다. 점수판 바로 옆에는 시계도 있었다.
시계가 막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후반전이 끝난 것이다.
하지만 스코어는 2-2 동점.
그러니까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