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55화
김채아는 송현준의 손에 끼워진 골키퍼 장갑을 바라보았다. 송현준은 주먹을 꾹 쥐어 보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김채아는 송현준이 믿음직스러웠다.
골 세레머니가 끝나자마자 심판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고 양 팀을 불렀다.
“선수분들. 규정집은 읽어보셨죠? 연장전은 없고 바로 승부차기로 들어갑니다. 진행에 차질이 없게 지금 키커 순서 정하세요.”
* * *
이민우는 자기가 왜 이렇게 들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 진짜 말도 안 된다!”
“뭐가.”
골키퍼 장갑을 확인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짙은 눈썹의 친구, 송현준을 보며 이민우는 생글거렸다.
“골키퍼까지 잘하는 건 반칙 아니야?”
“아까부터 몇 번을 말하냐.”
“신기하잖아~.”
“네네~ 잡담은 이따가 하자고. 빨리 키커 자리로 가. 내가 네 슛 완벽하게 막아줄 테니까.”
“안 가도 돼.”
송현준이 갸웃하는 동안 이민우 팀에서 골키퍼를 맡고 있던 친구가 자기 가방에서 이민우의 장갑을 꺼내 왔다.
“민우야. 부탁해.”
“응.”
이민우에게 골키퍼 장갑은 낯설지 않았다. 송현준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물었다.
“야, 골키퍼 하던 애가 하는 게 낫지 않냐? 나 따라 하는 거야?”
“따라 하긴, 웃기시네. 쟤 골키퍼 하는 법을 내가 알려줬거든. 우리끼리 풋살할 때 골키퍼 자주 보기도 하고.”
순간 송현준의 눈이 번득였다. 이민우는 그 표정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자기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비슷한 게 불현듯 느껴졌으니까.
송현준이 중얼거렸다.
“그것참…… 재미있겠네…….”
“응, 재미있지?”
재미라, 지금 자신의 기분이 그렇게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일까? 이민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적당히 얘기했다.
송현준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차분한 모습에 이민우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민우는 애써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한마디 더 했다.
“근데 이겨야 더 재미있는 거잖아. 둘 다 잘해 보자구~.”
“오케.”
이민우는 승부차기 순서를 정하자마자 골대 앞에 섰다.
이민우의 앞에는 골키퍼 장갑을 낀 채로 공을 자기 앞에 놓고 있는 송현준이 보인다.
저쪽 팀의 첫 키커는 송현준이라고 했다.
이민우는 자기 팀의 마지막 키커로 나갈 예정이었다.
이민우가 기세 좋게 말했다.
“자, 덤벼.”
“엉.”
대충인 대답에 웃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브라질의 골목 축구에서도, 프로 유소년 팀에서도, 한국에 와서도, 풋살대회를 제패하는 동안도 이민우에게 있어 자기보다 잘하는 또래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몇 명 있었지만 전부 며칠 만에 넘어섰다. 조금만 관찰하고 연구하면 쉬웠다.
하지만 송현준은 달랐다.
처음 만난 날, 친선경기,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만났음에도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삐익!
페널티킥을 차라는 휘슬 소리가 들렸다. 이민우는 도움닫기를 위해 뒤로 물러나는 송현준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송현준이 크게 보였다.
이민우는 자신의 다리에 무언가 부딪치는 걸 느끼고 잠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민우는 자기가 느끼는 가장 큰 미지의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두려움이었다.
무표정한 송현준의 얼굴을 보니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우는 입을 꽉 다문 채로 송현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디디는 동시에 킥.
자신의 오른쪽으로 차는 슛 폼이라고 판단해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던 이민우는 송현준의 발등이 공을 때리는 순간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익!”
이민우는 왼쪽으로 황급히 팔을 뻗었다. 슈팅은 왼쪽 상단으로 날아왔다.
“와아아아아!”
“봤어?”
“뭐 저렇게 빨라!?”
하지만 풋살의 승부차기 거리는 골대가 작은 만큼 불과 6m밖에 되지 않았고, 평범한 키의 이민우는 찰나의 판단 실수로 패배하고 말았다.
“방금 뭐야? 오른쪽으로 차는 줄 알았는데.”
“페널티킥 심리전이지.”
송현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자신의 팀원들에게 가서 팀원들을 독려했다. 그 내용은 이민우에게 도발이기도 했다.
“이제 한 골도 못 넣어도 돼요. 제가 다 막을 거니까요.”
이민우는 태어나서 처음 느낀 패배감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근처에 다가온 친구들을 향해 웃어줬다.
“걱정하지 마. 나도 쟤처럼 다 막아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쟤처럼 골 넣어서 최소 동점으로 만들 거야. 편하게 해. 편하게.”
이민우의 친구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이 본 이민우의 얼굴은 웃는 게 아니라 화난 것 같았다. 처음 본 표정이었다.
* * *
“…….”
“……저게 말이 돼?”
“쟤 뭐야? 전반전에는 필드 플레이어 아니었어?”
“자세가 프로 수준 골키퍼랑 다를 게 없는데? 키가 작아서 그렇지.”
“송현준이면 2년 전에 전국대회 MVP 먹은 애 아니야?”
“맞네! 그때 얼굴이 있네.”
처음에는 환호성, 두 번째에는 적당한 환호성에 관계자들의 눈동자가 진지해졌고, 네 번째 선방을 해낸 지금은 다들 술렁거리기만 했다.
이런 분위기는 익숙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잡고 있던 공을 다섯 번째 키커인 김채아에게 차주며 격려했다.
“편하게 차. 못 넣어도 돼.”
“아니야, 넣을게.”
김채아의 결의에 찬 표정에 고개를 적당히 끄덕여줬다.
이민우는 내 옆을 지나가서 골대 앞에 섰다. 처음에는 웃더니 점점 말이 없어지고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풋살로 세계 정상을 찍을 재능이다. 이민우의 속은 펄펄 끓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김채아가 심호흡을 하고, 다섯 번째로 공을 찼다.
그리고 이민우는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관중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쟤도 이상해.”
“축구는 잘하는 놈들이 잘한다더니.”
“이민우 저거 몇 년 전부터 웬만한 명문 축구부에서 다 찔러봤는데 죄다 거절했다며. 자긴 풋살이 좋다면서.”
“브라질 유소년팀에 있었다고 했나. 재능은 재능이네. 골키핑도 수준급이야.”
“아주 둘이서 다 하는구만.”
쑥덕이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골대로 향했다. 시무룩해진 김채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키커 자리로 향하고 있는 이민우만 보였다.
승부차기는 기세 싸움이다. 도발로 상대방의 감정을 흐트러뜨리면 이길 확률이 올라간다.
나는 이민우를 향해 웃었다.
“네가 마지막이네.”
“…….”
언제나 헤실거리는 이민우의 표정이 굳어져 있는 건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민우가 축구를 잘할 때는 해맑게 웃을 때다. 저런 표정의 이민우는 상대하기 쉽다.
이번 승부차기는 이민우 덕분에 긴장하지 않았다. 나처럼 멀티 포지션으로 골키퍼로 등장한 이민우라니.
아까 이민우에게 얘기했던 대로 신선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준 이민우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나는 전력으로 막아주기로 결심했다.
이민우가 진지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도움닫기를 하고, 공을 찼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뛰었다.
“우와아아아아!”
“현준아!!!”
이민우의 슈팅은 내 손에 막혀서 나뒹굴었고, 우리 팀원들이 환호하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누가 보면 월드컵이라도 우승한 줄 알겠다.
김채아가 뛰어와서 날 끌어안았다.
얼마나 기쁜 건지 감정표현이 너무 격하다.
“미친놈 아니냐!”
“페널티킥을 다 막아버리네!!!”
“내 아들 맞냐!!!”
우리 아버지의 헛소리는 제외하고, 나는 형들의 극찬을 들으며 웃었다.
그리고 김채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칭찬을 잊지 않았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네. 잘했어.”
“……고마워.”
김채아는 그제야 부끄러운지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오빠들의 놀림과 자기 아버지의 정색을 받았다.
그동안 난 애써 친구들에게 웃어 보이는 이민우를 바라보았다.
미안함이 컸다. 이민우의 친구들은 그냥 슈팅이 느려서 막은 거지만, 이민우만큼은 달랐다.
나는 이민우가 페널티킥을 어떻게 찰지 알고 있었다. 이민우는 처음에는 무조건 자기 기준으로 왼쪽으로 찬다.
너무 단순했기에 회귀하면서 희미해진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써먹을지 몰라서 적어뒀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이민우는 친구들과 함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민우는 내게 손을 턱하니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다음에는 안 진다?”
“응. 기회가 있으면 다시 붙어보자.”
“좋아!”
이민우는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눈이 촉촉해져 있었다. 분한 모양이었다.
미안함이 있긴 했지만 김채아가 이민우보다 소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전생들에서 이민우는 한 번 빼고 다 우승했다고 했다. 지더라도 강원도 팀에게나 한 번 졌다고 했지.
그래도 승부욕이 강한 녀석이니 이민우에게는 좋은 영향을 끼칠 거다. 더 훌륭한 풋살선수가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거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 * *
“도시락은 안 먹어?”
“결승전까지 한 시간 조금 더 남았는데 얹힐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세 번째 바나나를 까면서 대답했고, 신정우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미리 준비해 온 거고?”
“당연하죠.”
“역시, 넌 진짜 물건이구나.”
8강에서 이민우의 팀을 꺾은 우리는 4강을 쉽게 이기고, 결승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점심 식사는 주최사에서 도시락을 줬지만, 올라오기 전에 싸 온 바나나와 미숫가루 같은 소화가 쉬운 음식들을 취향껏 먹는 중이었다.
신정우의 말에 나는 자신감 있어 보이게 웃었다.
“8강에서는 중앙수비수…… 풋살에서는 다르게 부르나?”
“픽소라고 해요.”
“그렇구나. 설마 골키퍼도 다르게 부르니?”
“네. 골레이로라고 해요.”
“허, 진짜.”
신정우가 이어서 내 활약을 열거했다.
“8강에서는 픽소로 나섰다가 게임이 안 풀리니까 골레이로로 이동해서 대회 최강팀을 꺾어버리고, 4강에서는 다시 픽소 자리로 와서 중거리로만 4골이라니. 심지어 상대는 한 골도 못 넣게 만들다니. 프로선수가 아이들을 가지고 노는 줄 알았다.”
“하하, 과찬이에요.”
“적어도 내 앞에서 거짓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과찬이 아닌 건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관계자들 사이에서 네가 누구냐고, 네가 무슨 중학교에 다니느냐고 묻고 난리도 아니던데.”
나는 표정을 바꿨다. 그래도 건방져 보이지 않도록 얘기했다.
“뭐…… 그렇죠. 고맙게도 많은 분이 제안해 주시더라고요.”
안 그래도 8강이 끝난 후에 날 향한 관심이 쏟아졌고, 어른들은 4강이 끝난 후에 화장실에 들른 내게 몰려들었다.
-너 1학년이라면서! 우리 학교에 올 생각 있냐?
-송현준이라면 몇 년 전에 전국대회에서 MVP랑 득점왕 먹었었지? 요즘도 축구부 활동하니?
-축구부 소속이 아니라면서! 부모님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
각 중학교의 코치와 감독, 심지어는 프로팀의 코치에게서도 제안을 받았다.
나는 결승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그들을 일단 물리치려고 했다.
그래도 그들은 쉽게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아빠, 저한테 관심이 있으시다는데 대신 좀 얘기해 주시겠어요?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