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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59화 (55/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59화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사흘이 흘렀다.

방학에도 내 일과는 똑같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꽉 채운 훈련들, 오히려 수업을 들을 때보다 더 가혹하게 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방 한복판에 선 채로 벽에 가로로 그은 선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래 있는 선과 방금 그린 가장 높이 있는 선은 검지 한 마디 정도의 차이가 났다.

“……시작이네.”

얼마 전부터 몸의 균형이 안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나 키가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한 거였다.

이제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훈련해야 했다. 전생의 경험으로 성장기에 과한 운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겪어봤기에 괜찮다. 계획은 진작 다 마련해 뒀다.

그동안 가혹할 정도로 훈련했던 이유는 2년 동안 쉰 몸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풋살대회에 나간 덕분인지 계획한 것 이상으로 체력과 경기 감각을 많이 끌어올렸으니, 이제는 몸이 클 수 있도록 적당한 신체 운동을 하고, 기술과 세밀한 감각 위주의 훈련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달력을 봤다. 방학하고 나흘이나 지났는데 로베르토에게서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 계획을 위해서는 축구부에 들어가야 하는데…… 로베르토는 축구부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슬슬 불안해졌다.

보통은 방학 전에 로베르토가 먼저 축구부 얘길 꺼내고, 로베르토를 따라 자연스럽게 복귀하면 됐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도 몰랐다.

오늘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에 놓인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거울 오른쪽 위 구석에 붙어 있는 스티커사진을.

김채아와 내가 어색한 웃음과 브이 포즈를 하고 있다.

어제 찍은 사진이었다. 김채아는 새벽에 쭈뼛쭈뼛 나타났다.

-배, 배구부에 잘 적응하려면…… 체력을 끌어올려야 하니까…… 내일부터 전지훈련도 가고…….

말을 더듬거리는 걸 빤히 바라보다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한 대 맞았다.

아무튼 그래서 어제는 오전에 함께 훈련하고, 점심을 먹고, 김채아의 주장에 따라 스티커사진을 같이 찍었다.

순조롭다. 앞으로도 잘 풀리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현준아~ 로베 형 왔는데~.”

“네! 엄마! 지금 나갈게요!”

* * *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어휴…… 조금만 쉬자. 이러다 죽겠다. 뭐 이렇게 습하냐.”

그만큼 습하고 더워서 로베르토는 평소보다 일찍 주저앉았다. 로베르토의 옆에 털썩 앉으면서 맞장구쳤다.

“그쵸. 한국 날씨에 비하면 이탈리아가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요.”

숨을 고르던 로베르토가 날 보더니 갸웃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수업 때 들었어요. 지중해성 기후라고…….”

“학교에서 그런 것도 가르쳐?”

“네! 아, 점심이나 먹죠!”

말실수를 넘기려고 화제를 바꿨다. 로베르토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순순히 넘어왔다.

어머니가 챙겨준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통을 열었다.

“크으, 너희 어머니 매번 참 대단하시다.”

“그쵸?”

샌드위치에 양배추에 적당히 간이 된 돼지고기까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차다. 무엇보다 이런 식단을 매일 차려주신다. 알아서 챙겨 먹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주방이 분주하다는 핑계로 매번 날 쫓아내셨다.

“그래, 아들내미 때문에 고생이시네.”

“나중에 보답할 거예요.”

“효자 났네~ 먹자.”

평소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너 김채아인가 걔랑 어떻게 됐냐.”

“인생이란 어렵네요.”

“아니, 어떻게 됐냐니까.”

“몰라요.”

“망했구만? 괜찮아. 네가 축구 잘하면 여자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

로베르토 나름 위로해 주려는 것 같았다. 사실관계를 말하기 애매했기에 대답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더불어 축구부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그동안의 행적을 봤을 때 제안을 받은 건 틀림없으니까.

로베르토는 순식간에 샐러드까지 싹싹 다 긁어먹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키도 10㎝는 더 크다 보니 먹는 속도도 빨랐다.

막 샐러드를 씹으려고 하는데 로베르토가 운을 떼기 시작했다.

“으음…… 너한테 얘기해도 되나 싶은데.”

느낌이 왔다. 샐러드를 내려놓고 침착한 척했다.

“내가 여기에 이런 거 물어볼 사람이 없기도 하고…… 너는 그쪽에 친구도 있을 테니까…….”

“뭔데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몇 주 전에 너희 학교 축구부 감독 제안받았다. 영대 아저씨한테.”

“정말요?”

“응.”

“근데 뭘 물어봐요? 애들 어떠냐고요? 재능있는 애들 꽤 있어요.”

“정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한국 유소년 축구는 말로만 들어봤지 어떤지 몰라서…….”

“아, 그런 거였군요. 설명해 드릴까요?”

이어서 영업용 미소를 띠자 로베르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너 묘하게 어색하고 친절하다.”

“저는 원래 친절한데요?”

로베르토의 반응은 개의치 않고 싱글거렸다. 로베르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설명 좀 해줘 봐라.”

“뭘 알려드릴까요?”

“일단 무슨 대회를 치르냐? 찾아보긴 했는데 이것저것 많길래.”

“꽤 많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전국대회죠. 여기서 4강 이상에 들면 특별전형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어서 정말 중요해요. 목숨 걸고 할 정도예요.”

“……뭐라고? 스카우트나 테스트 봐서 가는 게 아니라?”

“당연히 스카우트나 테스트로도 가죠. 근데 축구부원들이 전부 재능있는 건 아니잖아요? 중학교 축구부보다 고등학교 축구부가 더 적기도 하고요.”

로베르토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구만. 상위권은 개인 실력 위주고, 중위권부터는 팀 대회 성적이 중요한 시스템이라는 거지?”

“맞아요. 그래서 상대 팀 에이스를 담그는 선수도 있을 정도예요.”

“담근다고?”

“퇴장당할 각오로 상대 팀 에이스의 다리를 부수는 거죠. 심지어 그걸 연습하기도 해요.”

로베르토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날 천천히 바라보았다.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그런 짓을 할 만큼 필사적인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에요. 우리나라 시스템상 축구부 생활을 하다가 탈락하면 다른 진로를 잡기가 어렵거든요.”

“가혹하구나.”

“그렇죠.”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한참 뒤에 로베르토가 입을 열었다.

“진짜 모르겠다. 사실 말이야.”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거든 왜냐면…….”

“네? 왜요?”

정말로 당황해서 말까지 끊었다.

로베르토는 별말 없이 내 질문에 답해줬다.

“네가 매일 치열하게 훈련하고 대회까지 준비해서 나가는 거 보니까…… 나보다 어린놈이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뭐, 그런 거지.”

풋살대회를 나간 나비효과인가. 머리가 어지러워지려고 한다.

“너는 가르칠 것도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나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하하. 뭣보다 그냥 뭐라도 빨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로베르토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유를 얘기해 줬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로베르토가 이 시기에 이탈리아로 바로 간 건 단 한 번뿐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이탈리아 팀에서 유소년 생활할 때다.

로베르토가 없으면 내가 떠난 뒤의 축구부도 문제고, 로베르토의 미래도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가급적 내가 아는 범위로 끌어들이고 싶다.

로베르토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할 말을 정리해서 입을 열었다.

“형. 이것도 기회 아닐까요? 영대 아저씨…… 이사장님이 일자리를 준다고 하잖아요. 이탈리아면 코치부터 시작하겠지만 여기서는 감독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건 그렇지. 근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하고, 솔직히 문화가 많이 다르잖아?”

아니, 잘할 수 있다고. 전국대회도 세 번이나 우승하고 여기 경력을 토대로 프로팀 코치도 쉽게 된다고.

그리고 한국말도 이렇게 잘하는 양반이.

“결국 축구를 잘할 수 있게 가르치는 일이에요. 이탈리아나 유럽에서만 코치할 거예요? 감독할 거예요? 유럽에 있더라도 아시아 유망주가 올 수도 있잖아요. 유럽은 비슷하다지만 다른 지역은 또 다른 문화가 있을 거예요. 여기서 경험하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주절주절 말하자 로베르토는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던졌다.

“너 되게 적극적이다.”

“……그게. 네.”

어물쩍 넘겨야 하나 생각하다가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로베르토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은 솔직할 때다.

“솔직히, 같이하고 싶어서요.”

“같이? 아, 그러고 보니 축구부에 돌아간댔지.”

로베르토의 표정이 변했다. 흥미롭다는 얼굴이다.

“내가 필요한 이유가 있냐?”

“웬만한 감독은 저를 감당 못 하고 방치하거나 절 찍어 누르려고 할 테니까요. 수준이 맞아야죠.”

“난 수준이 맞고?”

“충분하죠.”

로베르토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한참 웃던 로베르토가 웃음기가 다 지워지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러면 해볼까?”

“정말요?”

로베르토는 대답 없이 날 빤히 바라보더니,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네 반응이 웃겨서. 이렇게 간절한 건 처음 보네. ‘줭말요?’ 이럴 때 네 얼굴을 한 장 찍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야~.”

“…….”

“모처럼 애 같네. ‘줭말요?’.”

“그만하세요…… 그런 식으로 발음 안 했거든요.”

“아니, 했는데~.”

로베르토는 내가 한 말을 흉내 내면서 재미있어했다.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하는 거예요?”

로베르토의 고개가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렸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해보지 뭐. 네 말도 틀린 건 없고.”

긍정적인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서 중요한 얘길 꺼냈다. 스마트폰은 없고 핸드폰 보급률도 보통이던 시절, 할 수 있는 말은 빨리해 두는 게 좋다.

“그러면요. 축구부에 들어가게 된다면 부탁할 게 있는데요.”

“뭔데?”

“2차 성장이 시작됐어요.”

로베르토는 눈을 크게 뜨더니 내 말에 본격적으로 집중했다.

“……그래?”

“그래서 축구부에서는…….”

로베르토는 한참 이어진 내 얘길 진지하게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버지의 입으로 들어가려던 숟가락이 멈췄고, 어머니는 차분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게 정말이니? 축구부에 들어갈 거라고?”

어머니가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올라가고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네.”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말하자 아버지가 활짝 웃었다.

“드디어! 마침내!”

“당신, 먹고 말해요.”

“옙.”

아버지는 군말 없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씹지도 않고 음식을 삼킨 아버지는 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잘 됐다. 잘 됐어. 네가 어릴 때부터 축구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아버지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네 아버지 말이 맞아. 걱정이라니. 우리가 제대로 못 해준 게 미안하지…….”

“못 해준 거 없어요. 묵묵히 기다려주신 것만으로 충분해요.”

아버지와 똑같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생에서 몇 번을 반복한 대화였지만, 내 말에 담긴 진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이번은 마지막이었기에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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