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63화
특히 아까 탈락해서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던 박범철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재미있었다. 자기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걸 의식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삑!
또 뛰었다. 이제 남은 건 나, 엄태영, 윤태상뿐이다.
삑! 삑! 삑! 삑!
말없이 훈련이 계속됐고, 120회쯤에 윤태상이 마지막으로 떨어져 나가고 나만 남았다. 김진호는 당황한 얼굴로 휘슬을 열 번가량 더 불어서 딱 130회를 채웠다.
“그만!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스탠드 쪽을 봤다. 스탠드에서 이사장이 엄지를 치켜든 후 박수까지 쳐줬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99회에 탈락한 박종혁과 118회에 탈락한 엄태영에게 다가갔다.
“이 미친 괴물 새끼…….”
“너 굉장하다…….”
이들은 셔틀런을 꾸준히 해왔기에 내 체력에 더 크게 놀랐다. 다른 축구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대표 선수들도 130회 정도 한다고 알려져 있고 150회가 넘으면 세계 탑클래스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껌이라고 했잖아.”
일부러 작게 말했다. 다른 선배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었으니까.
“다음!”
“예!”
셔틀런을 하지 않은 절반의 축구부원들이 각자의 고깔들로 향해서 나란히 섰다. 그들은 자기 자리로 가면서 나를 한 번씩 흘깃 쳐다봤다.
삑!
“물 줄까?”
“땡큐.”
박종혁이 준 물을 입에 넣고 입안에서 헹군 후 바닥에 뱉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범철 선배한테 인사하러.”
“뭐?”
박종혁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박범철과 정두식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날 올려다보는 둘에게 바로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체육대회 때는 죄송했습니다.”
“어? 어어…….”
박범철이 당황해서 어버버했다. 정두식도 눈을 부라렸다.
“앞으로 잘 지내고 싶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여러 번의 전생을 살며 깨달은 인간관계가 꼬일 때의 가장 효율적인 대처법은 정면 돌파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누가 잘못했든 먼저 사과하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들어준다. 내가 박범철에게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는 아니니까 더더욱 먹힌다.
실제로 아까부터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무표정을 꾸미던 박범철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게 그 증거다.
“송현준이. 이렇게 얘기하는 건 좋은데, 그럼 진작 오지 그랬냐?”
옆에서 얘길 듣던 정두식이 뚱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박범철은 표정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제가 제 생각만 한다고 박범철 선배님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
“축구부에 돌아오게 되니까 생각이 난 거죠. 제가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런 겁니다. 죄송합니다.”
정두식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 같았다. 어느 인생에서나 그랬다. 정두식은 재능 있는 부원들에게 투정을 부린다.
“……참나.”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괜히 박종혁이 가장 잘 따르는 게 아니지. 나도 정두식을 좋아한다. 사람이 정이 많다.
한 번 더 허리를 숙였다.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두식도 수그러들었다.
“그려. 범철이 너도 괜찮냐?”
“응. 뭐.”
박범철이 날 보는 시선이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에 대한 불편한 기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 같았다. 다만 자존심이라는 것도 있으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녹아들 생각이다.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기도 하고, 지상철처럼 싫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박범철은 어딜 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으어어…….”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두 번째 셔틀런의 탈락자들이 하나하나 나오고 있었다. 아까부터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퍽 치는 박종혁과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야 이 자식아, 사과할 거면 미리 나한테 말을 해주든가.”
“내 일인데 뭐.”
“정 없는 놈.”
박종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학년들과 1학년 나머지 절반이 주축이 된 두 번째 셔틀런은 101회에서 끝났다.
1등이다. 시작은 나쁘지 않다.
로베르토와 몇 마디를 나눈 김진호가 외쳤다.
“스텝레더 깔아라!”
“네! 현준아 넌 나 도와줘.”
“응.”
힘차게 대답한 박종혁과 함께 미리 창고에서 꺼내놓은 스텝레더를 운동장에 깔았다. 그동안 다른 1학년들은 고깔 절반을 치우고 나머지 고깔은 사람 하나 들어갈 간격으로 일렬로 배치했다.
김진호가 다가왔다.
“설명 필요하냐?”
“아뇨.”
“편하네.”
김진호는 솔직한 심정을 내비치고 코디네이션 훈련을 시작했다. 셔틀런부터 지금의 훈련까지 새벽에 항상 더 고강도로 해와서 이번에도 무리 없이 적응했다.
단 한 번의 스텝도 꼬이지 않았기에 누구보다 빨리 코디네이션 훈련을 마친 나는 로베르토를 살펴볼 여유가 있었다.
로베르토는 들고 있는 파일철과 훈련하는 우리를 번갈아 보면서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저 파일철은 선수단 명단이고, 선수들의 특징을 직접 보고 기록하는 거였다.
-선수 파악이 가장 먼저야.
전생의 로베르토가 했던 말이었고, 공감하는 바였다. 선수 파악보다 자기 철학을 앞세우는 감독은 개인적으로 싫다. 몇 명의 천재들 수준이 아니면 아집밖에 되지 않으니까.
김진호는 계속 훈련을 진행하며 로베르토의 물음에 답했고, 코디네이션 훈련 뒤에는 전술 훈련을 지시하고, 마지막으로는 30분 단판으로 연습경기를 치르겠다고 말했다.
“현준이 너는 어디 설래?”
임시로 짜인 팀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다.
“수비형 미드필더 뛰겠습니다.”
“그래? 너 초등학교 때 공격수 아니었어?”
“팀에 맞춰서 어디든 뛸 수 있습니다.”
김진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자신감은 좋지만, 축구부원들에게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좋지 않다.
김진호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첫날이니까 맘대로 해 봐.”
* * *
최전방 공격수 뒤에서 뛰는 선수를 일반적으로 처진 공격수라고 부른다.
또는, 섀도우 스트라이커라고도 하고 플레이메이커라고도 하고, 트레콰르티스타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으며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뛰는 위치는 비슷하지만 역할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이 위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팀의 에이스가 뛰는 자리라는 것.
2000년대 후반 윙포워드 선수들이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오르기 전까지는 수십 년간 그래왔다.
이 시절 축구부도 마찬가지였다.
상대 팀의 처진 공격수 자리에는 윤태상이 서 있었다. 미래에 국가대표 붙박이가 될 가능성을 가진 훌륭한 유망주, 우리 축구부의 차세대 에이스.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 윤태상을 막는 게 내 역할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연습경기인 건 중요하지 않다. 축구부로서의 첫 경기고, 상대는 이 축구부의 에이스다. 5대 5도 좋지만 역시 난 11대 11이 더 좋다.
“패스 주세요!”
“…….”
……다만 우리 팀이 나한테 패스를 안 준다.
약간 기운이 빠졌다.
우리 팀의 포지션은 3-5-2.
중앙 미드필더는 수비형인 나와 공수 양면을 오가는 홍준서와 이민재, 총 세 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둘 다 2학년이고, 이 축구부의 주축이면서, 박범철과 같은 무리였다.
박범철에게 방금 사과했지만, 당연하게도 앙금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 앙금으로 시작된 텃세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어느 팀을 들어가도 똑같아.
그렇게 불쾌한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 팀이 공격해 나가는 걸 적절한 위치에 서서 구경했다.
이민재가 왼쪽 윙백으로 뛰고 있는 엄태영에게 패스했다.
엄태영은 볼을 몰고 가다가,
“야! 패스해!”
홍준서의 강한 외침에 중앙으로 패스를 돌려줬다. 홍준서는 직접 볼을 몰고 중앙을 달리기 시작했다. 상대 팀 수비수와 미드필더는 우리 팀의 두 공격수가 돌진하면서 물러나느라 공간을 내줬다.
두 공격수는 상대 팀의 수비수들에게 완벽하게 막혀 있었다. 홍준서는 공격수에게 패스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앞을 보며 머뭇거리는 게 뒤에서도 느껴졌다.
“에라!”
홍준서는 공을 툭 차 놓고 대놓고 슈팅을 하려고 했다. 다만, 고민의 시간이 길었고, 슈팅 포즈도 길어서 틈이 생겼다.
상대 중앙수비수 박상호가 어느새 뛰쳐나와서 홍준서의 슈팅을 허벅지로 가로막고, 그대로 치고 나갔다.
“야!”
박상호도 이들과 같은 2학년이었다. 친구에게 뺏겨서 억울한지 홍준서가 악을 질렀다. 박상호는 그러건 말건 빠르게 오른쪽으로 공을 길게 찼다.
상대 팀의 우측 공격수인 박종혁에게 공이 날아갔다.
공이 향하는 방향을 본 후, 내가 마크해야 할 상대인 윤태상을 놓치지 않았다.
“원투!”
윤태상은 그렇게 외쳤고, 박종혁은 바로 패스했다. 윤태상은 원터치로 박종혁에게 패스를 돌려주고 자길 마크하는 나를 팔로 밀며 침투하려는 움직임 같았다. 좋은 생각이다.
“어라?”
윤태상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대놓고 말하는데 어떻게 예측 못 하나.
난 이미 박종혁이 패스할 경로로 움직여서 박종혁의 패스를 끊어냈다. 이어서 미리 봐 놓은 방향으로 길고 낮게 패스했다.
윤태상이 차세대 에이스라면, 이쪽 팀에는 진짜 에이스가 있었다.
바로 3학년이자 유소년 국가대표에도 몇 번 뽑힌 공격수 노태신이다. 당연하게도 노태신에게는 수비수가 잔뜩 붙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헐거운 다른 공격수인 3학년 김병훈에게 패스했다. 김병훈이 노태신에게 연결해 주길 바라면서.
“어어……?”
공은 김병훈의 발에 완벽하게 도착했다. 다만 김병훈은 내가 그렇게 좋은 패스를 보내줄 줄 몰랐던 모양이다.
김병훈은 어수룩하게 트래핑하고, 머뭇대다가 공을 빼앗겼다.
아쉬웠지만 시선을 돌렸다.
노태신이 날 흥미 가득한 눈으로 보는 게 보였다.
“역시 제법인데?”
뒤에서 윤태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으면서 대답해 줬다.
“역시 태상 선배랑 하는 건 재미있네요.”
“…….”
윤태상은 불편하게 웃었다. 그리고 윤태상은 새로운 패턴으로 덤볐다. 역시 재능이 있다.
윤태상은 자신이 직접 중앙으로 내려가서 롱패스를 뿌리려고 했다. 윤태상을 졸졸 쫓아간 나는 윤태상의 패스 경로를 막았다. 윤태상은 백패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어?! 빨리 차!”
윤태상의 외침이 무색하게 백패스를 받은 1학년 중앙수비수는 공을 빼앗겼다. 어디로 패스할지 고민하며 머뭇대자 노태신이 표범처럼 뒤에서 공을 낚아챈 것이다.
노태신은 기세를 그대로 살려 골키퍼의 키를 가볍게 넘겨 골을 넣었다.
“나이스!”
“역시 선배님!”
“오늘 태상이 아무것도 못 하네?”
골을 넣은 노태신은 세레머니를 하면서 윤태상에게 농담 투로 말했다.
윤태상은 웃었지만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윤태상이라는 필승경로가 막히자 상대 팀이 헤매는 게 보였고, 윤태상의 표정도 점차 초조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직접 돌파를 시도하다가 내게 공을 빼앗기고, 이어서 다급하게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삑! 삐빅!
“야! 태상아! 너무 거칠다! 친선경기야!”
“죄송합니다…….”
심판을 보던 김진호 코치가 외쳤다. 그러면서 이사장의 눈치를 본다. 이사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사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선배님, 괜찮아요.”
초조한 사람이 그런 태클을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태클이 날아올 때 발을 비틀어서 피했으니 괜찮다.
“아니야. 미안하다…….”
윤태상은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너무 신났나?
재미도 있었고 축구부원들에게 내 실력을 각인시켜야 했기에 힘을 좀 줬는데…… 윤태상이 충격을 많이 받은 거 같아 보인다.
윤태상에게서 몸을 돌렸다.
아니다. 너무한 게 아니다.
세계에서 먹히는 진짜배기 천재가 아닌 한 언젠가 겪을 상황이다. 자기가 에이스가 아닌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언젠가 올 일이다.
윤태상은 분명 재능있는 선배지만 세계급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될 거다. 전생들에서는 그랬다.
“태상아? 뭐 해?”
“……동점 골 넣자.”
“그래!”
윤태상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