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64화
그렇게 첫날 훈련이 끝났다.
“현준이 역시 잘하네. 앞으로 기대 많이 한다?”
“열심히 할게요.”
뒷정리하고 있을 때 이사장이 다가와서 칭찬해 줄 정도였다.
연습경기는 3-0으로 완벽하게 이겼다.
처음에 패스를 주지 않던 선배들도 다른 부원들의 시선에 못 이겨서 억지로 패스할 정도로 깔끔한 플레이를 했다.
박종혁과 엄태영을 제외한 선배, 동기들의 시선은 다양했다.
감탄하는 사람, 곱지 않게 보는 사람도 있었고, 별 관심 없는 부류들도 있었다. 오늘은 첫날일 뿐이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우리는 정리를 마치고 로베르토 앞에 모였다.
로베르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들 고생했다. 그리고 공식 훈련은 3시간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뜸을 들이던 로베르토가 한숨 쉬듯 말했다.
“……내일부턴 공식 훈련 이후 기본기 테스트도 추가하겠다. 테스트에 통과하면 말했던 대로 자유 시간을 주겠고, 통과하지 못하면 하루에 최소 두 시간씩 기본기 훈련을 할 계획이다.”
“예!”
축구부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지만, 불만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기본기 훈련에서 뭘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적은 훈련이 늘어난다는 건 반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저녁 훈련은 없다.”
“예!”
목소리가 더 씩씩해진 건 착각이 아니다.
기본기 테스트는 어느새 잊어버린 축구부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만, 오늘부터 저녁마다 전부 나랑 일대일 면담을 할 거다. 다음 주 중에 전지훈련을 갈 예정인데 그전에 다 해치울 거다.”
“예!”
“전지훈련 전까지 오전에는 전술적 주기화 이론을 접목한 훈련을 하고, 오후는 오늘처럼 체력 훈련을 할 계획이다.”
“전술 주기화요?”
윤태상이 대표로 손을 들었다.
“운동 이론으로 최대한 실전에 맞춰 효율적으로 훈련을 하는 방법론이다.”
“아…… 네.”
어려운 단어들이 쏟아지자 다들 흥미가 떨어졌다.
“직접 해보면 이해할 거다. 그리고 이게 학기 중에 매일 할 2~3시간짜리 훈련이니 내 훈련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들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대답이든 고개를 끄덕이든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피방 콜?”
“얼마만의 휴식 시간인데, 난 그냥 쉴래.”
그 와중에 3학년 무리는 자유 시간이 된 저녁에 놀러 갈 계획을 속닥이고 있었다.
“오늘 수고 많았다. 혹시 궁금한 거 있나?”
또렷한 로베르토의 목소리에 침묵이 깔렸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로베르토는 예상한 건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앞으로도 궁금한 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봐도 좋다.”
축구부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선수는 몇 없을 거다. 이들은 그동안 시키는 대로만 해왔을 테니까. 박종혁이나 엄태영이나 윤태상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는 축구 선수 개인으로서 한계가 생긴다.
그러니까 이건 바꿔야 하는 점이었다.
“그러면 다들 저녁 맛있게 먹고…… 노태신, 김병훈, 따라와라. 너희부터 면담 시작이다.”
노태신과 김병훈, 작년 주장과 부주장이면서 3학년 무리의 핵심들이었다. 놀거나 쉬거나 할 생각에 싱글벙글하던 둘은 잠깐 썩은 표정을 짓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옙!”
* * *
훈련이 끝나고 축구부원들은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때, 축구부원들은 친한 무리끼리 움직였다.
모두 주전으로 구성된 축구부의 실세 정두식과 박범철의 무리에서는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정두식이 말을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냐?”
“송현준? 잘 모르겠네.”
“아니, 걔는 지켜봐야 하는 거고. 감독 말이야 감독.”
박범철의 엉뚱한 대답에 정두식이 살짝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같은 무리의 홍준서가 끼어들었다.
“난 송현준 마음에 안 드는데. 재수 없잖아.”
“나도 나도.”
이민재가 말을 거들었다. 홍준서와 이민재는 중앙 미드필더였다.
연습경기에서도 같은 중앙 미드필더로 뛴 송현준에게 수시로 패스하지 않았다. 정두식은 그 모습이 유치하다고 생각했기에 표정을 찌푸리다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걔가 먼저 고개 숙였으니까 지켜는 봐줘야지.”
홍준서와 이민재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둘은 중앙 미드필더였기에 송현준의 실력에 위기감을 느꼈다. 본인들은 그게 위기감이 아니라 송현준이 재수 없어서 생긴 감정이라고 애써 위안하고 있었지만.
“모르겠다. 관심 없어.”
이번에는 박상호였다. 정두식과 같은 중앙수비수로 정두식보다 평가가 좋은 친구였다.
“훈련을 세 시간만 한다고? 말이 되나.”
“망하든 말든 뭐 어때.”
“우리는 진현 중학교 가면 되지.”
그리고 이 셋은 지상철에게서 진현 중학교로 전학 오라는 진지한 제안을 받은 이들이었다.
홍준서의 말에 박범철의 표정은 굳어졌고 정두식은 험악한 얼굴을 했다.
“우리는 망해도 된다?”
“아, 아니, 뭐 그렇게까지 가냐.”
“그게 뭐가 다르냐.”
정두식이 홍준서에게 목소리를 높이자 나머지 셋이 눈치를 보다 끼어들었다.
“에이,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
“준서가 한 말이 틀린 말도 아니잖아?”
“뭐?”
“두식아, 참아. 준서도 악의는 없는 거 알잖아.”
박범철이 말리자 정두식은 끓어오르는 화를 한숨으로 내뱉었다. 홍준서는 다른 사람 생각하지 않고 말할 때가 많았다.
정두식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윤태상을 발견했다.
“태상아.”
“응? 왜?”
윤태상이 걸음을 늦췄다.
“넌 새 감독이 말한 훈련량 줄인다는 거 어떻게 생각해?”
“어…… 음. 잘 모르겠는데. 일단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기본기 훈련이라는 것도 해봐야 아는 거고.”
판에 박힌 정석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동안 정두식의 그룹원들은 불편한 기색을 은근히 비쳤다. 정두식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안 들어서. 감독이 자기 할 일 안 하겠다는 거 아니냐?”
“그것도 그런가……? 하하, 잘 모르겠다. 어려워.”
윤태상은 어색하게 웃고 정두식 뒤에 있는 2학년생들을 잠깐 보다가 시선을 피하듯 정두식을 다시 봤다.
“그럼 가볼게.”
“엉. 저녁 먹을 때 보자.”
정두식이 손을 흔들고, 윤태상이 멀어지자 홍준서가 말했다.
“빠따가 쟤도 불렀다던데 어쩌려나.”
정두식이 물었다.
“진현 중학교에?”
“응.”
정두식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팀 기둥까지 뽑아가려고 뒷공작 하는 지상철이나, 그런 제안도 받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우울함 때문이었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박범철이 정두식의 어깨에 팔을 걸며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 제육볶음이래!”
“정말?”
박범철과 정두식이 앞서 걸었다.
나머지 셋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걸음을 늦춰 앞의 둘과 거리를 뒀다.
“전학 가면 이모님 밥 못 먹는 건 아쉬울 거 같네…….”
“갈 거냐?”
“한 일주일만 지켜보고 결정하려고. 일단 아빠는 가라고 하시더라. 진현 중학교가 더 명문이잖아.”
대영 중학교도 작년 초에 전국대회 4강에 든 적 있었지만, 진현 중학교는 대영 중학교보다 더 꾸준했다.
거기에 자신들까지 더해진다면 대영 중학교에 있는 것보다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어떻게 할지 정하면 우리끼리는 얘기해 주자. 갈 거면 같이 가는 게 좋잖아?”
“그건 그렇지. 근데 정두식 저 새끼 왜 이렇게 까칠하냐.”
홍준서가 불평했다.
박상호가 피식 웃었다.
“두식이랑 범철이는 애매하니까 빠따가 안 불렀잖아. 자존심 상하는 거지. 가장 훈련 많이 하는 게 두식인데 그만큼 더 기분 나쁘겠지. 네가 이해해라 준서야.”
“뭐,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네가 마음이 넓긴 무슨.”
홍준서, 이민재, 박상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 * *
축구부 숙소는 학교 근처의 아파트 1층 4개 호를 빌려서 쓰고 있었다.
많은 전생에서 머물렀던 곳이기에 아파트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편안함을 느꼈다.
“야, 근데 나 내일부터 숙소 생활할 건데. 집 가야 해.”
바로 집에 가려고 했는데 박종혁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끌고 왔다.
“어허, 내가 1학년이 해야 할 일을 조~금 알려줄게.”
내 시선을 피하는 박종혁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지금 짬 시키려는 거지.”
박종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조금만 도와주라.”
“에휴…… 뭔데.”
“빨래.”
“빨래? 그게 왜 내가 필요해. 손으로 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설마 신발 빨래냐?”
“아니, 세탁기만 쓰는 날인데 양이 많으니까 옮기는 것만 도와달라고…….”
나는 갸웃했다.
“혼자 당번이야?”
“지난번에 까먹고 훈련해 버려서 오늘은 나 혼자 하기로 했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나 간다~.”
“아 제발요.”
“그래, 봐준다.”
웃으면서 박종혁에게 돌아갔다. 박종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 빨래 개 많단 말이야.”
“고마우면 나중에 도와.”
“네네.”
오늘은 아버지가 야근이라 내일 회사 끝나고 차로 같이 짐을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숙소에 안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겸사겸사 숙소 생활을 알려줄게. 1학년들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해. 축구부의 모든 잡일을 하는 거야.”
“그렇구나.”
“일단 빨래. 유니폼부터 시작해서 평상시 입는 옷까지. 세제를 팍팍 쓰는 게 비법이지. 냄새나면 선배들이 지랄하거든.”
“응.”
“그렇다고 매일 할 필요는 없어. 1학년끼리도 당번 나눠서 로테이션 돌리거든. 너는 특별히 다음부터 나랑 몇 번 같이 조를 짤게. 이 선배님께서 잘 알려주겠다 이 말이야.”
“네네, 고맙습니다.”
건성으로 들으면서 숙소를 살폈다. 기억과 똑같았다. 달라질 이유도 없었지만.
우리는 일단 1학년 숙소에 들어갔다.
“와 박종혁. 설마 현준이 짬 시키냐.”
“아니거든. 자진해서 도와주겠다고 한 거거든.”
어이가 없어서 박종혁을 쳐다봤다. 자기도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성주야, 내일부터 잘 부탁한다.”
“응, 재밌게 해보자고~ 너 오늘 쩔더라.”
“감사.”
김성주는 중앙수비수 후보로 평범한 친구였다. 다른 반이었지만, 박종혁을 통해 안면은 있는 상태였다.
그 외에도 1학년 동료들은 날 호의적으로 받아줬다. 1학년 실세나 다름없는 박종혁의 절친인 덕도 봤을 것이다.
“……진짜 개 많네.”
“그치? 혼자 하기 힘들었겠지?”
박종혁의 말을 무시하면서 빨래가 담긴 바구니를 꾸역꾸역 안아 들고 감독 숙소로 이동했다.
“여기는 감독님, 코치형, 그리고 각 학년 선임급 선수들 숙소야.”
주장이나 부주장은 전부 이곳에 머무르고, 각 학년 숙소 인원이 너무 많으면 이쪽으로 빠진다. 군대로 치면 본부중대 숙소 같은 느낌이다.
문을 열자 달짝지근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식사도 여기서 해. 우리 이모님 음식솜씨는 최고라니까.”
“종혁아~ 적당히 띄워라~ 그렇다고 네 반찬 늘어나는 거 아니다~.”
“예, 이모님~.”
조리 중이던 이모님이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안녕하세요. 송현준이라고 합니다. 1학년이고, 내일부터 신세를 질 것 같습니다.”
“아이고, 예의 바르네. 편하게 이모님이라고 불러.”
“네, 이모님.”
이 숙소는 가장 큰 평수를 자랑하고, 세탁기도 세 대나 있었다. 우리는 세탁물을 집어넣고 2학년 숙소로 이동했다.
“2학년 형들이 축구부 실세들인데…… 아직 아무도 안 오셨네.”
우리는 빨래만 챙겨서 옮겨놓고 3학년 숙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빨래 좀 가져가겠습니다!”
“그래~.”
평상복 차림의 3학년 하나가 거실에 누워서 티비를 보던 채로 대답했다. 거실에는 3학년생이 넷 정도 더 있었지만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꾸벅 허리를 숙이자 한두 명만 손을 흔들었다. 내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분위기는 나태함 그 자체다.
그럴 만하긴 했다.
“엥, 문이 열려 있네.”
“너희들 문 좀 닫고 살라니까.”
그때였다. 우리가 열고 들어온 현관문으로 두 명이 들어왔다. 로베르토와 면담을 하러 갔던 노태신과 김병훈이었다.
“종혁이구나. 빨래 가지러 왔냐?”
“네!”
이번에도 허리를 꾸벅 숙였다. 노태신은 귀찮다는 얼굴로 날 향해 손을 휙휙 내저었다.
“됐다. 인사는 무슨. 어서 빨래 가지고 나가.”
“네!”
우리는 빨래를 챙겨 들고 나가려고 했다.
“아, 잠깐만. 송현준이라고 했나.”
노태신이었다.
“네.”
“너 지혁이랑 아는 사이지?”
김채아의 오빠와 노태신은 아는 사이다.
“네! 같이 대회 나갔습니다.”
“지혁이가 네 칭찬 많이 하드라.”
“감사합니다.”
노태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칭찬할 정도인가…… 오늘 꽤 하긴 하던데…….”
숙소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노태신은 이 숙소의 분위기를 꽉 잡고 있었다. U-16 국가대표. 1학년 때 전국대회 4강의 주역이었던 노태신은 이 숙소의 리더이자 3학년생들이 게으른 이유였다.
1학년이었던 노태신이 이끈 전국대회 4강 덕에 이들은 고등학교 입학이 확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태신은 그 이후 축구부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실력으로만 보면 윤태상과 비슷한 수준이다. 경험이 좀 더 많고.
“선배한테 정말 잘한다고 하던데…….”
노태신이 느릿느릿 말하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면 개인기 한번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