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70화
이민우가 활짝 웃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그 모습에 윤태상이 당황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다만 그 이후 윤태상이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윤태상에 관해 생각나는 걸 몇 개 더 적고 이번에는 같은 2학년인 <정두식>을 적었다.
2학년 그룹의 맨 앞에 정두식이, 1학년 그룹의 맨 뒤에 박종혁이 있어 둘은 나란히 리프팅을 하면서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둘은 리프팅을 계속하며 윤태상과 이민우의 대결을 보고 있었다.
정두식의 입이 투덜거리는 모양을 하는 게 보였다.
보나 마나 ‘연습할 맛 안 난다.’, ‘망할 천재들.’, ‘천재들 다 죽었으면.’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겠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정두식에 관해 적었다. 전생에서 정두식과 했던 대화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재수 없는 놈.
친하진 않았지만, 나는 선배를 존중한다.
<말은 거칠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선배. 훈련 태도가 가장 좋은 모범적인 선배. 다만,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는 않다.>
고민을 하다 한마디 더 적었다. 솔직해져야 했다.
<프로축구 선수가 되기에는 재능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다.>
* * *
“민우 걔 정말…… 어마어마하더라.”
“한국 온 지 6년도 넘었는데 브라질 유소년팀에 연락하니까 당장 돌아오라고 할 정도라잖아요.”
전생과는 다른 흐름이었기에 이민우와 대화를 많이 했다.
이민우가 브라질로 돌아가기로 한 결정적인 근거는 산토스 유소년팀의 긍정적인 반응 때문이었다. 어릴 적 U-10 팀에서 뛸 때 감독에게 연락해 보니 돌아오면 최소 3개월은 테스트 겸 훈련에 참가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얘기하니 로베르토는 덜 아쉬워했다.
“바로 프로팀에 간다니 안심이 되네.”
“……진짜 유망주 바보네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네네~.”
장난스럽게 말하며 궁금한 내용을 물었다.
“근데 저희 전지훈련 왜 안 가요?”
로베르토와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따로 만나기로 했다. 최근은 초보 감독 로베르토의 하소연 자리나 다름없었다.
보통 중학교의 방학은 한 달가량이지만, 이번에는 학교 건물을 보수한다고 한 달 반가량이었다.
덕분에 아직 한 달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전지훈련을 갈 거면 당장 가고 안 갈 거면 여기서라도 특별한 프로그램을 돌려야 했다. 프로 팀 선수들이 프리시즌을 빡빡하게 보내야 그 시즌을 잘 보내는 것처럼, 중요한 시기다.
“원래는 이번 주 금요일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로베르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요? 용잠군으로 갈 거였잖아요.”
축구부원들은 다들 전지훈련을 간다고 알고 있었다.
장소도 정해져 있다. 전라남도 용잠군, 전지훈련의 명소 중 하나였다. 다른 중학교나 고등학교도 많이 오는 게 장점이었다. 다른 축구부로 북적이는 게 뭐가 장점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지역의 팀과 친선경기를 많이 해볼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이점이었다.
또, 나도 용잠군에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우리 축구부의 전국대회 우승을 위해서는 선수가 하나 더 필요했다. 용잠군에는 당장 입학시킬 수 있는 선수가 하나 놀고 있었다. 그 친구를 데리러라도 빨리 가야 했다. 다른 축구부가 채가기 전에.
이 친구는 성인이 돼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요? 영대 아저씨가 전지훈련비도 평소보다 더 부담한다고 했잖아요.”
이사장은 더불어 우리가 전지훈련을 다녀오는 동안 훈련 장비를 개선해 주거나 새로 사주겠다고 했다.
“……거기 말이야. 용잠군. 거기에 있는 잔디 경기장이 꽉 찼대. 잔디 경기장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싶은데…….”
“그럴 필요 있을까요? 전국대회 예선도 인조잔디 구장이나 모래 구장에서 할 때도 있는데…….”
로베르토는 단호했다.
“모래 구장에서 연습하는 건 학기 중에 충분히 할 수 있어. 인조잔디 구장도 대전 내에서 구하기 쉽지. 근데, 나는 축구선수라면 어느 환경에서나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로베르토의 철학이 생각났다.
“그런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에 다양한 환경을 접해봐야 해. 모래 경기장에서만 뛰는 선수들에게도 장점이 있겠지만…… 성장기인 지금 잔디 경기장에서도 뛸 수 있을 때 뛰어 봐야 해. 뭣보다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반복할 건데 무릎에 부담이 적은 장소여야지.”
로베르토의 고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생각에 동의했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왜 무릎이 안 아프지?
로베르토와 처음 만난 세 번째 전생의 떠올랐다.
로베르토의 이 고집 덕에 성장기였던 나는 무릎을 자연스럽게 관리할 수 있었고, 나중에 또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내 무릎을 성장기에 관리해 주면 더 오래 더 잘 뛸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그 전생부터 난 약점을 보강해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될 수 있었다.
전생 대부분을 바꿔 준 게 로베르토의 이 고집 덕이었다.
“……맞는 말이네요. 저도 공감해요.”
“그래? 고맙다.”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원래는 로베르토가 알아서 준비했었는데, 이렇게 차질이 생긴 걸 보면 감독으로 부임한 시기가 늦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풋살대회에 나갔기 때문이다.
나비효과라는 건 이래서 머리 아프다. 계획을 틀어버리니까.
새 계획을 대강 짜고, 로베르토에게 말했다.
“그러면 저 내일 저녁에 어디 좀 다녀와도 될까요?”
“자유라고 했으니까 상관없지?”
“운동장에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렇지? 어릴 때부터 자기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야 해. 자기가 훈련이 더 필요한 사람인지, 휴식이 더 필요한 사람인지…….”
“그러면 토요일, 일요일에 휴가 좀 다녀와도 돼요?”
로베르토의 말이 더 길어질 거 같아서 끊었다.
로베르토가 갸웃했다.
“그건…… 왜?”
공식 훈련을 빼먹는다는 거니 로베르토가 의문을 가지는 거다.
“전국대회 우승을 위해서, 전지훈련지를 찾아올게요. 최대한 빨리.”
* * *
이곳은 아르드 코리아의 대전지부 사장실.
아르드 코리아의 사장 신정우는 오늘은 침착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볼 때마다 신기한 중학생에게 신정우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부탁하러 왔어요. 후원 좀 해주세요.”
“후원?”
부모님을 만나 정식으로 계약서까지 썼으니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였다. 그런데, 직접 찾아온 게 이상했다. 스포츠 물품 후원이라면 대전에 있는 아르드의 지점장들에게 미리 얘기를 전해놨는데.
“네, 훈련장 후원이요.”
“……훈련장?”
뜬금없는 스케일에 당황해서 목소리가 튀었다. 신정우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을 가다듬다가 송현준의 이어지는 말에 한 번 더 헛기침을 하게 됐다.
“한 달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잔디 경기장, 아니, 잔디가 깔린 넓은 공간이 필요해요. 약 30명이 뛸 수 있는. 축구 골대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고요. 골대는 옮기면 되니까.”
신정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말하기로 했다.
“저기, 현준아.”
“네.”
“내가 여기 사장이긴 하지만.”
“네.”
“한국지부 사장인 거고, 또, 우리 기업이 스포츠의류업체긴 하지만 경기장 임대 사업은 안 하고 있는데?”
타당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송현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예전에 제 인조잔디를 섞는 아이디어 있잖아요.”
송현준을 인상 깊게 보게 된 첫 만남이 떠올랐다. 송현준의 말은 계속됐다.
“그 아이디어를 전달해 준 분은 뭐 하는 분이에요?”
그 물음에 신정우는 다리를 탁 칠 뻔했지만 애써 참아냈다. 놀라웠다. 송현준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다가가 있었다. 신정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잔디 아이디어를 전달받을 분이고, 기업 사장이랑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잔디 전문가일 것 같아서요. 그 정도면 잔디가 잔뜩 깔린 장소를 찾는 건 어렵지 않겠죠. 그 사람에게 제 얘길 전해주면 좋겠어요. 수십 명의 축구부원이 한 달 동안 훈련하는 걸 통해서 잔디 내구도 실험할 생각 없냐고.”
신정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송현준은 그냥 요구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줄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거래를 할 줄 아는 것이다.
신정우는 장난기가 들었다.
“그걸 말해주면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사장님이 후원하는 제 무릎을 더 관리해 줄 수 있어요?”
“……무릎?”
고작? 이라는 물음은 속에 넣어뒀다.
“제 무릎은 몇천억 단위의 가치를 가질 거니까요.”
“뭐? 하하하!”
신정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송현준과 얘기하면 신선했다.
아직 젖살도 다 빠지지 않은 얼굴로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자신만만하게 하고 있으니. 심지어 자기 말을 증명하기까지 했다. 그걸 직접 본 신정우의 입장에서는 이 말로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송현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잔디 아이디어를 전달해 주고, 신정우의 작은 잔디 운동장들을 자문 및 관리해 주고 있는 전문가는 우리나라 3대 대기업 하랑물산의 골프장 잔디 수석연구가였다.
골프에 죽고 못 사는 하랑기업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그녀는 신정우와 친분이 있었고, 심지어 송현준의 말대로 하랑물산의 소유지만 아직 개장하지 않은 골프장에서 여러 잔디를 실험해 보고 있었다.
“말을 전해주는 것도 다 돈이고 성과야. 나중에 너 성공하면 제대로 협조해야 한다?”
“당연하죠.”
당당한 송현준의 말에 신정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로베!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신정우는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있냐는 듯 짜게 굴어놓고 로베르토에게 대인배인 척하고 있었다. 사업가라는 건 저런 사람들이었기에 별생각은 없었다.
-……미처 사장님까지 생각 못 했네요. 현준이가 다 얘기했다고요?
옛날 휴대폰이라 그런지 내게도 로베르토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신정우는 나와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로베르토에게 전화를 걸었고, 방금 했던 얘기를 주르륵 늘어놓았다. 내가 앞에 있는데도 별 개의치 않았다.
“그래, 이 녀석 참 당돌하다니까.”
-어휴……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할 일을 하고 있네요.
“들렸다고 말해주세요.”
큰 목소리로 말했고, 신정우는 끼어들지 않고 잠시 멈췄다. 로베르토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자식이. 와서 보자.
“훈훈해서 보기 좋아. 근데, 확실히 된다는 건 아니야. 강 교수한테 이제부터 전화할 거거든.”
-강 교수님이면 그때 만났던 분 맞죠? 하랑물산에서 관리하는 골프장에서 만난.
“맞아.”
-잘 됐으면 좋겠네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전생의 정보들을 떠올렸다.
신정우는 로베르토와의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강 교수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려는지 휴대폰을 열심히 눌렀다.
“일 처리가 빠르시네요.”
“당연하지. 몇천억짜리 무릎을 위해선데.”
신정우의 농담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 강 교수! 나야. 지금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