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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72화 (173/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72화

나보다도 키가 작은 한 남자애가 힘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골목으로 숨었다. 남자애는 우울한 얼굴로 바닥이나 벽을 툭툭 걷어차면서 걷고 있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남자애, 그러니까 티알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의 이 시절 상황에 대해 빠르게 떠올렸다.

누가 봐도 동남아시아 지역 사람 같은 티알은 반은 필리핀, 반은 한국 사람이었다.

본명은 라에 리베라 류, 이름에 R이 세 번 들어가서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Triple R을 줄여 티알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티알은 사업차 필리핀에 방문한 아버지와 현지 식당 가게 딸이었던 어머니의 짧지만 깊은 사랑의 결실로 태어났다.

그 이후 복잡하지만 로맨틱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티알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13년을 살았고, 작년에 처음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와 재회한 어머니는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이민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티알은 작년부터 현지에 있는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보다 먼저 한국에 왔다. 어머니는 아직 현지 일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티알은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티알은 필리핀 사람으로 쭉 살다가 작년부터 갑자기 한국인으로 살게 된……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괜히 지금 목표 없이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 게 아니다.

티알의 현재 상황을 떠올린 건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해서다.

통, 통.

축구공을 가볍게 퉁겨봤다. 티알은 축구에 재능이 있다.

어린 시절 가게 일을 돕지 않을 때는 매일 골목을 쏘다니며 동네 친구들과 공을 찼고, 모래사장에서도 찼고, 숲에서도 공을 찬 덕분에 자연스럽게 기본기를 갖추게 됐다.

체력이 아쉬운 편이지만 훈련만 제대로 시키면 충분한 수준으로 올라오고, 우리 축구부의 왼쪽 윙으로서 의외성과 개성을 더해줄 게 틀림없는 친구다.

막 한국에 와서 전학 갈 학교를 고르고 있었기에 바로 데려올 수 있다는 점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통, 통.

축구공을 세게 튕겨서 손에 잡았다.

티알은 유일한 가족인 자기 아버지와 어색하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많이 무뚝뚝한 성격이라 더 그렇다. 같이 공을 차던 친구는 다 필리핀에 있다.

당장 필리핀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그러자고 할 상태다.

들고 있는 공을 봤다.

역시,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 접근하는 게 맞다.

판단을 마치자마자 티알이 걷는 방향을 확인하고, 티알이 가는 방향에 있는 공터로 뱅 돌아 뛰어갔다.

용잠마을이 어떻게 생긴 지는 내가 티알보다 더 잘 알 거다. 수많은 전생에서 한두 번 전지훈련을 온 게 아니었다. 프로팀에서 뛸 때도 이곳으로 전지훈련을 온 적이 있을 정도다.

공터에는 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구조물이 있었다. 수도시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난 리프팅을 세 번 하고 그곳에 슈팅을 하고, 튕겨 나오는 걸 다시 트래핑 하고, 세 번 리프팅해서 다시 슈팅하는 걸 반복했다.

좋아하는 영화인 소림축구에서 나온 장면의 흉내다. 해보면 은근히 재미있다.

통, 통, 통, 팡!

물론, 이 행동의 진짜 목적은 큰 소리를 내기 위함이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게 티알이 틀림없었다.

빵!

일부러 슈팅을 세게 해서 튕긴 공이 내 머리 위로 공이 지나가게 했다.

공을 줍는 척 자연스럽게 뒤를 돌았다.

멍하게 날 보고 있던 티알과 시선이 마주쳤다. 티알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녕?”

부드럽게 웃으면서 먼저 인사했다. 티알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뭐가 미안해?”

“쳐다봤다…….”

티알은 아직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았다. 원래도 별 신경 안 쓰지만 알고 있었기에 더 아무렇지 않았다.

손에 공을 들고 있었다. 티알은 내 품에 안긴 공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구경하는 게 뭐 어때서! 혼자 하기 심심한데 같이할래? 축구 할 줄 알아?”

“응? ……으응!”

“그럼 받아!”

생각할 틈도 없이 공을 놓고 패스했다. 티알의 무릎 쪽으로 애매하게 날아가는 공을 티알은 살짝 점프해서 발 안쪽으로 깔끔하게 받아 냈다.

역시는 역시다.

“잘하는데?”

“……고, 고맙다~.”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인 말투를 들으니 반가웠다.

우리는 패스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송현준이라고 하고, 대전에서 왔어.”

“나, 나는! 라에 리베라 류. 티알이라고 한다~.”

“본명이 라에 리베라 류고, 티알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맞다!”

티알은 여러 방식으로 공을 건네줘도 꼬박꼬박 패스를 돌려줬다. 재미있어 보인다기보다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게 보였다.

먼저 얘길 시작했다. 일부러 영어를 쓰지 않았다. 어떤 전생에서 티알을 편하게 데려오려고 영어로 말했다가 티알이 한국어를 제대로 안 배우고 나만 졸졸 따라다녀서 고생했기 때문이다.

“혼자 공을 차야 해서 심심했는데 놀아줘서 고마워.”

“아니다~.”

“너 한국어 되게 잘한다.”

티알은 고개를 저었다.

“못 한다~.”

“내 말 다 알아듣잖아.”

“그건…… 응. 맞다…….”

티알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가 작년 내내 한국어학당에 다니게 했다…….”

“정말? 어느 나라에서 온 건데?”

“필리핀…….”

“오! 그래서 네가 축구를 잘하는구나. 유럽 리그에서 뛴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필리핀 사람이잖아.”

“진짠가~?”

파울리노 알칸타라. 3살 때 필리핀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원활한 대화를 위해 그런 건 넘어가기로 했다.

“응.”

“내가 축구를 정말 잘하나~? 축구가 풋볼 맞나~?”

“맞아.”

한국어 칭찬에는 머뭇대던 티알이 반색했다. 축구를 잘한다는 칭찬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축구부라서 잘 알아.”

“축구부……? 그게 뭔데~?”

“학교에 있는 축구만 하는 팀이야.”

패스를 받은 티알이 공을 돌려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얼굴에 관심이 생긴 게 보였다.

“축구만……?”

“응, 매일 축구 해. 대회도 나가. 나중에 프로 선수로 뛰고 싶은 학생들이 모여 있어.”

“프로 선수?”

외국어와 한국어의 혼용이라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축구가 직업인 사람? 축구로 돈을 번다고 해야 하나.”

“아, 그거.”

티알의 눈동자가 커졌다. 반응을 보니 술술 잘 풀린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 떡밥을 던졌다.

“관심 있어 보이는데…… 테스트라도 볼래? 우리 감독님 연락처라도 줄까?”

“정말? 그래도 되나?”

“우리 축구부 인원이 부족한데 네가 와주면 좋을 거 같아.”

“그래도 되나?!”

자신감 없이 우물쭈물하던 티알은 어느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계속 사투리가 섞여 뒷말이 늘어지는 걸 보니 티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투리는 쉽게 옮는다.

전생에서 들었는데 필리핀에 있을 때는 표준어를 배웠는데 아버지 고향에 온 한 달 만에 사투리 말투가 옮았다고 했다.

“응, 잠깐만.”

준비해온 수첩과 펜을 꺼냈다.

“대전에 있는 대영 중학교 축구부고, 여기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도원군의 개장하지 않은 골프장에서 한 달 동안 전지훈련을 할 예정이야.”

“어…… 천천히 말해 줘라~.”

“응, 그러니까…….”

또박또박 다시 얘기해 주고, 티알에게 로베르토의 연락처와 골프장의 주소를 적은 종이를 건넸다. 티알은 그 종이가 소중한지 꾹 쥐었다.

일단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만약에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럼 꼭 다시 보자.”

내 인사에 티알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까지 가족들과 남은 휴가를 즐겼다.

* * *

전지훈련 장소인 미개장 골프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로베르토가 도착했다.

“먼저 와서 뭐 했냐?”

“해변에서 개인 훈련 좀 했어요. 그리고 새 축구부원으로 데려오면 괜찮을 것 같은 애를 발견했는데요…….”

“뭐?”

로베르토가 되물었다. 일단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했다.

“개인 훈련하다가 우연히 만난 앤데요…… 공을 꽤 차는 거 같아서 로베르토 연락처를 줬거든요. 연락처를 함부로 줘서 죄송해요.”

“아니야, 그런 건 상관없고. 공을 꽤 찬다고?”

“네. 테스트라도 볼 생각 있냐고 물어봤어요.”

“다른 학교 다니는 거 아니고?”

“한국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대요.”

“한 달?”

“네, 로베르토랑 비슷해요. 필리핀에 살다가 얼마 전에 한국으로 왔대요.”

“아, 하프냐?”

“네.”

로베르토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중요한 건 실력이지.”

“그렇죠.”

동감이다.

로베르토가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던 로베르토가 나를 봤다.

“널 보면 가끔 내 또래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게 느껴져.”

“제가 조숙하긴 해요.”

로베르토가 웃었다.

“근데 여기 정말 괜찮은데? 청소는 좀 해야겠지만.”

“그렇죠? 근데 뭐 스물다섯 명이니 금방 할 거예요. 내일 관리인 아저씨 오면 얘기해요.”

“그러고 보니까 관리인 아저씨는?”

“4시인가 퇴근한다고 저한테 열쇠 주고 갔어요. 자요.”

대화 화제를 돌리는 거 같아서 받아주며 로베르토에게 열쇠 꾸러미를 건네줬다.

앞으로 리조트 건물로 쓰일 거라 그런지 외관은 깔끔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있는 복도나 방에는 공사 폐기물 같은 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샷시랑 방충망도 잘 돼 있고, 전기도 들어와서 생활할 곳만 치우면 된다.

“리조트 앞은 야간조명도 들어온다고요. 확인해 보실래요?”

잔디밭에 리조트에 야간조명까지. 완벽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야간조명을 켰다. 아직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고 있어서 불이 크게 눈에 뜨이진 않았지만, 불이 들어오는 걸 확인할 정도는 됐다.

“잔디도 괜찮죠? 그때 제 아이디어로 조성한 거래요.”

“고맙다.”

로베르토는 잔디를 밟아보고 뛰어 보기도 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갑자기요?”

로베르토는 날 쳐다보지 않고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청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도움이 많이 된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이 얘긴 더 이상 안 할 거다. 부끄럽다.”

마찬가지다. 이런 분위기가 길어지는 건 싫다.

가볍게 말했다.

“알겠어요. 대신 다음 전국대회에서 우승이나 해 봐요.”

“좋지. ……뭐? 전국대회 우승?”

“저 같은 선수 데리고 우승 못 하면 욕먹어요.”

“와, 이 자식 보게.”

평소 같은 분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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