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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75화 (138/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75화

솨아 하는 샤워기 소리가 가득하다.

한 시간 정도의 간단한 몸풀기 훈련을 마친 우리는 저녁을 먹기 전에 샤워하고 오라는 로베르토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몸을 씻고 있었다.

참고로 로베르토는 오늘 저녁 훈련을 전부 금지했다. 내일 훈련이 힘들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 샤워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있었다.

“뜨거운 물 나오네.”

물이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여름에 뜨거운 물? 허접이냐?”

박종혁의 한마디에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샤워기 헤드를 잡고 박종혁 쪽으로 돌렸다.

“앗뜨뜨뜨! 이 미친놈이! 먹어라!”

찬물이 날아올 걸 예상하고 한 걸음 물러나서 피했는데,

“악! X바!”

내 옆에서 조용히 씻고 있던 티알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박종혁의 샤워기 물을 맞아버렸다.

1학년들만 가득한 샤워장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범인 박종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뻔뻔하게 소리쳤다.

“티알 이거 욕 잘하네! 어떠냐! 으하하!”

“야이 문디 새꺄!”

욕을 하고 순간 눈치를 보던 티알은 이어지는 박종혁의 도발에 분노했다. 샤워기를 들고 박종혁을 향해 물을 쐈다. 티알의 구수한 욕을 들으니 전생의 티알들이 떠오르며 참 오랜만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이 자식은 한국말을 못 할 때도 욕은 잘했다. 아버지가 한국 오자마자 욕을 가르쳤다고 했다. 기죽으면 안 된다고.

어이없는 놈.

“앗 차가! 니들끼리 싸워 미친놈들아!”

“으아악! 뜨거워! 얘도 허접이네!”

눈이 돌아간 티알은 내게 물이 튀든 말든 박종혁을 집요하게 노렸다.

“얘들아, 기다리는 사람 있다. 빨리하자.”

잠시 후, 윤태상이 샤워실 입구에서 고개를 내밀고 차분하게 말했다. 큰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네…….”

“예에…….”

박종혁과 티알이 차례로 시무룩해졌다.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우리는 무사히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샤워장에서 방으로 가는 복도에서 개운한 얼굴의 티알에게 물었다.

“훈련 어땠어?”

“그게…….”

티알은 먼저 박종혁과 주변 눈치를 봤다.

“어땠냐?”

박종혁도 물어봤다. 이민우는 씻기 귀찮다면서 1분 만에 씻고 방으로 먼저 들어가서 여기 없었다.

“할 만했다~.”

티알은 조금은 우쭐대듯이 말했다. 박종혁이 음흉하게 웃었다.

“왜 그러나?”

“내일이 기대돼서.”

“내일? 왜?”

“직접 해보면 알아. 오늘은 푹 자고.”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해졌는지 티알이 날 조심스럽게 밀었다.

“현준 너도 왜 그러는데. 오늘은 쉬운 거였나?”

박종혁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느껴봐.”

“알려 줘라~ 쫌.”

나와 박종혁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이민우가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우릴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축 늘어졌다. 졸린 모양이다.

“왜 개인 훈련이 금지인 거야…… 현준이 너랑 놀 생각이었는데.”

“내일 힘들 거래잖아.”

“에잉…….”

졸린 게 아니었구나. 이 훈련병자 놈.

시무룩해진 이민우를 뒤로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옷과 샤워 도구를 정리하고, 우리는 차례로 이모님이 준비해 준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생긴 자유시간.

박종혁이 이민우와 티알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쉬겠다며 거절했다. 고무줄을 가져가는 거 보니 예전에 알려준 발목 운동을 하고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나는…… 벽돌같이 두꺼운 기계…… 그러니까 PMP를 꺼냈다.

“오? 현준아. 뭐 재밌는 거 담아왔냐?”

“아, 선배님.”

“야동이냐 야동?”

마치 말년병장처럼 구석에 누워 배를 긁고 있던 노태신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어색하게 웃으며 PMP의 화면을 보여줬다. 막 튼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 미친놈. 이런 좋은 기계로 축구 경기를 담아오는 놈이 어딨냐.”

“……죄송합니다.”

크게 실망하는 노태신을 보니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이거 뭐냐? 우리나라는 아닌 거 같은데…… 와, 개 잘하네.”

작은 화면에서 드레드 머리를 한 덩치 큰 선수가 유려한 트래핑으로 상대 수비수를 제쳐냈다.

“와…… 존나 빠르네.”

이어서 다른 선수는 따라오지도 못할 치고 달리기를 선보이며 두 명의 선수를 한 번에 뚫어냈다.

“90년대 이탈리아 프로축구 영상입니다. 아버지가 해외 축구 마니아라서요.”

“그러면 이 선수는 이름이 뭔데?”

“굴리트라고 합니다.”

“굴리트……?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와…… 뭐 이런 선수가 다 있냐. 개사기네. 키도 크고 빠르고 몸싸움도 되네. 기술도 엄청나고.”

“그렇긴 하죠.”

노태신과 잡담을 나누면서 PMP에서 재생되는 축구 영상을 봤다. 회귀가 반복되기 이전에 아버지 덕분에 봐온 이 경기 영상들은 내 기본기를 되새길 때 반드시 봐야 할 영상이었다.

그렇게 여러 경기를 본 끝에 나갔던 친구들이 돌아왔고, 우리는 로베르토와 김진호의 지시에 따라 10시부터 불을 끄고 누웠다.

당연히 바로 잠들지는 않았고, 여러 방향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 바로 옆에서도 투덜대는 놈이 하나 있다.

“잠이 안 와.”

“자라…… 내일 진짜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아까 티알한테도 엄포해 놓고 왜 그래?”

티알은 피곤했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왜~ 로 감독님 훈련 많이 안 하잖아. 난 원래 로 감독님 훈련 잘 따라갔고.”

“전지훈련부터는 빡세게 한다고 했잖아.”

“그런가…….”

박종혁이 생각에 잠긴 건지 잠시 조용히 있었다.

잠들었나 싶어서 자려는데 박종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다음 날 아침, 박종혁은 괜찮지 않았다.

“으에엑…… 으억…… 으어어어어…….”

박종혁이 무릎 꿇은 채 토를 하고 있었다. 박종혁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축구부원이 누운 채로 미동도 하지 않거나, 헛구역질을 하거나 진짜로 토를 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현기증이 나서 누운 채로 하늘을 보는 중이다.

박종혁의 토가 튈까 걱정됐지만, 맛이 간 박종혁을 쪼아댈 정도로 내가 인격파탄자는 아니다.

“티알…… 괜찮냐…….”

“마, 말을…….”

“힘들면 숨이나 쉬어.”

반대쪽에 누운 티알은 대답 없이 크게 숨쉬기만 했다. 그래도 여력이 있는 나는 고개를 돌려서 우리 사이에서 유난히 높게 솟아 있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우리처럼 체육복을 입고,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는 남자.

그 남자는 축구부의 감독인 로베르토였다.

* * *

잠깐 시간을 돌려서 로베르토는 훈련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전지훈련이다.”

“…….”

축구부원들은 힘들 것보다는 설레는지 표정이 좋았다. 로베르토가 계속 말했다.

“잔디가 넓지?”

“예!”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설도 좋고 풍경도 좋다. 산기슭이라 여름인데도 꽤 시원했기에 쾌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오전에는 본격적인 체력훈련을 할 계획이다.”

“예!”

3학년들은 자기들끼리 뭐 별거 있겠어? 라고 속삭이기도 했다. 체력훈련은 지긋지긋하게 해왔기 때문이었다.

“김진호 코치님이 그은 선이 보이나?”

“예!”

정규 규격 중 가장 큰 축구장 크기로 직사각형을 그렸고, 5m 간격으로 세로선이 그어져 있다. 바둑판에서 가로선을 없앤 모양이랑 비슷했다.

“이 선들을 이용해 인터벌을 할 거다.”

다들 인터벌이 뭔지 알았기에 큰 반응은 없었다.

“알기 쉽도록, 우리가 이번 전지훈련 기간에 할 인터벌 훈련에 이름을 붙였다. ‘고무줄 인터벌’이다.”

다만, 이어지는 로베르토의 설명에 다들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로베르토는 축구부원들을 등지고 잔디훈련장의 끝에서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에는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전력 질주한다. 돌아갈 때는 천천히 뛰어서 온다. 그다음은 한 칸 안쪽 선부터 반대쪽 한 칸 안쪽 선까지 전력 질주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천천히 뛰어온다.”

로베르토의 말을 정리하면, 처음에는 120m 인터벌, 그다음은 110m, 다음은 100m 이런 식으로 10m까지 인터벌을 하고, 다시 10m씩 늘려서 120m 인터벌로 마무리.

한 번의 훈련으로 긴 거리 인터벌부터 짧은 거리 인터벌까지 다 하겠다는 얘기였다.

거리로만 치면 20m 셔틀런을 140번 정도 왕복하는 거나 다름없다. 여러 체력훈련을 해왔기에 계산이 빠르게 끝난 축구부원들은 사색이 됐다.

“두 조로 나눠서 진행한다. 오전 내내 3세트를 할 거다. 세트 사이마다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겠다.”

“3세트?”

“……어떡하지.”

축구부원들이 속닥대든 말든 로베르토는 설명을 계속했다. 축구부원들은 한숨을 쉬며 몸을 풀었다.

질색하면 뭐 어쩌겠나, 해야지.

그때, 로베르토가 다른 얘기를 했다.

“내가 볼 때 너희들의 체력은 한참 모자라다.”

“예에…….”

다들 로베르토의 말뜻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대답을 건성으로 했다.

하지만 로베르토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대답이 시원찮다? 너희들이 부족하다는 건데 자존심도 안 상하나?”

“…….”

대답이 없었다. 다들 로베르토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너희들 체력으로는 기본적인 것도 소화 못 한다는 얘기다. 기본기도 마찬가지다. 내 기준에는 한참을 못 미친다.”

“…….”

도끼눈을 뜨는 축구부원이 한둘이 아니다.

“나는 이번 전지훈련을 통해 너희들이 기본은 하게 되길 바란다.”

“……기본?”

노태신이 중얼거렸다.

축구부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축구를 해왔고, 쉬는 날도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축구를 해왔는데 기본도 안된다는 얘길 들으니 기분이 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감독님, 기본이라니…….”

윤태상이 대표로 항의하려고 했지만, 로베르토가 말을 끊었다.

“직접 보여주마. 오늘 훈련은 나도 같이한다. 프로축구를 그만둔 지 5년 됐다. 나보다 못하면…… 안 되겠지?”

다들 스턴이 걸린 것처럼 멈췄다.

윤태상은 항의 대신 질문을 했다.

“같이…… 뛰신다고요?”

“당연하지. 너희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건 보여줘야지.”

다들 정말 당황하는 게 보였다. 코치도 아니라 감독이 시범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훈련을 함께한다는 건 쉽게 보기 힘들었으니까.

“학교에서도 같이하고 싶었지만, 너희들의 훈련 프로그램을 준비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이제부터 전국대회까지 어지간하면 함께 훈련할 거다.”

로베르토가 새벽이나 한밤에 틈틈이 시간을 내서 이 방식의 인터벌을 훈련했던 걸 잘 안다. 중학생보다는 체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요령이 있으니까 로베르토는 축구부원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저, 저는?”

옆에 있던 김진호 코치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로베르토에게 물었다. 자기도 뛰어야 하냐는 물음이었다.

로베르토는 고개를 저었다.

“휘슬이나 불어주세요. 그리고 탈진했는데 미련하게 뛰려는 부원이 보이면 걷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김진호의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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