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마인드 축구천재-82화 (143/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82화

김정빈과 이야기를 끝마쳤다고 내가 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이번 전지훈련에서 축구부 전체를 성장시킬 생각이었다. 전지훈련 기간은 약 한 달, 첫 번째 주인 지금 최대한 많은 밑 작업을 해내야 남은 전지훈련이 순조로울 것이다.

주전으로 발돋움할 티알을 데려왔고, 로베르토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제 역할을 다할 김정빈을 다독였다. 3학년 부원들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동기부여를 했다.

이제 남은 건 우리 축구부의 아웃사이더 들이었다.

지금은 해가 떨어진 저녁이었고, 자율 훈련 시간이었다. 축구부원 대다수는 야간 조명이 짱짱한 건물 앞 잔디밭에서 각 무리로 나눠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서로 친하지는 않더라도 밝은 장소로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원들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불빛이 부족한 건물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퉁, 퉁 하고 공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고, 좁은 공간에서 훈련 중인 그들을 발견했다.

이 무리는 특이하게도 1, 2, 3학년이 다 뒤섞여 있었다.

훈련에서는 전부 하위권, 인사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부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그들은…… 전임 감독인 지상철이 축구부 인원을 채우기 위해 데려온 임시부원들이다.

그들을 향해 자신감 있게 걸음을 옮겼다.

전지훈련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마지막 작업이다. 전생에서도 이들과의 대화는 순조롭게 풀렸다. 이들의 장단점과 성격은 전부 파악하고 있다. 선수로서 발전할 수 있는 팁들을 전수해 준다면 쉽게 넘어올 것이다.

먼저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1학년 두 명에게 접근했다. 성동현과 박지훈은 아까부터 날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거 같은 둘의 표정을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같이 공 찰래?”

“우리랑?”

“왜?”

예상했던 난관이다. 이번에는 감독 로베르토의 권위를 빌릴 생각이었다.

“감독님이 1학년 친구들이 훈련하는 걸 도와주라고 했거든. 내가 무릎이 안 좋아서 자율 훈련을 많이 못 해서 아쉽다니까 남을 도와주는 것도 실력 늘리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셔서…….”

성동현이 뚱한 얼굴로 일어났다. 성동현은 초등학교 6학년까지 축구부 활동을 하던 친구다. 실력 부족을 느끼고 중학교부턴 축구를 그만뒀다가, 미련이 남아 지상철의 말을 듣고 축구부에 뒤늦게 들어왔다.

“……고맙긴 한데…….”

차분하고 모난 데 없는 둥글둥글한 성격, 성동현부터 공략해서 자연스럽게 2, 3학년에게도 말을 걸 생각이었다.

“우리한테 신경 쓸 필요가 있어?”

“……응?”

그런데, 성동현은 쌀쌀맞게 말하고 있었다.

“너 성골 부원들이랑도 친하잖아. 걔네 훈련 도와주는 게 더 도움이 될걸?”

“아…… 그런 얘기였어? 아니야. 난 부원 전체랑 호흡 맞춰보고 싶은데…….”

“굳이? 우리 같은 떨거지들이랑 왜?”

가만히 있던 박지훈이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박지훈은 초등학교 시절 여러 종목의 운동부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으로 하던 농구부 진학이 마땅찮아서 운동부를 그만뒀던 친구다.

전생에서는 쾌활하던 친군데, 갑자기 이러니 당혹스러웠다.

“어…….”

무엇보다 떨거지라니. 부정적인 단어 한 방에 말문이 막혔다. 무례하지 않게 덤덤하게 자기 비하를 하니 더 당혹스러웠다.

“아, 네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박지훈이 계속 말했다.

“네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고,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거든. 그만큼 알고 있는 것도 많은 거 같고, 너랑 같이 훈련하면 배울 것도 많을 것 같긴 해.”

“근데 왜?”

“아까도 말했듯이 굳이. 굳이 왜? 비효율적이잖아. 우리는 지상철이 놓고 간 애물단지잖아? 2학년 형들처럼 주전도 아니고, 그냥 인원 채우기용으로 있는 거지. 솔직히 감독님 바뀌고 잘리는 줄 알았다니까?”

“……아니, 뭐 그런 식으로 말을 하냐.”

“사실이잖아. 부정한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박지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성동현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날 멍하니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하던 종목의 운동부로 진학하기 어려워서 같은 여러 이유로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던 이들은 속에 미련이 남아 있었고, 급하게 축구부원을 채워야 했던 지상철의 제안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축구부는 축구를 잘해야 한다.

축구 실력이 가장 떨어질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진 이들은 축구부에서 겉돌고, 기가 죽어 있는 친구들이긴 했다. 그런데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전생에서 조언을 해주면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했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그 조언을 할 기회 자체도 거절해 버리니 뇌 정지가 왔다. 고개를 돌리니 2, 3학년생들도 날 보고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니 인사는 받아줬지만 대화는 없었다.

가만히 있으니 성동현이 먼저 말을 걸어줬다. 성동현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박지훈이 너무 세게 말하긴 했어. 근데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그건 그렇네, 내가 얘기하다 보니까 너무 급발진했다. 미안하다 송현준.”

박지훈이 사과까지 하니 더 당혹스러웠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으니 성동현이 대신 상황을 마무리해줬다.

“너 대단한 애잖아? 축구부가 아닐 때부터 알고 있었어. 너는 주전 애들이나 신경 써줘. 우리는 괜찮아.”

“어…… 음…….”

“신경 써줘서 고마워.”

씁쓸하게 웃는 성동현에게 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뭐가 잘못된 거지…… 체육대회에서 우승한 나비 효과인가? 풋살대회에서 우승한 나비 효과인가? 아니면…… 뭐지.”

모든 전생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낸 후에 축구부에 들어온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꼬인 것 같았다.

걸음이 급해졌다. 뛰듯이 걸었다.

“어? 정빈이 형?”

건물 앞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외곽을 도는데 김정빈과 마주쳤다. 날 갑자기 봐서 그런가 김정빈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요.”

“……그러냐?”

“네.”

머리가 복잡해서 짧게만 이야기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들을 그대로 둬야 하는가, 아니면 새 방법을 찾아야 하는가.

오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 * *

송현준이 김정빈을 마주치기 한참 전부터 김정빈은 건물 옆의 잘 보이지 않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김정빈은 점심시간에 송현준에게 들은 말을 되새기며 앞으로의 방침을 고민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준전문가 수준으로 지식을 쌓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자기의 지식과 현장의 괴리가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단 지켜봐야겠다…….”

김정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배울 때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거라…….”

송현준의 말은 가슴에 와닿았지만 막막함도 함께 생겼다. 자신 있다고 생각한 축구에 관련된 지식을 써먹지 못하게 생겨서 머리가 아팠다.

“좋아, 일단 아무나 붙잡고 얘기라도 해 보자.”

송현준은 신기한 중학생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잘 와닿았고, 기억에 남았다. 자신이 고민하거나 찝찝해하던 부분을 긁어줘서 그런 걸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김정빈은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건물 앞에서 훈련하는 부원들보다 뒤에서 훈련하는 부원이 더 적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같이 공 찰래?”

갑자기 송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정빈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겼다.

“우리랑?”

“왜?”

이어지는 부원들의 질문에 송현준은 아까 자신을 상대할 때처럼 능숙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런 모습을 보면 그냥 말을 잘 하는 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모습을 드러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충격적인 얘기가 들려왔다.

“굳이? 우리 같은 떨거지들이랑 왜?”

떨거지라니? 김정빈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그 말을 한 부원을 찾았다. 이름이 박지훈이었을 거다. 감독님이 건네준 자료에 농구부 출신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게 신기해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부원이 이상한 소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상철이 놓고 간 애물단지잖아? 2학년 형들처럼 주전도 아니고, 그냥 인원 채우기용으로 있는 거지. 솔직히 감독님 바뀌고 잘리는 줄 알았다니까?”

애물단지, 인원 채우기용, 아까의 떨거지에 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김정빈은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건물 뒤편에 모여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이름을 전부 외운 이들이라 기억하기 쉬웠다.

“너 대단한 애잖아? 축구부가 아닐 때부터 알고 있었어. 너는 주전 애들이나 신경 써줘. 우리는 괜찮아.”

송현준과 성동현의 대화가 김정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짠한 감정이 김정빈의 가슴을 울렸다.

김정빈은 로베르토에게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식으로 얘길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천천히 이동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정빈이 형?”

어느새 대화를 끝마친 송현준이 자길 발견한 거였다. 김정빈은 자기가 엿듣고 있었던 걸 들킨 줄 알고 당황해서 멈칫했다.

“화장실에 가려고요.”

다행히도 송현준은 그 말을 남기고 김정빈을 앞질러 떠났다.

송현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해가 갔다. 그런 말을 면전에서 들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축구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김정빈도 마음이 아팠는데 송현준은 오죽할까.

아무튼, 로베르토에게 가야 한다.

김정빈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얘기하시죠.”

김정빈은 건물 앞에서 부원들을 지도하던 로베르토를 따로 불러냈다.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얘기하니 순순히 건물 안으로 따라왔다.

“감독님, 박지훈, 성동현, 김윤곤, 김일동, 이배호, 최방섭에 대해 아시지요?”

“당연하죠.”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베르토는 담백하게 답했다.

“축구부원이죠.”

“……그게 단가요?”

“그 이상 필요한가요?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들어보고 싶은데요.”

“……그게, 제가 방금…….”

김정빈은 막 들었던 얘기를 있는 그대로 로베르토에게 말했다. 감독이니 해결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로베르토의 대답은 김정빈의 예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사적인 문제까지는 개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준을 잡는 일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훈련을 시키고 더 잘하는 선수를 출전시킬 겁니다. 선수와 감정적으로 엮이기 시작하면 선수 선발이 어려워집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이해가 가는 이유였기에 김정빈은 말문이 막혔다. 오히려 배경을 보지 않고 현재의 실력만을 본다는 말이 멋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저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입부 했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겪어본 선수들이고요. 자존감도 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똑같은 조건으로 훈련하는 게 가능할까요? 전제부터 잘못된 게 아닐까요?”

로베르토는 어느 순간부터 김정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김정빈은 로베르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로베르토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여유가 없습니다. 제 몸은 한 개예요.”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즉각 대답한 김정빈은 자기가 한 얘기에 놀라서 멈칫했다.

“뭘요?”

김정빈은 자기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했고, 마치 본능처럼 말했다.

“앞으로 선수들의 말을 제가 듣겠습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걸 정리해서 감독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로베르토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고는 작게 웃었다.

“……좋아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됐죠? 이제 나가봐요.”

“아, 예. 알겠습니다.”

결국 스스로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꼴이 돼서 김정빈은 머쓱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 책 공부해요. 내가 공부한 기본서니까. 영어는 어느 정도 하죠?”

그때, 로베르토의 목소리가 들려 몸을 돌리자 책 한 권이 날아왔다. 꽤 무거운 책이었지만 김정빈은 잘 받았다.

“……감사합니다!”

김정빈은 책을 끌어안고 로베르토에게 꾸벅 인사한 후 밖으로 나왔다.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쁜 것인지 김정빈은 처음 알았다.

0